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49년 출생]][[분류:1971년 데뷔]][[분류:1983년 은퇴]][[분류: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출신 인물]][[분류:독일의 축구선수]][[분류:독일의 축구감독]][[분류:FC 바젤/은퇴, 이적]][[분류:VfB 슈투트가르트/은퇴, 이적]][[분류:FC 루가노/은퇴, 이적]][[분류:FC 루체른/은퇴, 이적]][[분류:FC 아라우/역대 감독]][[분류: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역대 감독]][[분류: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역대 감독]][[분류:FC 바이에른 뮌헨/역대 감독]][[분류: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분류:UEFA 챔피언스 리그 다회 우승 감독]][[분류:UEFA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감독]][[분류:서독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1972 뮌헨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참가 감독]][[분류: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참가 감독]]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282828 0%, #333333 20%, #333333 80%, #282828);" {{{#e0c9a5 ''' 오트마어 히츠펠트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4> {{{#333333,#cccccc '''둘러보기 틀 모음'''}}} || ||<-4> {{{#333333,#cccccc '''대표팀'''}}} || || [[틀: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파일:Switzerland SFV 2010.png|height=50]]]][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2px; background: #D03245; font-size: 0.9em;" [[틀: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ffffff '''스위스'''}}}]]}}}[br]{{{-2 38대}}} || || || || ||<-4> {{{#333333,#cccccc '''클럽'''}}} || || [[틀:보루시아 도르트문트 감독|[[파일: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로고.svg|height=50]]]][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2px; background: #F9ED10; font-size: 0.9em;" [[틀:보루시아 도르트문트 감독|{{{#000000 '''도르트문트'''}}}]]}}}[br]{{{-2 46대}}} || [[틀:FC 바이에른 뮌헨 감독|[[파일:FC 바이에른 뮌헨 로고(2002~2017).svg|height=50]]]][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2px; background: #B70919; font-size: 0.9em;" [[틀:FC 바이에른 뮌헨 감독|{{{#ffffff '''바이에른 뮌헨'''}}}]]}}}[br]{{{-3 47대,49대}}} || || ||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282828 0%, #333333 20%, #333333 80%, #282828);" {{{#e0c9a5 ''' 오트마어 히츠펠트의 수상 이력 ''' }}} }}}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4> {{{#333333,#cccccc '''둘러보기 틀 모음'''}}} || ||<-4> {{{#333333,#cccccc '''개인 수상'''}}} || || [[틀: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1990년대)|[[파일:월드사커 로고.png|height=50]]]][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2px; background: #ED1C35; font-size: 0.9em;" [[틀: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1990년대)|{{{#ffffff '''1997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 || || || || }}}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bottom, rgba(50%, 50%, 50%, 30%) 0%, transparent);" {{{+1 {{{#000000,#e5e5e5 ''' 독일의 축구인 '''}}}}}}}}}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Ottmar Hitzfeld.jpg|width=100%]]}}} || ||<-2> {{{#000000,#e5e5e5 ''' 이름 ''' }}} || {{{+1 '''오트마어 히츠펠트'''}}}[br]'''Ottmar Hitzfeld''' || ||<|2><-2> {{{#000000,#e5e5e5 ''' 출생 ''' }}} ||[[1949년]] [[1월 12일]] ([age(1949-01-12)]세) || ||{{{-1 [[연합군 점령하 독일|독일국]] [[바덴뷔르템베르크|바덴뷔르템베르크주]] [[프라이부르크|프라이부르크현]] 뢰라흐군}}} || ||<-2> {{{#000000,#e5e5e5 ''' 국적 ''' }}} ||[include(틀:국기, 국명=독일)] || ||<-2> {{{#000000,#e5e5e5 ''' 신체 ''' }}} ||[[키(신체)|키]] 176cm || ||<-2> {{{#000000,#e5e5e5 ''' 직업 ''' }}} ||[[축구 선수]] ([[공격수]][* 스트라이커] / ^^은퇴^^)[br][[축구 감독]] || ||<|2> {{{#000000,#e5e5e5 ''' 소속 ''' }}} || {{{#000000,#e5e5e5 ''' 선수 ''' }}} ||'''[[FC 바젤]] (1971~1975)'''[br][[VfB 슈투트가르트]] (1975~1978)[br][[FC 루가노]] (1978~1980)[br][[FC 루체른 ]](1980~1983) || || {{{#000000,#e5e5e5 ''' 감독 ''' }}} ||추크 94 (1983~1984)[br][[FC 아라우]] (1984~1988)[br][[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GC 취리히]] (1988~1991)[br]'''[[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91~1997)'''[br]'''[[FC 바이에른 뮌헨]] (1998~2004)'''[br][[FC 바이에른 뮌헨]] (2007~2008)[br]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스위스 대표팀]] (2008~2014)''' || ||<-2> {{{#000000,#e5e5e5 ''' 국가대표 ''' }}} ||없음 || [목차] [clearfix] == 개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ottmar-hitzfeld-autor.jpg|width=100%]]}}}|| [[독일]]의 전 [[축구 선수]]이자 전 [[축구 감독]]. 독일을 대표하는 명문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FC 바이에른 뮌헨|바이에른 뮌헨]]의 전성기를 이끈 감독. [[주제 무리뉴]]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파비오 카펠로]], [[마르첼로 리피]], [[비센테 델보스케]], [[아르센 벵거]]와 함께 [[알렉스 퍼거슨]]의 라이벌이라고 불렸던 인물로, 감독 시절 총 26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린 우승 청부사이자 축구사에서 가장 성공한 감독 중 한명이다. 특히 독일에서는 '고트마르(Gottmar)[* '신'이라는 뜻의 Der Gott과 이름 오트마어의 합성어]'라 불릴 정도로 칭송받았던 명장이다. 한국 축구팬들에겐 인지도가 별로 없는 감독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유럽 축구를 시청한 팬들에게 명장을 꼽으라면 언제나 언급될 정도로 전성기의 포스는 엄청났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르트문트]]와 [[FC 바이에른 뮌헨|뮌헨]]의 감독으로 모두 [[UEFA 챔피언스 리그|UCL]]을 제패하고, 7회의 [[분데스리가]] 타이틀을 획득했다. == 선수 경력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edia.media.b7022db2-92ff-41d7-a39a-83c3287c45e6.original1024.jpg|width=100%]]}}}|| 화려했던 감독 시절과는 달리, 선수 생활에는 독일인이지만 정작 독일에서는 자리를 못잡고 스위스 슈퍼리그에서 주로 활동했다. 독일 하부리그에서 아마추어 선수로 활동하던 히츠펠트는 1971년 22살의 나이로 스위스의 명문구단 [[FC 바젤]]에 스카웃되어 주전 스트라이커로서 4시즌동안 92경기 출전 66득점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하며 2차례의 리그 우승과 1번의 스위스컵 우승을 기록한다. 바젤에서 활동하는 도중, [[1972 뮌헨 올림픽]]에 서독 대표팀 선수로 참가하기도 했다. 이런 활약상을 바탕으로 [[VfB 슈투트가르트]]가 히츠펠트를 영입한다. 