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그리스 국왕)]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44598 0%, #055eb1 20%, #055eb1 80%, #044598)" '''그리스 글뤽스부르크 왕조 초대 국왕[br]{{{+1 요르요스 1세}}}[br]Γεώργιος Α[* 덴마크어 본명인 크리스티안 빌헬름 페르디난 아돌프 게오르그(Christian Vilhelm Ferdinand Adolf Georg)에서 마지막 이름인 게오르그를 골라 이를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왕호로 삼았다.]'''}}}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George_I_of_Greece,_c.1912.jpg|width=100%]]}}} || ||<|2> '''출생''' ||[[1845년]] [[12월 24일]]|| ||[[덴마크]] [[코펜하겐]]|| ||<|2> '''사망''' ||[[1913년]] [[3월 18일]] (향년 67세)|| ||[[그리스 왕국]] [[테살로니키]]|| ||<|2> '''재위기간''' ||그리스 국왕|| ||[[1863년]] [[3월 30일]] ~ [[1913년]] [[3월 18일]]|| || '''서명''' ||[[파일:요르요스 1세 서명.svg|width=100&bgcolor=#fff]]||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가문''' ||글뤽스부르크 가문 || ||<|2> '''이름''' ||덴마크어: 크리스티안 빌헬름 페르디난 아돌프 게오르그[br](Christian Vilhelm Ferdinand Adolf Georg) || ||그리스어: 흐리스티아노스 굴리엘모스 페르디난도스 아돌포스 예오르요스[br](Χριστιανός Γουλιέλμος Φερδινάνδος Αδόλφος Γεώργιος) || || '''아버지''' ||[[크리스티안 9세]] || || '''어머니''' ||[[헤센카셀의 루이제]] || || '''형제자매''' ||형 [[프레데리크 8세]], 누나 [[덴마크의 알렉산드라|알렉산드라]], 여동생 [[덴마크의 다우마|다우마]], 여동생 [[덴마크의 티라|티라]], 막내 남동생 발데마르 || || '''배우자''' ||러시아의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 ,,(1867년 결혼),, || || '''자녀''' ||장남 [[콘스탄티노스 1세]], 차남 [[그리스와 덴마크의 요르요스|요르요스]], 장녀 알렉산드라, 삼남 니콜라오스, 차녀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아|마리아]], 삼녀 올가, 4남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안드레아스]][* [[필립 마운트배튼]]의 아버지다.], 5남 크리스토폴로스 || || '''종교''' ||[[정교회]] {{{-2 ([[그리스 교회]])}}} ||}}}}}}}}} || [목차] [clearfix] == 개요 == [[그리스 왕국|그리스]] [[글뤽스부르크 왕조]]의 초대 왕이자 엘리자베스 2세의 시할아버지. [[덴마크]] [[크리스티안 9세]]의 차남이다. [[필립 마운트배튼]]의 [[친할아버지]]이자 현 '''영국 왕인 [[찰스 3세]]의 친증조할아버지'''이기도 하다. 따라서 [[영국 왕실]]에 [[탈모]] 유전자가 내려오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사실 아버지인 크리스티안 9세도 탈모였는데, 정작 현재 덴마크 왕실 및 옛 그리스 왕실은 탈모가 거의 안 보인다.(...)] == 생애 == 1845년에 [[코펜하겐]]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빌헬름이었고, 아버지가 아직 추정상속인이자 후계자였기 때문에 비교적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후 [[덴마크 해군]]에서 복무하다가 1863년에 전 왕 [[오톤]]을 쫓아낸 그리스 국회에 의해 17살에 왕으로 선출되어 즉위했다. 그가 왕이 되고 나서 약 8개월 뒤 아버지가 정식으로 덴마크 왕이 되었다. 즉 아버지보다 먼저 왕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구도는 형 [[프레데리크 8세]]와 조카 [[호콘 7세]]로 이어진다. 그 전 해 오톤 왕이 쫓겨나고 새 국왕을 뽑는 국민 투표가 있었을 때,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차남인 [[알프레트(작센코부르크고타)|에든버러 공작 앨프러드]][* 이후 1893년에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이 된다.]가 95%로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 참고로 24만 1202표 가운데 공화국을 원한다는 표는 93표, 빌헬름 본인은 6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2표, 전 국왕인 오토의 복위는 1표를 얻었다.] 