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신체, rd1=대물(신체))] [include(틀:고려사)] ||<-2> '''{{{#white 여진정벌 참전자[br]{{{+1 왕자지}}}}}}''' || || '''{{{#white 시호}}}''' ||장순공(章順公) || || '''{{{#white 본관}}}''' ||해주 왕씨(海州 王氏) || || '''{{{#white 이름}}}''' ||소중(紹中) → 자지(字之) || || '''{{{#white 자}}}''' ||원장(元長) || || '''{{{#white 배우자}}}''' || 황려군부인(黃驪郡夫人) 김씨[* 여주 김씨 김정지(金廷砥)의 딸] || || '''{{{#white 아들}}}''' ||[[왕의(고려)|왕의]](王毅) || || '''{{{#white 생몰연도}}}''' ||1066년 ~ 1122년 || [목차] [clearfix] == 생애 == 고려의 개국공신 [[왕유]][* 원래 해주 박씨였고 궁예의 신하였는데 역성혁명 당시 왕건을 도운 공로로 왕씨 성을 하사받아 해주 왕씨가 되었다. 즉 일반 귀족보다도 신분이 높은 준 왕족급이다.]의 후손이다. 왕자지의 아버지는 해주 서리[* 지방의 약세 호족. 조선시대엔 기세가 크게 꺾인다.] 출신이었다. 누나가 [[숙종(고려)|계림공]]의 수하인 상장군 [[왕국모]]와 결혼했는데, 왕국모는 [[이자의]]의 난 당시 처남 왕자지로 하여금 본궐의 문을 폐쇄하게 하였고 이 공을 바탕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3> {{{#670000 고려의 별무반 행영 군단}}} || ||<-3> {{{#670000 대원수(大元帥)}}} || ||<-3>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 [[윤관]] || ||<-3> {{{#670000 부원수(副元帥)}}} || ||<-3> 행영병마사(行營兵馬使) [[오연총]] || ||<-3> {{{#670000 판관(判官)}}} || || 병마판관(兵馬判官) 최홍정 || 병마판관(兵馬判官) 황군상 || 병마판관(兵馬判官) [[김부필]] || ||<-3> {{{#670000 기타 지휘관}}} || || 녹사(錄事) [[척준경]] || '''권지승선(權知承宣) 왕자지''' || 선병별감(船兵別監) 양유송 || ||<-3> {{{#670000 병과}}} || || 신기군(神騎軍) || 신보군(神步軍) || 발화군(發火軍) || || 도탕군(跳盪軍) || 경궁군(梗弓軍) || 정노군(精弩軍) || ||<-3> 항마군(降魔軍) || ||<-3> 도합 17만 명 || [[내시#고려시대]][* 고려시대 내시는 조선시대와는 달리 왕을 가까이서 보필하는 신진 관료들을 말한다. 내시하면 환관을 떠올리는데, 고려의 내시는 거세된 환관이 아니며 [[김인존]], [[안향]] 같은 상당한 엘리트만이 될 수 있었다.] 출신으로 [[윤관]]의 [[고려의 여진 정벌|북방 개척에 참전]]해 공을 세웠다. 예종 3년 병마판관(兵馬判官)이 되었고, 윤관의 휘하에서 [[소드마스터]] [[척준경]]과 함께 함주와 영주 지방에서 [[여진족]]을 무찔렀다. 척준경과 매우 친밀한 사이였던 듯한데 여진족의 기습을 받아 말을 빼앗기고 죽을 뻔했다. 이때 척준경이 구해주고 말을 잃은 그를 위해 적을 추격해 장갑마 1필을 얻어줘서 가까워졌다고. 그 뒤 쭉쭉 승진하여 [[중추원|추밀원사]]와 이부상서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이후 사은 겸 진봉사로 [[송나라]]에 갔다가 대성아악을 가지고 귀국했다. 말년에는 참지정사로 있다가 1122년 향년 57세로 사망했다. 장순(章順)이라는 시호를 받고 [[예종(고려)|예종]]의 묘정에 [[배향공신|배향]]받는 영예를 안았으나 뒷날 탐욕스럽다는 이유로 배향 공신 자격에 부적절하다는 주장이 나와 끝내 배향을 철회했다. == 여담 == * 역사 교과서에는 [[윤관]], [[척준경]]만 간략하게 나오는 탓에 일반인들이 거의 모르지만 왕자지 뿐 아니라 여진 정벌에 참가한 장군들 거의 대부분은 그렇다. 오히려 이름 때문에 유명해진 케이스. 하필 성씨까지 "왕"이어서 [[대물(신체)|참으로 절묘한 어감의 이름]]이 되어버렸다. * 우리나라 역대 최고의 [[소드마스터]]인 [[척준경]]의 생애가 드라마화되지 않는 이유로 그의 절친이었던 이 분의 이름을 드는 사람이 있다. 일례로 국방TV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이 시대를 다룰 때도 차마 이름을 부를 수 없어 패널들은 왕 장군이라고 애둘러 언급하고 이름은 자막으로만 나왔다.[* 메인 패널이었던 임용한은 2000년대 초반에 저서를 통해 왕자지의 존재를 국내 역덕계에 알린 일등 공신이다. 임용한교수의 말에 따르면 원래 본명을 언급하며 방송하기로 했지만, 방송하다보니 웃음이 터져나와 결국 언급하지 않고 가기로 했다고 한다.] 