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진서)] [목차] == 개요 == 王機 (? ~ 315) [[서진]] 말기 반란자. 자는 영명(令明). 상주(湘州) 장사군(長沙郡) 출신. 광주자사 왕의(王毅)의 아들. == 생애 == 왕기는 자태가 아름답고, 재주와 도량이 있어 원대한 뜻을 실현시킬 야망을 품었다. 진회(陳恢)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17세에 불과했던 왕기가 무리를 이끌고 진회를 쳐 격파하면서 이름을 날렸다. 당시 왕기는 명사인 형주자사 왕징(王澄)을 흠모하였는데, 왕징 역시 왕기의 명성을 잘 알고있어 자신에 버금가는 자라 여기고, 친분을 맺은 뒤에 성도내사로 임명해 직속 심복으로 삼았다. 왕기는 관직에 올랐음에도 정사를 내팽개치고 왕징과 더불어 음주와 바둑 두기만 하니, 백성들이 원망하였고 민심은 요동쳤다. 영가 5년(311년) 정월, 당시 수만 호에 이르는 파촉(巴蜀)의 유민들이 이특의 반란을 피해 형주와 상주 각지로 들어왔다. 그때 토착민의 텃세를 견디다 못한 촉 땅 유민 이양(李驤)이 무리 수백을 모아 현령을 죽이고, 낙향(樂鄉)을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남평태수 [[응첨]]과 예릉현령 [[두도(서진)|두도]]에게 토벌당했다. 왕기 또한 왕징의 명을 받고 토벌에 참가하였는데, 이미 관군에게 패배한 이양이 그에게 도망쳐 투항을 청하였다. 왕기는 이를 짐짓 승낙하고는 군대를 보내 이양의 무리를 습격하여 이양을 죽이고, 그 처자식을 사로잡아 병사들에게 상으로 주었다. 아울러 파촉 유민 8,000명을 반란 세력으로 몰아세우고, 이들을 전부 강에 빠뜨려 살해하니, 유민들의 분노와 두려움은 점점 깊어져갔다. 영가 6년(312년), [[원제(동진)|낭야왕 사마예]]는 왕징을 건강(建康)으로 불러들이고, [[주의(동진)|주의]]를 형주자사로 새로 임명하였다. 장강을 따라서 건강으로 내려가던 왕징은 우연히 정토도독 왕돈을 만났다가, 그 앞에서 말실수하는 바람에 왕돈의 부하에게 목 졸려 살해당했다. 자신도 왕기의 일당이라 의심받을 것이 두려웠던 왕기는 아버지와 형이 광주자사를 지냈던 것을 근거로, 자신도 광주자사로 부임하길 청하였지만 왕돈이 불허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광주에서 장수 온소(溫邵) 등이 왕기를 영접하고 반란을 계획하자, 왕기도 빈객과 문하생 1,000여 명을 거느리고 광주로 들어갔다. 광주자사 곽눌(郭訥)은 왕기를 의심하여 참군 갈유(葛幽)를 보내 왕기의 뒤를 밟게 하였다. 왕기가 여릉(廬陵)에 이르렀을 때, 갈유가 뒤쫓아오는 것을 눈치채고 그를 향해 꾸짖었다. > "어찌 감히 뒤따라오느냐? 죽고 싶으냐?" 결국 갈유는 더이상 왕기를 감시할 수 없어 곽눌에게 돌아갔다. 온소가 왕기를 영접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곽눌은 군대를 보내 그들을 쳤으나 격파당했다. 곽눌의 장수와 관리들은 모두 왕기의 아버지와 형을 섬겼던 자들이었기에, 싸울 생각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항복해 왕기를 맞이하였다. 관군은 흩어지거나 왕기에게 투항하였고, 곽눌은 부절을 들고 왕기를 피해 도망치다 사로잡혔다. 왕기가 부절을 내놓으라 요구하니, 곽눌이 한탄하며 말했다. > "과거 [[소무]]도 그 부절을 잃지 않아 역사에 미담으로 남았다. 이 부절은 천자의 조정에서 맡긴 것으로 그대에게 넘겨줄 이유가 없으니, 그대는 병사를 보내 빼앗도록 하라." 이에 왕기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만두었다. 그리고 얼마 뒤, 곽눌은 사임하고 광주자사직을 왕기에게 양보하였다. 