하지만 열강 출신 왕자가 다른 나라 왕위에 오르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알프레드는 국왕 후보에서 배제되었고, 그리스와 열강들이 서로 조율하여 빌헬름이 선택되었다. [[영국]]은 당시 [[에드워드 7세|왕태자]]의 처남[* [[에드워드 7세]]의 아내인 [[덴마크의 알렉산드라|알렉산드라]]는 빌헬름(요르요스 1세)의 바로 위 누나이다.]이기도 한 요르요스의 즉위 선물로 당시 영국령이던 [[코르푸]] 섬을 포함한 이오니아 제도를 그리스에 양도해주었다. 처음에는 나이가 어려 숙부 율리우스 왕자나 빌헬름 스폰네크 백작의 조언을 받았지만,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었던 이들을 덴마크로 돌려보낸다. 애초에 진짜 [[그리스인]]도 아니었고 당연히 [[그리스어]]도 몰랐다. 모어는 [[덴마크어]], 제2언어는 [[영어]]였다. 이외에도 [[독일어]]나 [[프랑스어]]를 할 정도로 그리스와 인연이 없었다. 하지만 즉위 후 곧바로 [[그리스 교회]]로 개종하고 빠르게 그리스어를 익혔으며, 재임 초기에 덴마크 섭정관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이후 그리스 정국을 안정화시키면서 인기가 높아졌다. 또한 [[고대 그리스]]와 [[동로마 제국]] 시절에 대한 자부심과 향수를 간직하고 있던 [[그리스인]]의 요구에 부응하여, 영토 확장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덕분에 요르요스 1세의 재임 후반기에는 재임 초기보다 그리스의 영토가 2배 이상 넓어졌다.[* 즉위 당시 47,000㎢ → 1913년 108,610㎢.] 크레타 섬을 탈환하려다가 실패하면서 한동안 귄위가 실추되기도 했지만, 이후로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와 힘을 합치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50년간 재위하면서 그리스 역대 국왕들 중에 가장 오래 재위하였고, 아울러 [[1896 아테네 올림픽]]을 개회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그의 친손자인 [[필립 마운트배튼]]은 60년 뒤 [[1956 멜버른 올림픽]]에서 국왕 [[엘리자베스 2세]]를 대리하여 개최 선언을 했다.] [[파일:에드워드 7세 장례식 참석 군주들 사진.jpg]]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서. 뒷줄 왼쪽부터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 [[불가리아 왕국|불가리아]] [[차르]] [[페르디난트 1세(불가리아)|페르디난트 1세]], [[포르투갈 왕국|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2세]], [[독일 제국]] [[카이저|황제]] [[빌헬름 2세]], '''요르요스 1세 본인''', [[벨기에인의 왕]] [[알베르 1세]]다. 앞줄은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 [[영국 국왕]] [[조지 5세]](아들 [[그리스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의 사돈 [[조지 6세]]의 아버지),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8세]](친형). 그러나 1913년 즉위 50주년을 코앞에 두고 그리스가 새로 얻은 [[테살로니키]]를 방문했을 때 알렉산드로스 시나스(1870 ~ 1913)라는 이가 쏜 총에 맞아 [[암살]]당했다. 범인 시나스는 반군주파인 사회주의 조직원이라는 소문이 있었으나 실제로는 횡설수설했고 알콜 중독이라는 의사 진단이 있었다. 그래도 경찰이 잡아다가 고문을 하자 그는 경찰들을 비웃었고 5월 6일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 == 가족관계 == === 조상 === ||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13> 요르요스 1세[br]{{{-2 (George I[br]of Greece)}}} ||<|6> [[크리스티안 9세]][br]{{{-2 (Christian IX)}}} ||<|3> 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공작 빌헬름[br]{{{-2 (Vilhelm,[br]Duke of Holstein-Sonderburg-Glücksburg)}}} || || 홀슈타인-존더부르크-베크 공작 프리드리히[br]{{{-2 (Frederick,[br]Duke of Holstein-Sonderburg-Beck)}}} || || 쉴리벤 여백작 프리데리케[br]{{{-2 (Countess Friederike of Schlieben)}}} || ||<|3> 헤센-카셀의 루이제[br]{{{-2 (Princess Louise[br]of Hesse-Kassel)}}} || || 헤센-카셀의 카를[br]{{{-2 (Prince Charles of Hesse-Kassel)}}} || || [[덴마크]]의 루이세 공주[br]{{{-2 (Princess Louise of Denmark)}}}[* [[프레데리크 5세]]의 3녀이자 [[조지 2세]]의 손녀이다.] || ||<|7> [[헤센카셀의 루이제]][br]{{{-2 (Princess Louise of