물론 우스개로 하는 말에 가깝고, 왕자지가 주인공인 창작물이 아닌 다음에야 굳이 못 만들 이유까지는 없다. 일단 왕자지의 초명은 소중(紹中) ~~아니 원래 이름조차 왕소중이라니...~~, 자는 원장(元長)이므로, 삼국지에서 [[조운]]을 조자룡으로 부르는 것처럼 왕원장으로 작중에서 부를 수도 있고,[* 이 정도 높은 신분의 인물이라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 보통은 관직명으로 부르고, 아무리 막역한 사이라도 이름(名)보단 자(字)로 부른다. 부모나 임금이라면 이름을 부를 수 있지만 부모는 아명으로, 임금도 그를 존중해 관명으로 부르면 해결된다. 다만 조서 같은 공문서에는 이름이 들어가야 하므로 이것까진 피할 수 없다.] 사극이라고 모든 기록상의 인물을 다 등장시켜야 하는 것도 아니며,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파생 창작물일 뿐이니 다른 이름으로 바꾸거나 다른 실존인물의 캐릭터와 적절히 합체시켜 등장시키는 등의 방법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진지하게 따지자면 왕자지 때문이라기보단, [[척준경]]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듯 척준경의 구체적인 행적이 불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생애 자체가 불명인 것은 아니고, 세부적인 부분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기록상에 등장하는 그의 행적 대다수는 "여진족 몇 명을 베었다"나 "이자겸과 붙어먹었다" 같은 거시적인 행적뿐이고, 상세한 과정이나 그 속에서 사람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등이 거의 기록이 없다. 이 때문에 척준경으로 드라마를 만들면 그의 대사 거의 전부를 허구로만 채워야 한다.] * 우스개로 왕자지가 사극에 출연할 때 다음과 같은 대사들이 나올 거라는 얘기가 인터넷에 떠돌기도 했다.[[http://mlbpark.donga.com/mlbpark/b.php?&b=bullpen&id=1233719|#]] * 비슷한 이름으로는 후대 명종조 인물인 무장 신보지(申寶至)가 있으며 [[김자지]](金自知) 선생도 있다. 김자지는 고려 말 ~ [[조선]] 초기의 문관으로, 그 역시 나름대로의 업적이 있음에도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다. 이 역시 자로 김원명이라고 부르면 되긴 된다. * 중등과정 국사 교육 과정에서 참으로 민망하고 난감한 어감으로 인해 잘 등장하지 않는 이름이기도 하다. 비슷한 사례로는 고려시대에 널리 퍼진 '이씨가 왕이 된다'는 소문이었던 '[[십팔자위왕]]'이 있다.[* 십팔자득국, 목자득국으로 변형해서 올라가는 경우도 드물게 있다.] * 본인의 묘지명은 실전됐으나, 본인의 아내인 황려군부인(黃驪郡夫人) 김씨[* 여주 김씨 김정지(金廷砥)의 딸]의 묘지명이 현전한다. 묘지명엔 황려군부인이 음력 1130년 7월 10일에 만 68세의 나이로 졸(卒)[* 유교 예법 상으론 [[천자]]는 붕(崩), [[제후]]는 훙(薨), [[사대부]]는 졸(卒), 평민은 사(死)로 죽음을 표현한다.]했다고 한다. *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왕의(고려)|왕의]](王毅)는 상서공부원외랑(尙書工部員外郞)으로,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 [[서균(고려)|서균]](徐鈞)의 딸과 혼인하였다. 딸은 상서형부시랑(尙書刑部侍郎) 이공의(李公儀)와 혼인하였다. * [[2014년]] [[1월 30일]]에 올레마켓 웹툰에서 척준경을 주인공으로 다룬 [[https://www.myktoon.com/web/works/list.kt?worksseq=47|푸른바람 척준경]]이 연재됐었는데[* 작가는 과거 [[노숙검객후크]]라는 닉네임으로 유명했던 박경배.] 왕자지도 본명 그대로 나왔다. 한 가지 기묘한 점은, 건실한 청년으로 묘사 되는 척준경, 이자겸과 달리 왕자지는 더벅머리의 곱상한 쇼타로 묘사된다. --귀엽다-- 작품 내에 고증 오류가 조금씩 보이는데, 1화에 [[이자겸의 난]]을 조명했지만 [[만월대|본궐]]에서 싸웠다는 고려사의 기록과는 달리 야전으로 그리는데다 이자겸의 난은 1126년에 일어났는데 이미 1122년에 사망한 왕자지가 버젓이 살아서 척준경과 붙어다니며, 문관 출신인 윤관이 인간 흉기급 무관이다. 가장 고질적인 오류는 역시 봉두난발. == 관련 문서 == * [[윤관]] * [[척준경]] * [[왕국모]] * [[이자의]] * [[해주 최씨]] * [[해주]] [[분류:1066년 출생]][[분류:1122년 사망]][[분류:해주 왕씨]][[분류:고려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