당시 슈투트가르트는 2부리그 소속이었는데 2번째 시즌인 1976/77 시즌 분데스리가 승격으로 이끌었으며, 승격 후 다음시즌 1977/78 시즌에 리그 4위를 기록하는 등 슈투트가르트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그 이후 다시 스위스로 복귀했고 FC 루가노와 FC 루체른에서도 주전스트라이커로 활약하며 34살의 나이로 은퇴한다. == 지도자 경력 == === 스위스 슈퍼 리그 시절 === 1983년, 은퇴 직후 곧바로 스위스 클럽인 추크 94 감독으로 부임한다. 2부 리그 소속팀이었던 추크 94를 부임하자마자 팀을 우승시켜 1부 리그로 승격시킨다. 추크 94의 놀라운 성과를 바탕으로 그 다음시즌에는 1부 리그 팀인 FC 아라우로 이적하여 전 시즌 10위였던 팀을 바로 리그 준우승과 FA컵인 스위스 컵을 우승을 차지 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둔다. 비록 그 다음 시즌인 85/86시즌에는 리그 7위를, 86/87시즌에는 리그 11위를 기록하며 부진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87/88시즌에는 리그 4위로 팀을 올려놓는데 성공했다. 그 뒤 1988년에는 스위스의 명문 구단인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로 팀을 옮긴다. 그라스호퍼에서의 3시즌 동안 2차례의 리그 우승, 1차례의 FA컵 우승을 기록하며 특히 1989/90 시즌에는 한 시즌 동시에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을 차지하는 더블을 달성한다.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hitzfeld_collage.jpg|width=100%]]}}}|| 스위스 리그에서의 좋은 활약으로 1990/91시즌 리그 10위를 기록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부름을 받아 1991/92시즌 감독으로 부임한다. FC 아라우처럼 전 시즌 10위 팀을 한 시즌만에 역시 리그 2위까지 올려놓는다. 1992/93시즌에는 리그 4위와 DFB-포칼 16강에 팀을 올려놓았고 [[UEFA 유로파 리그|UEFA컵]] 결승전에 진출하지만 [[유벤투스 FC]]에게 일격을 당하며 준우승에 머무른다. 그 이후 1993/94 시즌에도 리그 4위를 기록하며 팀을 만든 히츠펠트는 부임 후 4시즌 만인 1994/95 시즌에 팀을 [[분데스리가]] 정상에 올려놓았고 1995/96시즌에 리그 2연패에 달성한다. 1996/97 시즌에는 리그에서는 3위에 머물렀지만 [[UEFA 챔피언스리그]]는 결승에 진출하는데 성공한다. 상대는 4년 전 UEFA컵 결승전에서 아픔을 줬던 [[유벤투스 FC]]. [[UEFA 챔피언스 리그/1996-97 시즌/결승전|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는 유벤투스를 상대로 마침내 3-1로 승리를 거두어 4년 전 복수를 하며, 첫번째 [[빅 이어]]를 들어 올린다. 하지만 팀 프런트와의 갈등으로 챔피언스리그 우승 직후 기술고문직으로 임명된다. 형식상 승진이지만 실제로는 도르트문트 상층부와의 갈등이 원인으로 팀을 아예 떠나는 대신 명예직인 기술고문직으로 추대하는 식으로 감독직 사임을 대신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명예직이었으니 실권은 없었다. === 바이에른 뮌헨 1기 === 그로 부터 1년 뒤 오트마어 히츠펠트는 1998/99 시즌 [[FC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부임한 첫번째 시즌에 압도적인 승점 차로 분데스리가 우승을 달성하고, 동시에 [[DFB-포칼]] 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진출하며 [[트레블]] 달성을 눈 앞에 두게 된다. 하지만 DFB-포칼에서는 베르더 브레멘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물게 된다.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결승전을 치렀다. [[로이 킨]]과 [[폴 스콜스]]가 경고누적으로 결승전에 결장을 하며 불리하게 시작한 맨유를 상대로 1:0의 스코어로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하는가 싶었지만 인저리 타임때 테디 셰링엄과 [[올레 군나르 솔샤르]]에게 일격을 당하며 극적으로 우승을 내주게 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ee29174-7ce5-4476-82b2-7833007ea9e0.jpeg.jpg|width=100%]]}}}|| 1999/00 시즌에는 챔피언스리그 4강에 머물렀지만 리그 우승과 포칼 우승을 차지하며 더블을 달성하였고 2000/01시즌에는 리그 3연패와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레알 마드리드]]를 꺾고 결승에 진출, [[발렌시아 CF]]를 상대로 승부차기 승리를 거둬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성공하며 히츠펠트 개인 통산 2번째로 빅이어를 달성한다. 2000년까지가 오트마어 히츠펠트 감독 인생의 최정점이다. 