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398년 사망]][[분류:태원 왕씨]][[분류:동진의 외척]] [include(틀:진서)] ||<-2> '''{{{+1 王恭[br]왕공}}}''' || || '''시호''' ||충간(忠簡) || || '''성''' ||왕(王) || || '''이름''' ||공(恭) || || '''자''' ||효백(孝伯) || || '''아명''' ||아녕(阿寧) || || '''본관''' ||태원군(太原郡) 진양현(晉陽縣) || || '''부친''' ||왕온(王蘊) || || '''생몰''' ||? ~ 398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동진]]의 외척이자 장수로 자는 효백(孝伯)이다. == 생애 == === 초기 생애 === 왕공의 할아버지인 [[왕몽(동진)|왕몽]]은 [[애제(동진)|애제]]의 황후 왕목지의 아버지였다. 왕공의 아버지인 [[왕온(동진)|왕온]]은 [[효무제(동진)|효무제]]의 황후 [[왕법혜]]의 아버지였으며, 왕공은 왕법혜의 오빠였다. 왕공은 젊은 시절에 명성가 있었고 고상한 절조가 남보다 뛰어났으며, 재능과 집안이 높았다고 자부했고 재보의 명망이 있었다. [[왕침(동진)|왕침]]과 함께 유명했고 사이가 좋았으며, [[유담(동진)|유담]]을 흠모하였다. 명재상 [[사안(동진)|사안]]은 왕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왕공의 인품과 집안이라면 장래에 백구(伯舅)가 될 수 있을 것이다."[br](王恭人地可以爲將來伯舅) ''' 저작좌랑(佐著作郞)으로 기용되었으나 왕공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벼슬을 하면서도 재상이 되지 못하니 재능과 뜻을 어찌 충분히 펼칠 수 있겠는가!"[br](仕宦不爲宰相, 才志何足以騁!) ''' 결국 왕공은 병을 핑계로 저작좌랑을 사양했고, 뒤에 비서승(秘書丞)이 되고 중서랑(中書郞)으로 전임되었으나 임명되기 직전에 왕온이 사망하여 부친상을 치렀다. 장례를 마친 뒤 이부랑(吏部郞)으로 제수되고 건위장군(建威將軍)을 역임하였다. 태원(太元) 연간에는 심가(沈嘉)를 대신하여 단양윤(丹陽尹)이 되었고 중서령(中書令)으로 옮겼으며, 태자첨사(太子詹事)를 겸임하였다. [[효무제(동진)|효무제]]는 왕공이 황후 왕법혜의 오라버니이기에 왕공을 더욱 공경하고 중시했다. 당시 진군(陳郡) 출신의 [[원열지]]가 효무제의 동생인 회계왕(會稽王) [[사마도자]]에게 아첨하자, 왕공은 이를 효무제에게 이야기하여 결국 원열지를 주벌했다. 또 한번은 마도자가 일찍이 조신들을 모으고 동부(東府)에서 술자리를 벌일 때 사안의 동생인 상서령(尙書令) [[사석]]이 술에 취해 민간의 노래를 부르자, 왕공은 정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단우(端右, 상서령)의 지위에 있으면서 제후왕들을 불러모아놓고 방자하게 음탕한 소리를 지르니 어찌 조정 대신들이 본받도록 하겠습니까![br](居端右之重, 集籓王之第, 而肆淫聲, 欲令群下何所取則!)" ''' 왕공의 질책을 들은 사석은 왕공을 매우 원망했다. === 1차 거병 === 396년, 효무제가 죽은 뒤 효무제의 태자인 사마덕종이 즉위하니 이가 제14대 황제인 [[안제(동진)|안제]]였다. 그러나 안제는 나이가 어리고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조차 불가능했기에 숙부인 사마도자가 섭정을 맡았다. 당시 사마도자는 [[왕국보]]를 총애하여 기밀과 권한을 왕국보에게 위임하고 자신은 주색에 빠졌다. 왕공은 이로 인해 사마도자에게 직언을 하며 불만을 드러냈고, 사마도자 또한 왕공을 매우 꺼렸다. 왕공은 산릉을 참배한 뒤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서까래와 마룻대는 비록 새것이지만 바로 《서리(黍離)》의 탄식이 있을 뿐이다."[br](榱棟雖新, 便有《黍離》之歎矣.) ''' 사마도자는 내외의 단결을 도모하고자 심복들을 왕공에게 보내 과거의 원한을 풀려고 했지만 왕공은 시정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호되게 비난했다. 왕국보의 사촌동생 왕서(王緖)는 왕국보에게 왕공이 입조할 때 복병을 배치해서 왕공을 죽여야 한다고 권했으나 왕국보는 왕서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마도자는 왕공과의 갈등을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결국 왕서의 말을 따르게 된다. 왕공은 입조해서 왕국보 일파를 죽이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왕국보의 일당인 [[유해(동진)|유해]]와 왕순의 위세를 꺼렸기에 결국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왕공은 사마도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주상께서 상중에 계시니 재상의 중책은 설사 [[이윤(상)|이윤]]과 [[문공(주)|주공]]이라 하더라도 감당하기 어려우니 대왕께서는 직접 정무를 총괄하고 직언을 받아들이고 정성(鄭聲)을 멀리하시고 아첨하는 이들을 추방하시길 바랍니다.[br](主上諒闇, 塚宰之任, 伊周所難, 願大王親萬機, 納直言, 遠鄭聲, 放佞人.)"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