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파일:Josef Gauchel.jpg|width=100%]] || || 이름 ||요제프 가우헬[br](Josef Gauchel) || || 생년월일 ||[[1916년]] [[9월 11일]] || || 사망년월일 ||[[1963년]] [[3월 21일]] (향년 46세) || || 국적 ||[[파일:독일 국기.svg|width=28]] [[서독]] || || 출신지 ||[[독일 제국]] 코블렌츠노이엔도르프 || || 포지션 ||센터 포워드,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워드 || || 신체조건 ||169cm | 69kg || || 소속팀 ||'''[[TuS 코블렌츠|TuS 노이엔도르프]] (1932-1948)''' || || 국가대표 ||16경기 13골 (1936-1942) || || 감독 ||[[TuS 코블렌츠|TuS 노이엔도르프]] (1946-1954)[br][[TuS 코블렌츠|TuS 노이엔도르프]] (1956-1959) || [목차] [clearfix] == 개요 == [[독일]]의 전 축구 감독. == 생애[*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 === 선수 생활 === ==== 클럽 ==== 가우헬은 모든 선수 생활을 [[TuS 코블렌츠|TuS 노이엔도르프]]에서 [[원 클럽 플레이어]]였다. 하지만 노이엔도르프는 가우헬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독일 전국은커녕 지역 리그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1943년과 1944년 [[가우리가]] 모젤란트(Moselland)에서 우승, [[분데스리가|독일 챔피언십]]에 진출했지만 1943년에는 [[SC 포르투나 쾰른|SV 빅토리아 쾰른]], 1944년에는 [[FC 샬케 04]]에 밀려 탈락했다.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 ==== 1936년 5월, 당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독일 대표팀]]의 감독이었던 [[오토 네르츠]]는 가우헬을 대표팀에 포함시켰고 연습 경기에 그를 출전시켰다. 그런 다음 네르츠는 다소 파격적으로 [[A매치]] 출전 경험이 전혀 없던 19살의 가우헬을 [[1936 베를린 올림픽|올림픽]]에 데려갔다. 가우헬은 [[룩셈부르크 축구 국가대표팀|룩셈부르크]]를 상대로 치른 첫 A매치에서 2골을 넣으며 독일의 9대0 대승에 기여했다. 하지만 가우헬은 다음 경기인 [[노르웨이 축구 국가대표팀|노르웨이]]전에서 빠졌고 독일은 노르웨이에 패하며 다소 이르게 올림픽 무대에서 퇴장하게 되었다. 네르츠가 올림픽 조기 탈락의 책임을 지고 대표팀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고 [[제프 헤어베어거|헤르베르거]]가 새로 감독에 취임했지만 가우헬의 자리는 쉽게 나지 않았다. 독일 대표팀은 올림픽 이후부터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1938년 월드컵]]전까지 총 20경기를 넘게 치렀지만 가우헬은 이중 단 5경기 출전에 그쳤다. 이 5경기 중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지역예선#s-2.1|월드컵 지역 예선]] [[에스토니아 축구 국가대표팀|에스토니아]]전이 포함되어 있었고 가우헬은 이 경기에서 2골을 넣었다. 그리고 1938년 월드컵을 치르기 전 독일의 마지막 친선 경기였던 5월 14일의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가우헬은 독일의 3대6 패배는 막지 못했지만 1골을 넣었다. 1938년 월드컵의 독일과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스위스]]전은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1라운드#s-1.1|대회 개막전]]이었다. 그리고 전반 29분, 가우헬의 발에서 개막 축포가 나왔다. 페널티 에어리어 왼쪽에서 중앙으로 찔러준 볼을 가우헬이 쇄도해 들어오면서 강력한 슈팅으로 스위스의 골문을 뚫은 것이다. 하지만 독일은 전반 끝날 무렵, 스위스에 동점골을 허용했고 연장 혈투 끝에 무승부로 재경기를 치러야했다. 가우헬은 출전하지 않았으나 독일은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1라운드#s-1.9|재경기]]에서 스위스에 2대4로 역전패하며 탈락하고 말았다. 가우헬은 1938년 월드컵 이후 독일 대표팀에서 더욱 좋은 모습을 보였다. 