이 이후로 급변하는 축구 트렌드에 적응 하지 못하며 서서히 밀려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sm_93437-hitzfeld_double2008_8148f003f3.jpg|width=100%]]}}}|| 그 다음 시즌인 2001-02 시즌에는 전통의 3백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4백으로의 전환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그 동안 3백만 사용하던 선수들이 제대로 적응 하지 못하고 [[메멧 숄]], 파울로 팀, [[슈테판 에펜베르크]], [[옌스 예레미스]] 등 미드필더에서 중심을 잡아줘야 할 선수들의 줄부상으로 결국 [[마티아스 자머]] 감독이 이끄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우승을 내줬고, [[바이어 04 레버쿠젠]]에 밀려 리그 3위로 추락하게 된다. 바이에른 뮌헨의 수뇌부는 단순히 3백에서 4백으로 전환만 꾀한것이 아니라 2001-02 시즌 [[지네딘 지단]]과 [[루이스 피구]]가 이끄는 레알 마드리드의 '아름다운 축구'의 매력을 느껴 바이에른 뮌헨의 축구 철학 자체를 개혁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 전까지 바이에른 뮌헨의 전통적인 축구 철학이란 라인을 내린 뒤 피지컬과 체력으로 상대를 압박한 다음에 공격 작업은 그야말로 한 방으로 끝내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런 축구 철학은 '''FC 브라이트니게'''라고 불리던 1970년대에 정립된 전술이었고 오트마어 히츠펠트 역시 이 전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런 축구 철학을 개혁하고자 바이에른 뮌헨은 2001-02 시즌 윈터 브레이크 기간에 이미 라이벌인 레버쿠젠의 에이스 [[미하엘 발락]]과 [[제 호베르투]]와 당시 독일 축구의 미래라고 불렸던 [[세바스티안 다이슬러]]를 영입하며 개혁에 어울릴 만한 인물들을 영입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바이에른 뮌헨의 핵심이었지만 바이에른 뮌헨의 구상과는 전혀 다른 축구색을 지닌 [[슈테판 에펜베르크]]를 방출한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미하엘 발락의 보좌 위에 제 호베르투-메멧 숄-다이슬러가 화려한 개인기와 아름다운 패스로 상대를 누르고 양 윙백인 리자라쥐와 샤놀의 오버래핑으로 상대를 몰아 붙이고 지오반니 에우베르, 로이 마카이 등 스트라이커들이 마무리하는 그런 축구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독일 축구에 화려함을 지닌 새로운 축구를 시도하면서 출발한 2002-03 시즌은 리빌딩의 핵심인 다이슬러와 메멧 숄은 부상으로 제대로 나오지도 못하고 전통적인 독일의 축구와 바이에른 뮌헨의 리빌딩 시도는 서로 부합되지 못했다. 결국 라인을 내리고 피지컬적으로 상대를 압박한 후 한방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전술과 세바스티안 다이슬러, 제 호베르투, 메멧 숄 등을 보좌할 생각으로 데려왔던 미하엘 발락에게 과거 슈테판 에펜베르크처럼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맡기는 과거의 전술로 복귀하였다. 이것이 분데스리가 내에서는 먹혀들어 리그와 DFB-포칼 우승을 기록하지만 정작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조별리그 4위로 광탈하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게 됐다. 2003-04 시즌 팀의 에이스인 [[지오반니 에우베르]]를 방출하고 스페인 데포르티보에서 [[로이 마카이]]를 클럽 레코드를 깨면서 영입하는 등 팀 정비에 박차를 가했지만 2003-04 시즌 리그 준우승, DFB-포칼 16강, 챔피언스 리그 16강 등 무관에 그치며 상호 합의하에 바이에른 뮌헨 감독직에서 물러난다. 유로 2004에서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한 독일 대표팀의 감독직으로 0순위에 올랐으나 휴식이라는 명목하에 거절하였고 2년 동안 TV 해설가로 활동한다. 이 시기에 따로 영어 과외 선생을 구하여 영어 회화 수업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차기 행선지로 --당시에도 고령이었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후임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으로 영입될지도 모른다는 루머가 있었다. === 바이에른 뮌헨 2기 === 2년간 휴식을 취하던 히츠펠트는 다시 클럽 감독직으로 복귀하는데 행선지는 다름 아닌 바이에른 뮌헨. 