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후진 황제)]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33595 0%, #9966cc 20%, #9966cc 80%, #633595)" '''{{{#black 요진 추존 군주[br]{{{+1 魏武王 | 위무왕}}}}}}'''}}} || || '''[[묘호|{{{#black 묘호}}}]]''' ||<(> 없음 || || '''[[시호|{{{#black 시호}}}]]''' ||<(> 위무왕(魏武王) || || '''[[성씨|{{{#black 성}}}]]''' ||<(> 요(姚) || || '''[[휘|{{{#black 휘}}}]]''' ||<(> 양(襄) || || '''[[자(이름)|{{{#black 자}}}]]''' ||<(> 경국(景國) || || '''{{{#black 신장}}}''' ||<(> 8척 5촌(201cm) || || '''{{{#black 생몰}}}''' ||<(> 331년 ~ 357년 || || '''{{{#black 재위}}}''' ||<(> 352년 ~ 357년 || || '''{{{#black 부황}}}''' ||<(> [[요익중]](姚弋仲) || [목차] [clearfix] == 개요 == [[오호십육국시대|5호 16국시대]] [[관중]] 지방에 세워진 [[후진(오호십육국시대)|후진]]의 건국 군주인 태조 무소제 [[요장]]의 형이었다. == 생애 == 아버지 [[요익중]](姚弋仲)은 [[강족]](羌族)의 족장이었는데, [[갈족]] 석씨의 [[후조]]가 한족인 [[염민]](冉閔)에게 멸망하자 [[하북]]에서 거병하고 후조의 후계자인 [[석지]](石祗)의 휘하에 가담하여, [[염위]]에 맞섰다. 요익중은 석지로부터 친조왕(親趙王)에 봉해졌고 요양 역시 신창공(新昌公)으로 봉해져 [[예주]]자사가 되었다. 하지만 351년에 요익중은 염위군에 패배했고 그와중에 석지가 배신당하여 살해되었다. 당시 장성한 요양은 키가 [[http://www.renwujieshao.com/lishi/shiliuguo/yaoxiang.html|8척 5촌]][* 당시 척인 23.7cm로 계산하면 201cm가 나온다.]으로 컸다. 이후 요익중과 요양 부자는 [[동진]]에 투항하여 각각 고릉군공(高陵郡公)과 평향현공(平鄉縣公)이 되었다. 요익중이 352년에 사망하여 요양이 강족의 수장이 되었는데, [[저족]]의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과 맞섰으나 패배하여 다시 동진에 의탁했다. 하지만 동진의 장군 은호(殷浩)는 요양을 경계했고, 결국 353년에 [[화이허|회수]]를 건너 강족을 공격했는데, 요양은 그를 격파하고 오히려 [[화이난|회남]](淮南)을 점령했다. 요양은 354년에 형식상으로 [[동진]]의 신하가 되었으나 사실상 독립적으로 움직였고, 355년에 [[허창]]을 점령한 후, 356년에 고도 [[낙양]]을 공격하기도 했다. 날로 강성해지는 요양을 경계한 동진은 명장 [[환온]](桓溫)을 보냈고, 요양은 그가 이끄는 북벌군에 패배하여 평양(平陽, [[린펀]])으로 도주했다. 이후 요양과 강족은 [[화북]] 대신 관중(關中)을 목표로 하여 여러 성을 공격했다. 이는 전진의 제2대 군주였던 여왕 [[부생]](苻生)의 어그로를 끌었고, 함양([[셴양]]) 인근에서 맞붙었다.(357) 요양은 부생의 매복에 빠져 삼원(三原)에서 전사했고, 그의 뒤를 이은 동생 [[요장]](姚萇)은 강족을 이끌고 전진에 투항하여 강족의 제1차 국가 건설 노력은 살패로 귀결되었다. 부생은 요장에게 형 요양의 제사를 후히 치르도록 했으며, 훗날 [[비수대전]] 이후 요장이 후진을 건국하자 요양을 위무왕(魏武王)으로 추존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진서)]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요양, version=25)]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의 추존 황제]][[분류:331년 출생]][[분류:357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