건흥 3년(315년) 8월, 광주에서 할거하던 왕기는 토벌당할까 두려워, 교주자사로 고쳐 임명해줄 것을 청하였다. 당시 두도의 잔당 두홍(杜弘)이 임하(臨賀)로 달아나 왕기에게 수천 금을 바치고, 계림(桂林)의 도적을 평정하는 것을 조건으로 속죄를 하겠다며 투항하였는데, 왕기가 그를 대신해 조정에 상소를 올림으로써 두홍의 항복을 허락받았다. 왕돈은 어차피 왕기를 제어하기 힘드니, 그를 이용해 교주의 양석(梁碩)을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두홍을 항복시켰다는 공로로 왕기를 교주자사에 임명하였다. 양석이 왕기가 교주자사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양후(梁侯)를 보내 울림(鬱林)에서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이때 양후의 영접이 지체되자, 분노한 왕기가 책망하며 교주에 도착하면 곤장을 치겠다 으름장을 놓았다. 이에 양후는 곧바로 사람을 보내 양석에게 이 말을 일러 바쳤다. 그러자 양석도 분노하여 > "왕기가 이미 광주를 망쳤는데, 어찌 교주라고 망가뜨리지 않겠는가!" 라 하고, 교주의 백성들에게 명을 내려 왕기를 맞이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왕기는 사마 두찬(杜讚)을 보내 양석을 공격했지만, 도리어 양석에게 패하고 나아가지 못 했다. 양석은 전임 교주자사인 [[수칙(삼국지)|수칙]]의 아들 수담(修湛)을 교주자사로 옹립하고, 내통을 막기 위해 교주 토착민이 아닌 자들을 모조리 학살하여 수비를 굳건히 하였다. 두홍이 계림의 도적을 대파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왕기를 만났다. 왕기가 두홍에게 교주를 공격해 취하라 권하자, 두홍이 왕기의 본심을 알고 그의 부절을 잡으며 말했다. > "응당 함께 부절을 잡았는데, 어찌 독점할 수 있겠습니까!" 왕기가 자신의 부절을 두홍에게 넘기고, 두홍, 온소, 유침(劉沈) 등과 더불어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한 뒤, 교주 공략을 포기하고 다시 광주로 돌아가 반란을 일으켰다. 본래 형주자사였던 [[도간]]은 간신배의 참언으로 왕돈의 미움을 받고 광주자사로 좌천당했다. 도간이 광주로 들어가 시흥(始興)에 이르렀을 때, 왕기가 거병하여 광주 사람들이 도간에게 섣불리 나아가지 말라 간했으나, 도간은 무시하고 번우(番禺)로 향했다. 이때 이미 광주의 여러 군현들은 다시 왕기에게 굴복한 상황이었음에도 도간이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자, 두홍은 도간에게 사람을 보내 거짓 항복하였다. 하지만 도간은 계속 진격하여 두홍을 쳐서 무찔렀고, 소계(小桂)에서 유침을 사로잡았다. 왕기는 아문 굴람(屈藍)을 보내 도간에게 광주의 양식을 늘리는 중이라는 거짓말로 시간을 끌게 만드는 한편, 은밀히 각 부의 병력을 소집하여 도간을 치려 하였다. 그러나 도간은 굴람을 만나자마자 참수하였고, 독호 허고(許高)를 파견해 왕기를 쳤다. 왕기가 관군을 피해 도망치다가 병으로 객사하니, 허고는 그 무덤을 파내어 왕기의 시체를 참수하고, 왕기의 두 아들도 아울러 죽였다. 도간이 왕기의 사망 소식을 온소와 두홍에게 알리자, 온소는 저항을 포기하고 도주하다 시흥에서 붙잡혔고, 두홍은 왕돈에게 가 항복하였다. [[분류:서진의 인물]][[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315년 사망]][[분류:창사시 출신 인물]][[분류:중국의 객사한 인물]][[분류:참수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