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진서(남조역사책))] ||<-2> '''{{{+1 王沖[br]왕충}}}''' || || '''시호''' ||원간(元簡) || || '''성''' ||왕(王) || || '''이름''' ||충(沖) || || '''자''' ||장심(長深) || || '''부친''' ||왕무장(王茂璋) || || '''조부''' ||왕승연(王僧衍) || || '''생몰''' ||492년 ~ 567년 || || '''본적''' ||낭야군(琅邪郡) 임기현(臨沂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북조시대]] [[양(육조)|남량]]과 [[진(육조)|남진]]의 대신이다. 자는 장심(長深). == 생애 == 왕충의 본적은 낭야군(琅邪郡) 임기현(臨沂縣)으로, [[동진]]의 명재상 [[왕도(동진)|왕도]]의 후손이다. 왕충의 조부 왕승연(王僧衍)은 [[제(남조)|남제]]에서 시중(侍中)을 지냈다. 부친인 왕무장(王茂璋)은 [[양(남조)|양나라]]에서 급사황문시랑(給事黃門侍郞)을 지냈다. 왕충의 모친은 [[무제(양)|양무제]]의 누이 신안목공주(新安穆公主)였다. 무제는 왕충이 일찍 모친을 잃었기에 왕충을 매우 총애하였다. 508년, 비서랑(秘書郞)으로 기용되었고 뒤이어 영가태수가 되었다. 입조하여 태자사인(太子舍人)이 되었다가 부친상으로 물러났고 상을 치른 뒤 태위 임천왕 [[소굉]]의 외병참군, 동궁영직(東宮領直)이 되었다. 태자세마(太子洗馬), 중사인(中舍人)까지 승진하였다 무릉왕 [[소기(무릉정헌왕)|소기]]가 거병하여 협구(峽口)로 당도하고, 왕림(王琳)의 부하 육납(陸納) 등이 상주(湘州)를 거병하여 호응할 때 왕충은 육납에게 구류되었다. 육납이 항복한 뒤 왕충은 시중, 중권장군(中權將軍)으로 제수되고 좌사를 2명 두었으며, 단양윤은 예전과 같이 받았다. 554년, 강릉이 [[서위]]에 함락되고 소방지가 태재(太宰)로 임명된 뒤 왕충은 좌장사로 임명되었다. 소방지가 제위에 오른 뒤 소태 연간에 왕충은 좌광록대부, 상서우복야까지 옮겼으며, 뒤에 좌복야, 개부의동삼사로 옮기고 시중과 장군은 예전과 같이 받았다. 뒤에 다시 단양윤, 남서주대중정을 겸임했다. 557년, 진패선이 양나라의 마지막 황제 [[경제(양)|경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올랐다. 왕충은 이때 단양윤에서 해임되고 좌광록대부를 겸하였다가 임명되기 직전에 태자소부를 겸하였다. 559년, 진문찬이 즉위하니 이가 제2대 황제인 [[문제(남진)|문제]]였다. 왕충은 태자소부에서 해임되고 특진, 좌광록대부가 더해졌으며, 뒤에 다시 단양윤을 겸임하고 율령의 제정에 참여했다. 566년 진문찬의 태자 진백종이 즉위한 뒤 친신 10명이 더해졌다. 왕충은 567년에 사망하여 시중, 사공(司空)으로 추증되고 원간(元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492년 출생]][[분류:567년 사망]][[분류:낭야 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