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중화민국의 정치인]][[분류:대만의 정치인]][[분류:장쑤성 출신 인물]][[분류:1905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건국훈장 독립장]] || 이름 ||왕주이(汪竹一 / Wang Jui) || || 한국식 독음 ||왕죽일 || || 생몰년도 ||[[1905년]] [[7월 23일]] ~ ? || || 출생지 ||[[중국]] [[장쑤성]] [[롄윈강]]시 콴윈현 || ||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왕주이는 1905년 7월 23일 중국 장쑤성 롄윈강시 콴윈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국립기남대학(國立暨南大學)[* 현 [[중화인민공화국]] [[광저우시]]에 있는 지난대학과 [[대만]] [[난터우현]]에 있는 국립지난국제대학의 전신이다. [[청나라]] 말기 [[난징]]에서 기남학당(暨南學堂)으로 개교하였고, 1927년 국립지난대학(國立暨南大學)으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1949년 8월 [[푸단대학]] 및 [[상하이교통대학]]에 합병, 폐교되었다가, 중국 대륙에서는 1958년 재건되었고, 대만에서는 1995년 재건되었다.] 정치경제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하여 [[미시간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를 수학하였고 뒤에 워싱턴내셔널대학교 대학원으로 옮겨 그곳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중화민국]] [[국민정부]] 철도부 비서를 시작으로 교통부 전시노동자훈련위원회 부주임 겸 교육장, 재료사 차관, 대리사장, 상해시정부 참사, 국민참정회 비서, 중앙진제(賑濟)위원회 위원, 전시운수관제국 전문위원, 행정원 [[신강]]건설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중일전쟁]] 중에는 외교부 아주사령장(亞州司令長)으로 재직하면서 한중 양국의 우의를 견고히 하고자 애썼으며, 1941년에는 [[미얀마]]에 파견되어 [[중국국민당]] 당무공작을 지도하였고 화교소산위원회 위원 및 초대 조주임을 겸임하였다. 또 1942년 10월 [[충칭]]에서 한중 양국의 문화 교류와 단결, 동아시아의 영구적인 평화를 촉진시킨다는 목적으로 한중문화협회가 창립되자 협력조정실(協力調整室) 부주임으로 선임되어 연락부장(連絡部長)을 맡았다. 한중문화협회 회장은 [[쑨커]], 부회장은 [[조소앙]]과 [[김규식]]이었고, 왕주이는 이사·부비서장 등을 역임하며 한중연대와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45년 4월 교통부 비서에 취임하였고, 그해 9월 중일전쟁이 종전되자 상해시 참의원, 후보입법위원, 장쑤성·[[저장성]]·[[안후이성]]·[[베이징]]·상하이 지구 면방공업 공회 비서장을 역임했다. 1949년 9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직전에 대만으로 망명했다. 1951년 [[중화민국 행정원]] 설계위원, 광복대륙설계연구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고, 이후 전국공업총회 비서장, 국제사자회 중국회 제2대 회장, 중국공상협진회 상무이사 겸 비서장, 국제무역협회 이사장, 화교자본협진회 이사장, 국화관 상무경영자 겸 총재 등을 역임했다. 1972년에는 입법위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왕주이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