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서)] [include(틀:남사)] ||<-2> '''{{{+1 王鎭之 | 왕진지}}}''' || || '''성''' ||왕(王) || || '''이름''' ||진지(鎭之) || || '''자''' ||백중(伯重) || || '''출신''' ||낭야군(琅邪郡) 임기현(臨沂縣) || || '''생몰''' ||357년 ~ 422년 || || '''부친''' ||왕수지(王隨之) || [목차] [clearfix] == 개요 == [[동진]] 말 [[송(남조)|유송]] 초의 관리로 자는 백중(伯重)이다. == 생애 == 낭야군(琅邪郡) 임기현(臨沂縣) 출신으로 357년에 태어났다. 왕진지는 낭야왕 사마덕문의 위군부 행참군으로 벼슬을 시작했고 섬현령(剡縣令)과 상우현령(上虞縣令)을 역임하며 치적을 쌓았다. 뒤에 내사 사유(謝輶)의 요청으로 산음현령(山陰縣令)이 되었고 산음현에서도 치적을 쌓았다. 뒤에 위군부 참군, 낭야국 낭중령(郞中令)이 되었고 영삭장군(寧朔將軍)이 더해졌다. [[환현]]이 동진 조정을 장악한 뒤 왕진지는 환현의 녹사참군(錄事參軍)이 되었다. 삼오(三吳) 지방에 기근이 들자 왕진지는 환현의 명으로 삼오에 파견되어 빈민 구제에 나섰는데, 당시 회계군(會稽郡) 내사 왕유(王愉)가 조명에 따르지 않자 왕진지는 왕유를 규탄했다. 그러나 왕유의 아들인 왕수(王綏)는 당시 환현의 외조카로 이미 지위가 높아 왕진지를 압박했다. 그러자 왕진지는 어머니가 연로해서 자신을 안성군(安成郡) 태수로 전출시켜달라고 요청했다. 환현이 몰락한 뒤 환현의 장수인 부굉(苻宏)이 안성군을 침범하자, 왕진지는 부굉의 침공을 막았으나 여기서 자제 5명이 죽었다. 이후 모친상으로 인해 벼슬을 그만두고 상우현의 옛 무덤에 어머니의 장례를 지냈다. 아들인 왕표지(王標之)가 현령으로 부임하자, 왕표지는 아들과 같이 갈 것을 청했다. 장례를 마친 뒤에는 정서장군 유도규의 사마, 남평군(南平郡) 태수가 되었다. 410년, [[서도복]]이 강릉으로 침입하자, 왕진지는 건위장군(建威將軍)이 되어 [[단도제]]와 [[도언지]]를 이끌었다. 왕진지는 유도규에게 자신이 장수의 재능이 없다고 말했으나 유도규는 듣지 않았고, 심양(尋陽)에서 구림(苟林)에게 패배했다. 왕진지는 면직되었으나 뒤에 복직했고 서도복을 토벌한 뒤 화용현오등남(華容縣五等男)에 봉해지고 정위(廷尉)로 임명되었다. [[하법예]]의 산릉을 정돈할 때 장작대장을 겸했다. 어사중승이 된 뒤에는 관리들의 부정을 규탄했다. 뒤에 사지절(使持節), 도독교광2주제군사(都督交廣二州諸軍事), 건위장군(建威將軍), 평월중랑장(平越中郞將), 광주 자사로 전출되었다. 광주 자사로 전출될 때 유유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왕진지에 대해 기대했다. >왕진지는 젊은 나이에 청렴한 행적이 두드러졌으니 틀림없이 오은지(吳隱之)의 미덕을 이을 것이다. 영남(嶺南)의 폐단은 왕진지가 아니면 고칠 수 없다. 왕진지는 광주에 부임한 뒤 봉록을 받지 않았고 부임할 때 스스로 사업을 경영하지 않았고 떠날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418년, 유유가 상국이 되자, 왕진지는 유유의 자의참군(諮議參軍)이 되고 녹사를 겸임했으며, 사부상서(祠部尙書)로 옮겼다. 420년, 유유가 [[공제(동진)|공제]] 사마덕문으로부터 선양을 받고 제위에 오르니 이가 유송의 초대 황제인 [[무제(유송)|무제]]였다. 이때 왕진지는 다리에 병이 있어서 보국장군(輔國將軍), 낭야군(琅邪郡) 태수로 전출되었다가 뒤에 선훈위위(宣訓衛尉)로 옮기고 대중정(大中正)을 겸임했다가 422년에 사망했다.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송(남조)/인물]][[분류:357년 출생]][[분류:422년 사망]][[분류:낭야 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