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와키타 나오카타(脇田直賢, 1585-1660)는 [[일본]]의 [[사무라이]]이며, [[기리시탄]]이었다. [[마에다 토시이에]]의 장남 마에다 토시나가의 가신으로 활약했으며 [[오사카 전투]]에서 용맹을 과시하였으며 행정 능력이 매우 뛰어나 마에다 가문의 큰 신임을 받았다. 어찌나 신임이 두터웠는지 마에다 가문에서는 와키타 나오카타를 사망하기 1년 전인 1659년이 되어서야 겨우 은퇴를 허용했을 정도였다. [[오사카 전투]]의 군공으로 [[고쿠다카]] 1500석을 받았다. == 출신 == 사실 그의 정체는 [[조선인]]이다. 본명은 김여철(金如鉄)로 본관은 [[광산 김씨]], 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했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사한 김시성이었다. 한양에서 살고 있다가 왜군의 공격을 받고 가족과 생이별을 했다. 이때 일본의 [[다이묘]] [[우키타 히데이에]]가 주워서 [[임진왜란]]이 종결될 시기에 일본으로 데려갔다. 히데이에의 정실 [[고히메]]가 기르다가 [[마에다 토시이에]]의 아들 [[마에다 토시나가]]의 정실 [[에이히메]]가 마음에 들어해 마에다 부부의 손에서 자라 마에다 가문의 가신이 되었다. 에이히메의 주선으로 와키타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마에다 가문은 친 도요토미 파였음에도 생존하는 것에 성공했을뿐더러 [[카가 번]] 약 100만 석의 번주로 [[도쿠가와 막부]] 다이묘 중 유일하게 100만 석을 넘긴 다이묘로 특혜를 받고, [[대정봉환]] 이후에도 살아남았던 가문인 만큼, 그 가신인 와키타 나오카타 역시 오사카 전투 후에는 평화로운 삶을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살아오면서 [[조선인]]이라는 자신의 원래 정체성과 [[일본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 사이에서의 갈등을 극복한 한 인물의 삶이었다. 그리고 [[양반]] 집안의 자손이라 그런지 [[렌가]]나 정원 조성 등의 문화 생활에 능했다고 한다. [[타카야마 우콘]]의 영향을 받아 [[키리시탄]]이었다고 한다. 본인의 저서 여철가전기(如鉄家伝記)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조선국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씨이고 자는 시성으로 한림학사였다. 어머니 성함은 잊었다. 이름은 여철이라 하였다. 나라의 풍습에 따라 어려서부터 문장을 배웠기 때문에 이를 기록할 수 있다. 분로쿠 원년, 임진년. 관백 히데요시 공이 조선을 습격하기 위해 히젠 나고야까지 출진하였다. 츄코쿠, 시코쿠의 다이묘들을 인솔하여 비젠 츄나곤 히데이에 경이 대소군과 같이 부산포로 도해하였다. 조선에도 요새를 구축하고 곳곳에서 방비하였지만, 수백 년 간 싸움에 익숙치 않았기 때문에 곳곳에서 패하고, 서울도 내주고 도망갔다. 그때 시성 부자가 전사하였다. 내가 일곱 살 때의 일이다. 히데이에 경의 포로가 되었다. == 관련 매체 == * [[https://youtu.be/Bnb_eKz2o6k]] * 민족을 넘은 삶 - 김여철 / 와키타 나오카타 : 한일 역사의 비밀의 문을 열다 (최관 지음) [[분류:센고쿠 시대/인물]][[분류:에도 시대/인물]][[분류:한국계 일본인]][[분류:1585년 출생]][[분류:1660년 사망]][[분류:광산 김씨]][[분류:일본으로 귀화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