독일의 첫 A매치 상대였던 [[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폴란드]]를 상대로 [[해트 트릭]]을 성공시켰고 1939년 3월 26일, 월드컵 우승팀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를 상대로도 골은 기록하지 못했지만 좋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독일은 [[실비오 피올라]]에게 2골을 얻어 맞아 이탈리아에 2대3으로 패했다. 가우헬의 마지막 A매치는 1942년 7월 19일의 [[불가리아 축구 국가대표팀|불가리아]]전이었다. 이것은 가우헬의 16번째 A매치였고 독일은 불가리아를 3대0으로 깨뜨렸다. === 감독 ===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축구가 다시 시작되었고 가우헬은 1946년부터 친정팀 [[TuS 코블렌츠|TuS 노이엔도르프]]의 [[선수 겸 감독]]으로 감독일을 시작했다. 1948년에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가우헬은 1954년까지 노이엔도르프의 감독으로 일했다. 그는 1955-56 시즌에 FV 엥어스(FV Engers)의 코치로 잠시 일하고 1957년에 다시 친정팀에 복귀했다. 그러나 이 동행은 1959년에 끝나버리고 말았다. 구단과 회장이 비자금을 운영한 혐의로 [[독일 축구 연맹]]이 그들을 처벌하자 구단측에선 가우헬이 [[내부고발]]을 했다며 그를 구단에서 제명했다. === 이후 === 감독직에서 물러난 가우헬은 와인 회사와 도박 사무소에서 일했다. == 플레이 스타일 & 평가 == 가우헬은 빠르고 운동 능력이 좋은 공격수였다. 또한 강력한 슈팅 파워와 열정을 가진 선수였다. > 1936년, 저는 당시 10살이었는데 [[오토 네르츠|네르츠 교수]]와 [[제프 헤어베어거|헤르베르거]]가 제 롤모델 가우헬을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팀]]에 불렀죠. 그 발탁은 제 인생에도 큰 전환점이었어요. 그러다 제가 16살 때 [[TuS 코블렌츠|TuS 노이엔도르프]]의 1군 훈련에 참가했는데 그때는 모두가 아시다시피 [[제2차 세계 대전|전쟁]]중이었어요. 그래서 몇달이 지나서야 코블렌츠 경기장에 설 수 있었죠. 그때 인사이드 라이트 포지션에 가우헬이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어요. 가우헬의 정규 훈련을 통해 우리는 전쟁 이후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국가대표팀에서 배운 대로 모든 것을 훈련에 접목시켰어요. 그는 그것이 최고의 훈련이었다고 믿고, 오늘날까지도 제가 유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희미한 파란색 노트에 메모를 하고 스케치를 그렸죠. 저는 오늘날까지 가우헬의 훈련 방법 중 하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이죠. 상대방이 공을 소유하고 있으면 모두가 개인 상대보다는 공을 가진 선수에게 우표처럼 붙어 있고 자신의 팀이 공을 가지고 있다면, 플레이할 수 있도록 순식간에 상대로부터 떨어져 나가야 합니다. 트레이너로서 가우헬과 같은 강한 성격을 갖고 열심히 훈련하면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 > [[루디 구텐도르프]] == 수상 == === 선수 === ==== 클럽[* 가우헬은 [[TuS 코블렌츠|TuS 노이엔도르프]] [[원 클럽 플레이어]]이므로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 ==== * [[가우리가]] 모젤란트 우승 2회: 1942-43, 1943-44 * 미텔라인포칼 우승 1회: 1946 === 감독 === * 남서부 독일컵 우승 1회: 1954([[TuS 코블렌츠|TuS 노이엔도르프]]) [각주] [[분류:1916년 출생]][[분류:1963년 사망]][[분류:1932년 데뷔]][[분류:1948년 은퇴]][[분류:라인란트팔츠 주 출신 인물]][[분류:독일의 축구선수]][[분류:공격수]][[분류:TuS 코블렌츠/은퇴, 이적]][[분류:원클럽맨]][[분류:독일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1938 FIFA 월드컵 프랑스 참가 선수]][[분류:독일의 올림픽 참가 선수]][[분류:1936 베를린 올림픽 참가 선수]][[분류:독일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1936 베를린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선수 겸 감독/축구]][[분류:독일의 축구감독]][[분류:TuS 코블렌츠/역대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