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345년 사망]][[분류:심왕]][[분류:고려의 왕자]][[분류:대립왕]] [include(틀:역대 심왕)]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제2대 심왕[br]{{{+1 왕고 | 王暠 }}}'''}}} || ||<|2> '''출생''' ||? || ||[[고려]] || ||<|2> '''사망''' ||[[1345년]] [[8월 11일]] || ||[[고려]] || ||<|2> '''재위기간''' ||'''{{{#670000 제2대 심왕}}}''' || ||[[1316년]] [[4월 1일]] ~ [[1345년]] [[8월 11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개성 왕씨]] || || '''휘''' ||'''[[고려]]:''' 고(暠) ---- '''[[원나라|원]]:''' 올제이투(完澤禿) || || '''부모''' ||친부 [[왕자(고려)#충렬왕의 왕자|왕자]](王滋)[br]양부 [[충선왕]] || || '''형제자매''' ||3남 중 2남 || || '''배우자''' ||노룬공주[* 원나라 양왕 [[송산(양왕)|송산]]의 딸.] || || '''자녀''' ||1남 || || '''봉호''' ||연안군(延安君) || }}}}}}}}}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의 왕족이자 제2대 [[심왕]]. 제25대 [[충렬왕]]과 [[정화궁주]] 왕씨의 장남인 강양공(江陽公) [[왕자(고려)#s-2|왕자]](王滋)의 차남으로 [[몽골]]식 성명은 '왕올제이투'(王完澤禿)였다. == 생애 == [[충렬왕]]은 태자 시절 [[정화궁주]] 왕씨를 태자비로 맞았으나,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의 딸인 [[제국대장공주]] 보르지긴 쿠틀룩켈미쉬를 [[왕비]]로 맞으면서 그 입김 때문에 정화궁주는 제2비로 밀려났다. 따라서 정화궁주의 아들 왕자도 태자가 되지 못했다. 즉 장자상속제에 따르면 원래는 충렬왕의 장남 왕자의 아들인 왕고가 차남 [[충선왕]]의 아들인 [[충숙왕]]보다 계승 순위에서 앞섰다. 어릴 때 작은아버지 [[충선왕]](제26대)의 양자가 되어 궁중에서 길러지면서 '연안군'에 봉해졌다. 1313년에 [[충선왕]]이 김문연을 [[원나라]]에 보낼 때 왕고는 원나라에 체류해 인질이 되었으며, 1315년 10월에는 통주에서 [[계국대장공주]] 보르지긴 부다시리를 알현했다. 1316년 3월에 양부 충선왕으로부터 심왕의 자리를 물려받으면서 원나라 [[송산(양왕)|양왕]]의 딸이자 [[계국대장공주]]의 조카인 노룬공주(訥倫公主)에게 장가를 갔다. 왕고는 [[고려]]의 국왕이 될 뜻을 넘보고, 사촌인 [[충숙왕]] 왕도를 여러 차례 참소했는데, 1322년 3월, 왕고가 [[원나라]]의 [[원영종(5대)|영종]](제5대)에게 총애를 받자 많은 대신들이 그를 위해 [[충숙왕]]을 참소했다. 원나라에 충숙왕이 입조했을 때 '''형부에 가뒀다가 머리를 깎고 석불사에 출가시켜 [[승려]]가 되도록 만들기도 했다.''' 심왕부의 신하인 백응구가 [[고려]]로 도망치자 영종에게 아두라를 보내 백응구를 대도로 돌려보내는 지시를 내리게 했으며, [[충숙왕]]이 이를 즉시 이행시키지 않자 왕고는 충숙왕이 그 칙서를 찢었다고 참소했다. 이로 인해 1321년 충숙왕이 입조하자 영종이 크게 격노해 그 일을 힐책해서 인장을 거두고 사신을 보내 조사하게 했다. 또한 왕고는 [[고려]]의 재상들에게 >"[[충숙왕]]이 왕위를 계승한 이래로 영종의 사신을 영접하지 않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놀기만 했다." 면서 >"샤데이가 도착하면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대답해야 한다." 고 했으며, 왕고는 고려에서 충숙왕에게 돈과 재물을 많이 보내는 것을 싫어해 양성주를 보내 영종의 명이라면서 그 재물들을 가로챘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충숙왕]] 9년(1322년) [[원나라]]에서 왕고의 모친인 안비에게 손수건과 만전향을 선물하고 모시를 요구하였다. 이것은 원나라가 [[고려]]에 정치적 기반이 없는 왕고가 얼마나 많은 물자를 동원할 수 있느냐를 시험해본 것인데, 왕고가 동원한 모시는 원나라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때문에 숙적인 충숙왕이 고려 국왕의 인장이 빼앗긴 상황에서도 왕고는 원나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왕고의 일당 10여 명이 [[원나라]]로부터 와서 왕고가 이미 나라를 얻었으니, [[충숙왕]]의 과거 악행을 적어서 [[원나라]] 조정에 올리지 않겠냐고 따져서 원나라의 중서성에 왕고를 고려 왕으로 옹립할 것을 요청하는 글을 올리게 했으며, 충숙왕이 3년 동안 [[원나라]]에 머물면서 재정이 고갈되자 영종의 명을 내세우며, 신하들을 시켜 창고를 봉쇄하게 했다. 1323년에 [[원진종|진종]](6대)이 즉위해 1324년 충숙왕이 [[고려]]로 돌아가게 되면서 문제의 발단을 만든 [[충선왕]]이 사람들에게 자신과 왕고가 서로 싸워 집안 싸움이 일어났다고 하면서 진종에게 지난 잘못을 생각하지 말고 모두 다 용서해달라며 상주했다고 한다. 1328년 7월에 왕고의 일당이 [[원인종|인종]](4대)의 허가를 받아 상왕([[충선왕]])이 왕도(충숙왕)를 고려 왕, 왕고를 세자로 임명했지만 영종 때 이르러 왕도가 바얀투그스와 짜고 왕고의 세자인, 그의 전택, 그의 부하들의 전택 등을 빼앗았다고 했으며, >"[[충숙왕]]이 귀가 멀고 말을 못한다" 고 참소했다. 1333년 여름 4월에 [[충숙왕]]이 임강의 난산채에 당도하자 왕고는 행궁을 찾아 알현했다가 충숙왕을 따라 귀국했으며, 1339년에는 그의 일파인 조적과 모의해 고려의 왕이 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는 시도를 했다가 [[충혜왕]]에게 패배하면서 실패했다('''조적의 난'''). 그의 부하가 [[원나라]]에 가서 왕고가 국왕이 되었다고 거짓말을 하자 충혜왕이 기병을 보내 왕고의 계략을 중지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심왕 왕고는 1344년 12월에 원나라로부터 귀국했다가 1345년 가을 7월에 죽었다. == 가족관계 == * 아들: 왕덕수 * 손자: [[왕토크토아부카]] * 손자: 왕테크부카 아들 왕덕수는 강릉대군에 봉해졌다. 왕덕수에게는 독타불화와 첩고불화 두 아들이 있었다. 독타불화는 왕고의 뒤를 이어 심왕에 올랐고, 첩고불화는 중서성 평장정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