오트마어 히츠펠트 사임 후 슈투트가르트 감독으로 좋은 활약을 보여줬던 [[펠릭스 마가트]] 감독을 이적료까지 지불하며 영입하여 2004-05, 2005-06 시즌 더블을 달성하는데 성공하였으나 2006-07 시즌 리그에서 최악의 모습을 보이면서 챔피언스 리그 출전 순위인 리그 3위도 기록하기도 힘든 모습을 보여주자 중간에 해고 하기에 이르고 다시 히츠펠트에게 오퍼를 넣는다. 바이에른 뮌헨 입장에선 과거 자신들에게 영광을 가져다 준 실력있는 감독이자 또 리그 중반에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카드였고 히츠펠트 입장에서도 2년 반 동안 휴식을 취하고 나서 현장 감각을 익힐 수 있으면서도 리그 성적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 안정적인 카드[* 이미 마카트가 리그 순위 자체를 추락시켰기 때문에 부담이 없었다.]로 서로에게 윈-윈인 셈이었다. 감독 복귀 직후 챔피언스 리그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리그에서도 팀의 경기력이 살아나자 히츠펠트는 바이에른 뮌헨 프런트의 지지 하에 2007-08 시즌에도 감독직을 수행하기로 결정되었다. 2007-08 시즌 바이에른 뮌헨은 챔피언스 리그 진출 실패에 대한 [[분노의 영입]]으로 [[루카 토니]], [[미로슬라프 클로제]], [[프랑크 리베리]] 등을 영입하며 시즌 내에 우승할 수 있는 리그, DFB-포칼, 그리고 [[UEFA 유로파 리그|UEFA 컵]] 우승을 목표로 하며 명예 회복에 나선다. 초반 루카 토니-클로제의 투톱의 엄청난 공격력을 바탕으로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주며 연장 계약을 논의하는 [[설레발]]을 떨었으나 이후 UEFA 컵에서의 지지부진한 모습과 리그 내에서는 아예 대놓고 10백을 들고나와 무승부를 노리는 하위권의 팀들을 상대로 제대로 된 해법을 내놓지 못하는 등 답답한 경기력을 보여주자 바켄바우어와 루메니게 등 바이에른 뮌헨의 수뇌부들에게 대놓고 디스를 당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리그와 DFB-포칼 우승을 달성하며 바이에른 뮌헨에서만 3번째 더블을 달성했지만 UEFA 컵에서는 4강에서 만난 제니트에게 완패를 당하며 탈락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더 이상 연장 계약을 하지 않고 바이에른 뮌헨을 떠났다. 2년 반 동안 휴식을 취한 뒤 바이에른 뮌헨으로 복귀하였어도 오트마어 히츠펠트는 라인을 내리고 상대를 압박한 뒤 한방으로 결정하는 과거의 스타일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 중간에 감독으로 부임한 [[펠릭스 마가트]] 역시 마찬가지. 이런 바이에른 뮌헨의 축구 전술은 2009년 [[루이 판할]]이 오고 나서야 개혁이 시작되며 2012-13 시즌 [[유프 하인케스]]에 가서야 최정점을 맞는다. 그 이후 뮌헨은 2012-13 시즌 이후 [[펩 과르디올라]] 체제의 과도기를 거치고, 힌지 플릭에 이르러 정상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 2021년 현재. === 스위스 대표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94_3fabC_l.jpg|width=100%]]}}}|| 2008년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다. 2010 남아공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그리스, 라트비아, 이스라엘, 룩셈부르크, 몰도바와 같은 조에 배정. 예선 초반 최약체 룩셈부르크에 홈에서 패배하는 굴욕을 겪었지만 이후 승승장구하며 조 예선 1위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본선에서는 스페인, 칠레, 온두라스와 같은 조로 편성되었고 첫 경기에서 유로 2008 챔피언 스페인[* 스페인 감독은 과거 챔피언스리그에서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비센테 델보스케]]였다.]을 1:0으로 잡아내는 대이변을 연출[* 첫 경기를 진 스페인은 이후 6연승하면서 사상 첫 월드컵 우승에 성공했다.]했으나 2차전 칠레전에서 1:0 패배를 당해 3차전 온두라스를 반드시 잡아야했다. 그러나 3차전 최약체인 온두라스에 0:0 무승부에 그치면서 1승 1무 1패를 기록. 조 3위로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유로 2012 예선에서는 잉글랜드와 몬테네그로에 밀려 본선진출에 실패하였다. 2패로 출발한 예선 초반의 부진이 팀의 발목을 세게 잡았다.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유럽 지역 예선에 알바니아,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추첨 때 피파랭킹으로 톱시드 국가였으나 무기력하게 탈락했다.], 슬로베니아, 키프로스와 배정이 되었고 조 1위를 차지하여 본선에 진출하였다. 