Hesse-Kassel)}}} || ||<|3> 헤센-카셀의 빌헬름[br]{{{-2 (Prince William of Hesse-Kassel)}}} || || 헤센-카셀의 프리드리히[br]{{{-2 (Prince Frederick of Hesse-Kassel)}}}[* [[조지 2세]]의 손자이다.] || || 나사우-우징엔의 카롤리네[br]{{{-2 (Princess Caroline of Nassau-Usingen)}}} || ||<|3> [[덴마크의 샤를로테|덴마크의 샤를로테 공주]][br]{{{-2 (Princess Charlotte of Denmark)}}} || || [[덴마크]]의 왕세자 프레데리크[br]{{{-2 (Frederick,[br]Hereditary Prince of Denmark)}}}[* [[프레데리크 5세]]의 3남이다.] ||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공녀 조피[br]{{{-2 (Princess Sophia[br]of Mecklenburg-Schwerin)}}} || === 자녀와 후손 === 요르요스 1세는 1867년에 [[러시아 제국]] 황족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 [[니콜라이 1세]]의 손녀(차남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장녀)이자 [[알렉산드르 2세]]의 조카이다.]과 결혼해 5남 3녀를 두었다. 크리스티안 9세의 자녀들 중에서 가장 많은 아들을 낳았다.[* 참고로 처가집으로 가면 처남인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슬하 6남 3녀)에 이어서 2위다.] 요르요스 1세 이후의 그리스 왕손들은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9세]]의 손자녀가 되므로, 자신들의 경칭으로 “그리스와 덴마크의 아무개 왕자/공주”를 사용한다.[* 막내아들 크리스토폴로스의 손녀들은 예외, 크리스토폴로스의 외아들인 미하일 왕자가 그리스인 평민과 결혼했을 때 덴마크 왕실에서 이를 승인해주지 않아 덴마크 공주 칭호는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은 그리스 공주 칭호만을 사용한다.] 아버지처럼 유럽의 이름있는 가문들과 혼맥을 맺었다. 특히 유럽의 몇 안되는 [[황제]] 가문이었던 [[독일 제국]]의 [[호엔촐레른 가문]], [[프랑스 제국]]의 [[보나파르트 가문]], [[러시아 제국]]의 [[로마노프 가문]]와 혼맥을 맺기도 했다.[* 다만 프랑스 제국은 1870년에 무너지고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보나파르트 왕조는 이름밖에 없는 가문이다. 물론 과거 황제 가문인만큼 격 자체는 매우 높았다.] 오스트리아의 황제 가문인 [[합스부르크 가문]]를 빼면 유럽의 모든 황제 가문과 혼맥을 맺은 셈. 다만 아들을 가장 많이 낳았고 친손자가 6명이지만 현재 2남(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이 귀천상혼 후 자녀 없이 사망), 3남(세 딸을 낳음), 5남(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그 아들이 두 딸을 낳음)의 가계가 단절되었고, 현재까지 가계가 이어지는건 장남 콘스탄티노스 1세와 4남 안드레아스밖에 없다. 장남 콘스탄티노스 1세의 아들중에서 장남과 차남이 후계자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현재 요르요스 1세의 자손은 그리스 국왕 [[파블로스]]와 영국의 국서 [[필립 마운트배튼]]의 자손으로만 이어지게 된다. 그래도 파블로스와 필립의 자손들이 아들부자여서 꽤 번성했다. 현손자인 파블로스 왕세자의 아들수는 특기할만한 부분. 물론 필립 마운트배튼은 영국으로 귀화를 한 뒤 결혼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옛 그리스 왕가의 남계 후손은 파블로스 국왕의 외아들 콘스탄티노스 2세의 아들, 손자들 뿐이다.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 '''1남''' || [[콘스탄티노스 1세]][br]{{{-2 (Constantine I)}}} || [[1868년]] [[8월 2일]] || [[1923년]] [[1월 11일]] || [[조피 도로테아 울리케 알리체|프로이센의 조피]][br]슬하 3남 3녀[* [[요르요스 2세]], [[알렉산드로스 1세|알렉산드로스]],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루마니아의 왕대비 엘레니]], [[파블로스 1세|파블로스]] 등] || || '''2남''' || [[그리스와 덴마크의 요르요스|요르요스 왕자]][br]{{{-2 (Prince George)}}} || [[1869년]] [[6월 24일]] || [[1957년]] [[11월 25일]] || 마리 보나파르트 공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남동생 뤼시앵 보나파르트의 증손녀][br]슬하 1남 1녀 || || '''1녀''' ||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게오르기예브나 대공비[br]{{{-2 (Grand Duchess Alexandra