|| [[파일:1280px-Otomo_Yoshimune.jpg|width=300]] || || [[파일:Japanese_Crest_Daki_hana_Gyouyou.svg.png|width=200]] || || '''오토모 요시무네''' || || '''오토모 가문의 하나쿄바, 산가지 [[가몬(일본)|가몬]]'''[* 나베시마 행엽과 다르게 행엽 윗부분에 줄이 없다.] || 大友義統 / 大友吉統 (おおとも よしむね) (1558년 ~ 1610년 9월 2일) [목차] [clearfix] == 개요 == 오토모 요시무네는 [[오토모 소린]]의 장남이자 후계자이다. 분고국의 [[다이묘]]였으나 이후 [[가이에키]]가 되었다. == 생애 == 1558년 탄생한 요시무네는 1574년 '''콘스탄틴'''(Constantine)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1576년 공식적으로 가독을 승계하였고 [[시마즈]]를 휴가국에서 내쫓기 위하여 움직였다. 그러나 오토모군은 1578년 미미가와 전투에서 참패하였고 요시무네는 가문 내 반대파를 다독여 가문을 유지하는데 주력하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시마즈군에 의한 [[류조지 다카노부]]의 사망을 틈타 잔존 세력을 공격하는 등의 활동을 하거나 요시무네는 시마즈의 북상과 맞춰 비장의 카드인 [[다카하시 쇼운]]과 [[다치바나 도세츠]]를 적극 활용하여 치쿠고를 탈환하고자 했다. 하지만, 집안 자체가 망조였는지, 오토모 가문은 은거했지만 실권을 쥐고 있던 아버지 [[오토모 소린]]과의 내분으로 아군 무장들도 비협조적이고, 또 앞선 미미가와 전투에서의 패배로 숙련병들은 거의 죽어버려 싸움에 익숙치 않은 병사들이 많았다. 게다가 류조지나 시마즈 가문은 오토모 가문의 세력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1587년 시마즈군의 [[규슈]] 통일 야욕에 맞서 [[오토모 소린]]의 구원요청에 따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센고쿠 히데히사]], [[쵸소카베 모토치카]], [[소고 마사야스]] 등의 지원군이 도착하였다.[* [[쵸소카베 모토치카]]는 [[센고쿠 히데히사]]와 [[소고 마사야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적이 있어 사이가 좋지 않았다.] 쵸소카베군은 방어적으로 전투에 임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요시무네는 이를 거부하고 아군의 성을 구원하러 가기를 주장하였다. 이들이 도착했을때는 이미 시마즈군이 성을 점령한 뒤였고, 쵸소카베군은 또 다시 철수를 주장했으나 요시무네와 히데히사는 이를 무시하고 무리한 전투를 벌였으나 참패하고 쵸소카베 가문의 후계자 [[쵸소카베 노부치카]]와 소고 마사야스 또한 전사하는 대패를 당했다. 이것이 헤츠기가와 전투이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시마즈 평정을 완료한 이후에는 분고의 다이묘로 인정받았고, 이후 [[임진왜란]]에도 참전하게 되었다. [[구로다 나가마사]] 휘하에서 6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그러나 [[평양성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구원 요청을 무시하고 [[한양]]으로 철수하였고, 이로 인해 사기가 떨어진 일본군은 조명연합군에 평양성을 함락당했다. 이 사건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요시무네는 [[가이에키]] 되었다.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하지는 않았으나 [[이시다 미츠나리]] 측 서군에 서서 [[규슈]]에서 [[구로다 요시타카]]와 싸웠으나 패하고 포로로 잡혀 히타치국으로 유배되었다. 1605년 9월 2일 사망하였고, 가문은 아들인 오토모 요시노리(大友義乗, 1577 ~ 1612)때에 막부의 [[하타모토]]로 추락했지만 권세는 대단했고 그의 손자 오토모 요시치카(大友義親, 1597 ~ 1619)는 이후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서 활약하였지만 그가 사망이후에 아들이나 손자가 없어서 오토모 가문은 망해버린다. [각주] [[분류:센고쿠 시대/인물]][[분류:임진왜란/군인]][[분류:가이에키된 인물]][[분류:1558년 출생]][[분류:1605년 사망]][[분류:세키가하라 전투/서군]][[분류:오토모 가문]][[분류:다이묘]][[분류:종4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