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원사)] [목차] == 개요 == 汪世顯·1195~1243년 자는 중명(仲明), 공창부 염천 현(현 간쑤성 딩시 시 장현) 사람이며, 몽골족 왕고 부족(汪古部)출신으로, 금말몽초의 명장이다. 또한 1259년 [[조어성 전투]]에서 죽는 [[왕덕신]]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 생애 == === 금에서의 첫 관직 생활 === 1195년 출생으로, 본래 몽고 왕고부 사람이다. 금 선종 정우 2년(1214)에 군공으로 천 명의 부장을 선발하였다. 이후 1225년, 공주(지금의 감숙 농서) 주장 전서조가 반란을 일으켰고, 왕세현이 공주 수문장으로 있던 시절, 성문을 열어 섬서 행성 평란군을 맞이해 곧 반란이 평정됐다. 전관은 지평량부사(知平亮府事), 영농주(領龍州) 방어사를 차례로 임명했다.정대 6년(1229), 공창부(지금의 감숙 농서)의 치중을 개칭하고, 동지를 바꾸어 참의수부 기무(機務)를 겸하여 완안중덕(完安仲德)을 보좌하여 농우, 제주의 흩어진 패잔병 수만 명을 모집하고, 공창부를 석문산(石門山)으로 바꾸어 험한 벽에 의지하여 몽골을 방어하였다. 1232년 변경이 위급하자 [[완안중덕]]은 부원(部援)을 이끌고 왕세현은 편의총수를 맡아 군대에 남아 공창(孔昌)을 진두지휘하였다.천흥(天興) 3년(1234) 초 금이 멸망하고 진주(秦州, 지금의 감숙 천수) 원수인 점갈완전이 행성(行省)이라 칭하며 밀랍환조서를 위조하여 공창(孔昌)을 겸제하려 하자 왕세현은 이에 불복하여 점갈완전을 공격하고 그 군으로 진(秦)·공(公)의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지만, 금나라 정삭을 받들었다.또 남송 사천제치사 조언납에게 수차례 사절을 보내 내투를 요청했다. 1235년, 몽골 제국의 황태자 활단(活端)이 진, 공을 거쳐 공창(孔昌)에 이르자 왕고 부족 사람들을 보냈고, 10월 4일 성민들을 통솔하여 몽골에 투항하였는데, 몽골의 의복을 하사받고 옛 관직을 유지하였다. === 원을 도와 송을 공격하다 === 그는 몽골 항복 후 남송을 공격하였는데, 가릉(嘉陵) 강을 끊고 대안군(大安軍, 지금의 산시 닝강 서북쪽)을 공격해 사주(思州, 지금의 구이저우(貴州) 연하(延河), 방주(放州, 지금의 구이저우(貴州)의 전씨(田氏), 양씨원군(楊氏援軍, 묘군)을 격파했다. 또 양평관(陽平關)에서 명장 [[조우문]]과 격전 중에 단기로 돌진하고 후군과 합류하여 송군을 대파하고 조우문이 전사하자[* 조우문이 장렬하게 싸웠던 것은 왕세현도 극찬하였다고 한다.] 몽골군은 사천의 관문을 뚫고 장구하게 들어갔다. 1237년 봄, 왕세현은 뜻밖에도 부야를 이끌고 무신성(武信城, 지금의 쓰촨 수녕)을 취하여 그 곳간을 다 얻었다.이어 보주(普州·현 쓰촨(四川) 안악(安岳)·자주(資州·현 사천(四川) 자중(資中)을 공략했다. 1238년 도원수 탑해가 감복에서 쓰촨(四川)으로 재입군하여 간귀(지금의 쓰촨 소화)의 남쪽으로 내려온 송수(宋守)가 산을 막고 울타리로 삼자 왕세현이 정기로 쳐들어와 자주(資州)를 장악하고 가정부(嘉定府, 지금의 쓰촨 낙산), 아미(阿尾) 등을 노략질하여 돌아왔다. 1239년 가을, 탑해 휘하에 복속하여 촉을 공격하여 주를 부수고 만주로 입성하였다.송군은 만주지사 강남안에 진을 쳤고, 왕세현은 밤의 복병 상류를 타고 북안에 배를 띄워 진을 치고, 전투를 벌였으며, 복병을 거느리고 혁주를 타고 흘러내려와 남송 수군을 습격하여 기주(지금의 충칭 봉절)까지 추격하여 3천여 급을 참수하였다. 그러나 무산을 건너 송의 경호제치사 [[맹공]]의 원군에 가로막혔다. 이듬해 봄 몽골군은 양안을 끼고 서진해 푸저우(현 충칭 푸링)까지 갔고, 왕세현은 강에 부교를 놓으라는 명령을 받고 군대를 건너 이틀 만에 도착했다.이어 남도의 군을 거느리고 중경을 포위 공격하였는데, 송 수군은 완강히 저항하여 이기지 못하고 더위를 물리쳤다. 그 해 가을, 화림에 가서 예배하였는데, 원태종 소굴이 활대(活臺)에 이르러 그 공을 치하하고 금부(金布)를 하사하여 그 이름을 중산(中山)이라 하였다. 1241년 군대를 이끌고 다시 사천을 공격했다. 사천제치사 진륭지(陳隆之)는 성도에 배치되어 성을 쌓고, 굳게 방어하며, 백만이라 칭하며 몽골군에 선전포고를 내렸다.10월에 몽골군이 성도를 포위 공격한 지 여러 날이 되었는데, 송장 전현약이 성에 내려오다 발각되어 왕세현이 급히 장졸을 지휘하여 성에 쳐들어갔고, 그가 성문을 열고 내응하자 몽고군은 바로 돌입하였다. 성도를 함락하고 진륭지를 포로로 잡았다. 왕세현은 곧 정예군 500을 이끌고 한주(지금의 쓰촨 광한)를 공격해 도시로 나가 맞서는 3천 수군을 섬멸했다. 1243년 편의도총수를 수여하고, 부적을 하사하고, 진주(秦州)·공주(孔州) 등 20여 개의 부주를 통솔하며, 군민(軍民)의 재산은 모두 그의 결재를 따랐다. 얼마 후 병으로 죽었다. 원 세조(元世祖) 중통(中統) 3년(1262)에 농서공(龍西公)에 추봉되었고, 시호는 의무(義武)이다. 원 인종 연우 7년(1320)에 농우왕에 봉해졌다. == 기타 == [[조어성 전투]]에서 죽는 [[왕덕신]]은 왕세현의 차남이다. [[분류:금나라의 인물]][[분류:몽골 제국의 인물]][[분류:1195년 출생]][[분류:1243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