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신센구미)] 吉村貫一郎 (1839 ~ 1868.01.30) [목차] == 개요 == 난부(南部)의 모리오카(盛岡) 번(藩)의 하급무사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본명이 요시무라 켄타로(嘉村權太郎)라는 설도 전해져오고 있다. 학문과 검술로 모리오카 번 안에서 새로운 검술 류(流)를 열만큼 뛰어난 재주를 가졌다. 분큐(文久) 3년(1863)에 모리오카 번에 있던 그는 교토행이 결정되자 치바(千葉)씨의 호쿠신잇토류(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를 잇는 겐무칸(현무관/玄武館)에 들어갔다. 도장에서 그의 지위는 면허까지 갔다. 면허개전의 준말로 해당 유파 전체에서 알아주거나, 개인이 유파의 이름을 걸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지녔다는 것이다. 당시의 도장은 나랏일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는 곳이기도 했기 때문에, 요시무라는 이 즈음 존왕양이(尊皇攘夷) 사상에 빠져들었다. 2년 뒤인 1865년에 마침내 모리오카 번에서 나와 당시 이름을 떨치던 [[신센구미]](新選組)에 입대하여 문무 양쪽 면에서 뛰어난 그의 재주를 인정받아 대원 겸 감찰, 그리고 [[격검]]사범으로 발탁되기에 이르른다. 가정에 대한 애착이 깊었던 그는 남아있는 다섯 식구를 부양하기 위해 이 길을 택했다. 일설에는 이 때 번을 떠나면서 마음이 약해질까봐 가족들의 얼굴조차 보지 않고 떠나려고도 했다고 전한다. 게이오 3년(1867), 바쿠후(幕府)의 신하로서 [[신센구미]]가 인정받자, 그도 정식 신센구미 대원의 예식을 갖추게 되었다. 고향에 있던 그의 가족들도 큰 성공이라며 감격해 마지 않았다고 전한다. 격검사범으로 있었지만 그가 참가한 싸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전해오지 않는다. [[신센구미]]의 둔영지가 이전할 때 니시혼간지((西本願寺)에 교섭을 하러 가거나, 산죠 제찰사건(三條制禮事件)의 사죄를 목적으로 한 도사 번의 잔치에 요시무라가 참여하거나 하지만, 텐만야사건(天滿屋事件)때에 미우라 큐타로(三浦休太郎: 후의 미우라 야스시 三浦 安)의 호위를 맡았던 것 이외에 별다른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보아 그는 검객으로서의 신센구미 대원보다는 신센구미의 논객으로 활동했던 듯 하다. 게이오 4년 정월(1868년 1월), 도바-후시미 전투(鳥羽 · 伏見戰鬪: 바쿠후군과 존황양이파, 천황군과의 전투로, 신센구미 최후의 전투)에 참가하지만 전사했는지 탈주했는지, 이후의 소식은 두절되었다. 소설가 시모자와 칸에 의하면, 패주하던 요시무라는 부대와도 떨어져 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신센구미가 오사카를 떠났음을 안 요시무라는, 길거리를 해메어, 모리오카 번의 영주 저택에 도착해 만신창이의 몸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지막 부탁을 한다. 그러나, 무사로서 지고서도 살아서 고향으로 가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짓이라 하여, 옛 친구이자 전 조장이었던 난부 중신 오노 지로에몬(大野次郎衛門)에게 할복을 명령받았다. 이 때 할복하여 최후를 마쳤다고도 하고, 부상이 너무 심해 명령을 받고 얼마 있지 않아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고도 한다. 그가 죽고 난 후, 그가 있던 방에는 니분킨(二分金: 에도시대의 화폐) 12냥과 수표들이 놓여 있었고, 그와 함께 가족들에게 이 돈을 전해달라는 요시무라의 마지막 말이 적힌 종이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노 지로에몬이라는 인물은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이 알려졌으며, 자손인 카무라 가의 과거장에는, 요시무라가 메이지 3년(1870년) 1월 15일 사망했다고 쓰여있다. == 매체에서 == '''[[칼에 지다|미부기시덴]]'''에 의해 많이 알려진 인물로. 사실 위에 나오는 설명들중 대부분은 이 작품에서 창작된 이야기다. 오노 지로에몬도 이 작품에 나온 캐릭터. [[안녕 절망선생]]에 의하면 '[[오키타 소우지]]나 [[히지카타 토시조]]의 이름에 밀려 '''[[신센구미]] 최강의 검사'''인 요시무라 칸이치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라고 한다. [[바람의 검 신선조]]가 바로 칸이치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이다. 정확히는 [[칼에 지다|미부기시덴]]의 영화판. [[분류:에도 시대/인물]][[분류:신센구미]][[분류:1839년 출생]][[분류:1868년 사망]][[분류:할복한 인물]][[분류:보신 전쟁/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