그룹 E조에 프랑스, 온두라스, 에콰도르와 같은 조에 배정되었고 프랑스에게 2:5로 대패하지만 에콰도르와 온두라스를 상대로 승리하며 2승 1패 조 2위로 16강에 진출한다. 16강전에서는 [[리오넬 메시]]가 이끄는 우승후보 아르헨티나와 경기를 치뤘고 0:1로 패하여 16강에서 탈락했다. 2014 브라질 월드컵을 끝으로 65세의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에는 그냥 간간히 인터뷰로 근황을 알리고 계시다. == 기록 == === 선수 === ==== 대회 기록 ==== * [[FC 바젤]] (1971~1975) * [[스위스 슈퍼 리그|나치오날리가 A]]: 1971–72, 1972-73 * 스위스컵: 1974-75 ==== 개인 수상 ==== * [[스위스 슈퍼 리그|나치오날리가 A]] 득점왕: 1972-73 === 감독 === ==== 대회 기록 ==== * 추크 94 (1983~1984) * [[스위스 챌린지 리그|나치오날리가 B]]: 1983-84 * [[FC 아라우]] (1984~1988) * 스위스컵: 1984-85 *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1988~1991) * [[스위스 슈퍼 리그|나치오날리가 A]]: 1989-90, 1990-91 * 스위스컵: 1988-89, 1989-90 * 스위스 슈퍼컵: 1989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91~1997) * [[분데스리가]]: 1994-95, 1995-96 * [[DFL-슈퍼컵]]: 1995, 1996 * [[UEFA 챔피언스 리그]]: 1996-97 * [[FC 바이에른 뮌헨]] (1998~2004, 2007~2008) * [[분데스리가]]: 1998-99, 1999-00, 2000-01, 2002-03, 2007-08 * [[DFB-포칼]]: 1999-00, 2002-03, 2007-08 * DFL-리가포칼: 1998, 1999, 2000, 2007 * [[UEFA 챔피언스 리그]]: 2000-01 * [[인터컨티넨탈컵]]: 2001 ==== 개인 수상 ==== *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 1997 * UEFA 올해의 감독: 2001 * 유럽 올해의 축구 감독[* 제프 헤어베어거 어워드]: 1997 * 유럽 시즌의 축구 감독: 1996-97, 2000-01 * 독일 올해의 축구 감독: 2008 * 키커 올해의 감독: 1992-93, 1995-96, 1998-99, 1999-00, 2000-01, 2007-08 * [[IFFHS]] 세계 최고의 클럽 감독: 1997, 2001 == 여담 == [[파일:DbTwFnOWAAU6xeO.png]] * 스위스 알프스산에 본인의 이름을 딴 '''''오트마어 히츠펠트 스타디움''''이 존재한다. 이 경기장은 스위스 마운틴 리그 소속 아마추어 팀 FC 기스폰이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해발 2000m 고도에 위치해 있어 유럽에서 가장 높은 홈구장으로 알려져있다. 18년동안 기스폰에서 뛴 디에고 압고츠폰은 축구 장소로는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평가했으며 고도가 높아 호흡하기가 어려워서 환경이 익숙하지 않은 상대와 경기할 때 이점을 갖는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높은 고도 환경에 익숙해서 경기 중반에 5:0으로 뒤지고 있어도 다시 돌아와서 이길수 있다고 한다.] 단점도 많은데 고도가 높아 케이블카 2대를 가동해야 하며 겨울에는 스키장이 된다고 한다. 또한 공이 날라가면 언덕으로 인해 200~300m 정도 내려간다고 한다. 40년동안 공 1000여개가 분실되었다고.. 2008년 유럽 산악 챔피언십이 열렸을 당시 히츠펠트가 개막식 킥오프에 참석하기도 했다. * 특이사항으로는 수학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으며, 1·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 군단장으로 복무하며 [[철십자 훈장]]을 받은 오토 히츠펠트 장군의 친조카이다. 그 이유로 '장군(der General)'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 아버지인 로버트 히츠펠트는 치과의사였다고 한다. * 성격 더럽기로 유명한 [[슈테판 에펜베르크]]를 통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에펜베르크가 히츠펠트의 말은 굉장히 잘 들었다고. 히츠펠트 본인도 에펜베르크를 많이 믿어서 그라운드 위에서 그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하는 등 많은 신뢰를 보여주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참가 감독)] [include(틀: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참가 감독)]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