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요사)] [목차] == 개요 == 王郁 (? ~ ?) [[요나라]]의 인물. 경조만년(京兆萬年) 사람으로 [[당나라|당]](唐)의 의무군절도사(義武軍節度使) 왕처직(王處直)의 서자이다. == 생애 == 왕욱의 백부 왕처존(王處存)이 의무군절도사를 지내고 사망하자 군사들이 그의 아들 왕고(王郜)를 추대하였다. 그리고 왕욱의 아버지 왕처직을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로 삼았다. [[소종(당)|광화]](光化) 3년, 양왕(梁王) [[주전충]](朱全忠)이 정주(定州)를 공격해오자 왕고가 왕처직을 사하(沙河)로 보내 막게 하였다. 그러나 군대가 패하자 왕고가 정주를 버리고 태원(太原)으로 달아났다. 이에 패잔병들이 왕처직을 유후(留後)로 추대하였고 양왕에게 사람을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처음에 왕고가 달아나자 왕욱이 그를 시종하였는데 진왕(晉王) [[이극용]](李克用)이 딸을 왕욱에게 시집보내고 그를 신주방어사(新州防禦使)로 임명하였다. 왕처직은 진왕이 반드시 장문예(張文禮)를 토벌할 것이라 직감했고 장문예가 무너지면 정주는 홀로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에 왕욱을 비밀리에 거란(契丹)에 보내 거란군을 이끌고 진군을 견제하게 하였다. 또 왕욱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왕욱이 진(晉)으로 달려갔을 때 항상 아버지의 마음을 잃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후계자가 되자 크게 기뻐하였다. [[태조(요)|신책]](神冊) 6년, 요나라에 복종을 맹세하고 거처로 와 항복하자 [[태조(요)|태조]](太祖)가 양자로 삼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욱의 이복 형 왕도(王都)가 아버지를 가두고 스스로 유후를 자처하자 태조가 왕욱에게 황태자 [[의종(요)|야율돌욕]](耶律突欲)을 따라 공격하게 하였다. 정주에 이르자 왕도가 성을 굳건히 하고 나오지 않았기에 그 백성들을 약탈하고 돌아왔다. 이듬해 야율돌욕이 진주(鎮州)를 공격할 때 따라나서 [[후당]](後唐)을 정주에서 쳐부섰다. [[태조(요)|천찬]](天贊) 2년 가을, 왕욱이 [[소아고지]](蕭阿古只)와 함께 연(燕)과 조(趙)를 거쳐 자요진(磁窯鎮)을 함락시켰다. 천찬 4년, 태조의 [[발해]](渤海) 정벌에 종군해 전공을 세워 동정사문하평장사(同政事門下平章事)의 관직을 더하고 숭의군절도사(崇義軍節度使)가 되었다. [[태조(요)|천현]](天顯) 초, 태조가 붕어하자 왕욱이 아내와 함께 장례에 참여하였는데 그때 그의 아내가 순흠황후(淳欽皇后)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울며 청하자 허락하였다. 왕욱이 아뢰길 "신은 본래 [[이극용|당주]](唐主)의 사위지만 당주가 이미 시해 당하셨는데 어찌 부부관계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태후마마를 항상 모시겠습니다." 라고 하자 이에 태후가 기뻐하며 말하길 "한인(漢人) 중에 왕욱이 가장 충효(忠孝)하구나" 라고 하였다. 머지않아 정사령(政事令)에 임명되었고 의주(宜州)로 돌아온 뒤 사망하였다. [[분류:요나라의 인물]] [[분류:몰년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