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고려 왕조 봉사손)] 王師熙 [[1848년]]([[헌종(조선)|헌종]] 14) [[8월 19일]] ~ [[1885년]]([[고종(조선)|고종]] 22) [[8월 30일]] [목차] == 개요 == [[조선]] 말 [[고종(대한제국)|고종]] 시기의 인물. 본관은 [[왕(성씨)|전주]](全州)[* 그런데 1991년 간행된 《개성왕씨세보》에는 개성 왕씨 [[안경공]]파로 [[안경공]] 왕창(王淐)의 21대손인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족보상 개성 왕씨 안경공파는 모두 왕희의 후손이란 것을 생각하면...]. 이명은 왕준오(王俊五). == 생애 == 1848년 8월 19일 아버지 왕병좌(王秉佐)와 어머니 [[문화 류씨]] 류현오(柳賢五)의 딸 사이의 5남 2녀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으로는 왕사효, 왕사제, 왕사신, 왕사항이 있고, 두 누이는 각기 해주 최씨 최덕성, 함열 남궁씨 남궁영에게 시집갔다. 이후 5촌 당숙(堂叔) 왕경좌(王慶佐)에 입양되었다. 왕사희는 [[왕희(조선)|왕희]]의 11대손(10세손)으로, 11대조(10세조) 왕희는 자신의 본관을 [[개성 왕씨]]로 속이고 [[숭의전]]에서 [[고려]]의 왕들에게 제사를 지내다 족보 위조가 들통나 쫓겨난 전적이 있다. 왕사희는 선조를 본받아 족보를 고쳤고[* 이 때 [[왕희(조선)|왕희]] 가문이 개성 왕씨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1876년(고종 13) 2월 숭의전[[참봉]]에 제수된다. 전 숭의전 참봉 왕재기(王在基)[* [[왕훈(조선)|왕훈]]의 11대 종손이다.] 등 [[왕훈(조선)|왕훈]]의 후손들은 왕희의 후손이 참봉이 된 것에 반발해 1878년(고종 15) 3월 경기 [[암행어사]] 이헌영에게 이를 알렸고, 같은 해 7월 개성유수 조경하가 마전군에 가서 진위를 알아보게 된다. 개성유수가 왕사희와 왕훈의 후손 양가 친척을 한곳에 불러모아 [[이조(조선)|이조]]의 입안(立案)과 왕씨 세보를 대조하며 거슬러 올라갔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번에는 문적(文蹟)상의 근거가 양쪽에 다 있었다. [[의정부]]는 이 해 10월에 개성유수의 대조 결과와는 별개로 왕훈의 후손이 정파로 정해진 바 있으니 왕사희는 파면하고 그 후손을 참봉으로 차임해야 한다고 아뢴다. 고종이 의정부의 청을 따르면서 왕사희는 2년만에 참봉직에서 쫓겨났고, 이후 1885년 8월 30일 사망했다. [[분류:조선의 관리]][[분류:전주 왕씨]][[분류:1848년 출생]][[분류:1885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