Georgievna of Russia)}}} || [[1870년]] [[8월 30일]] || [[1891년]] [[9월 24일]] || [[러시아]]의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알렉산드르 2세]]의 6남이다.][br]슬하 1남 1녀 || || '''3남''' || 니콜라오스 왕자[br]{{{-2 (Prince Nicholas)}}} || [[1872년]] [[1월 22일]] || [[1938년]] [[2월 8일]] || 러시아의 [[옐레나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 [[알렉산드르 2세]]의 손녀(3남 블라디미르 대공(1847~1909)의 막내이자 외동딸)이다.][br]슬하 3녀[*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나|켄트 공작부인 마리나 왕자비]] 등] || ||<|2> '''2녀''' ||<|2>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아|러시아의 마리야 게오르기예브나 대공비]][br]{{{-2 (Grand Duchess Maria Georgievna of Russia)}}} ||<|2> [[1876년]] [[3월 3일]] ||<|2> [[1940년]] [[12월 14일]] || [[러시아]]의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대공[* [[니콜라이 1세]]의 손자(4남 미하일의 3남)이다. [[러시아 혁명]] 당시 [[볼셰비키]]에 의해 살해당함.][br]슬하 2녀 || || 페리클레스 이오아니디스[* 1887~1965, [[그리스]] [[해군]] 장교] || || '''3녀''' || 올가 공주[br]{{{-2 (Princess Olga)}}} || [[1880년]] || [[1880년]] || || || '''4남''' ||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안드레아스 왕자]][br]{{{-2 (Prince Andrew)}}} || [[1882년]] [[2월 2일]] || [[1944년]] [[12월 3일]] ||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br]슬하 1남 4녀[*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르가리타|호엔로에랑엔부르크 공비 마르가리타]], [[그리스와 덴마크의 테오도라|바덴 변경백비 테오도라]], [[그리스와 덴마크의 케킬리아|헤센의 대공세자비 체칠리아]],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1914)|하노버의 게오르크 빌헬름 왕자비 소피아]], [[필립 마운트배튼|에든버러 공작 필립]]] || ||<|2> '''5남''' ||<|2> 크리스토폴로스 왕자[br]{{{-2 (Prince Christopher)}}} ||<|2> [[1888년]] [[8월 10일]] ||<|2> [[1940년]] [[1월 21일]] || 낸시 스튜어트 워싱턴 리즈[* 사별 / 1878~1923, [[미국]] 출신 상속녀로 낸시에게는 크리스토폴로스 왕자와 한 결혼이 세 번째 혼인이었다. 1920년에 크리스토폴로스 왕자와 결혼할 때 그리스의 아나스타샤 공주 칭호를 받았으나 3년 만에 암으로 사망했다.] || || 오를레앙의 공녀 프랑수아즈[* 1902~1953,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방계인 오를레앙 가문 출신으로 [[루이 필리프 1세]]의 고손녀이다. 크리스토폴로스의 작은어머니인 오를레앙의 공녀 마리([[크리스티안 9세]]의 3남 발데마르의 부인)의 조카이고, 프랑수아즈의 여동생 안은 크리스토폴로스의 조카인 이리니 공주의 동서(이리니의 남편 아이모네의 형인 3대 아오스타 공작 아메데오와 결혼)이기도 하다. 크리스토폴로스 왕자와는 1929년에 결혼하였다.][br]슬하 1남[* 미하일 왕자(1939~). 옛 그리스 왕가에서 거의 유이하게(다른 하나는 [[알렉산드로스 1세|알렉산드로스]]) (민족적, 혈통적인) [[그리스인]]과 결혼했다. 그리스 예술가인 마리나 카렐라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는데, 그 중 둘째 딸 올가는 [[이탈리아]] [[사보이아 왕조]]의 방계이자 자신의 친척인(요르요스 1세 기준으로 하면 7촌 조카, 오를레앙 가문의 기즈 공작 장 기준으로 하면 6촌 오빠이다)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의 아이모네와 결혼했다.] || == 여담 == [[파일:attachment/드라크마/drachmai21.jpg]] 1954년 그리스 [[드라크마|10드라크마]] 지폐에 도안으로 실렸었다. [[분류:그리스 국왕]][[분류:덴마크의 왕자]][[분류:글뤽스부르크 가문(그리스)]][[분류:1845년 출생]][[분류:1913년 사망]][[분류:암살된 인물]][[분류:코펜하겐 출신 인물]][[분류:올림픽 개회 선언자]][[분류:총기에 죽은 인물]][[분류:가터 훈장]][[분류:타토이 왕실 묘지 안장자]][[분류:로열 빅토리아 훈장]][[분류:화폐의 인물]][[분류:덴마크계 그리스인]][[분류:독일계 그리스인]][[분류:독일계 덴마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