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하스몬 왕조 국왕)] [include(틀:역대 이스라엘 대제사장)] ||<-3><#FFFFF0> '''{{{#000000 하스몬 왕조 9대 군주}}}''' [br] {{{+2 {{{#000000 '''יוחנן הרקנוס | 요한 히르카노스 2세'''}}}}}}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요한 히르카노스 2세.jpg|width=100%]]}}} || ||<|3><#FFFFF0> '''{{{#000000 제호}}}''' ||<#FFFFF0> '''[[한국어|{{{#000000 한국어}}}]]''' ||요한 히르카노스 2세 || ||<#FFFFF0> '''[[히브리어|{{{#000000 히브리어}}}]]''' ||יוחנן הרקנוס || ||<#FFFFF0> '''[[라틴어|{{{#000000 라틴어}}}]]''' ||John Hyrcanus II || ||<-2><#FFFFF0> '''{{{#000000 존호}}}''' ||코헨(כֹּהֵן , 제사장)이자 국왕 || ||<-2><#FFFFF0> '''{{{#000000 생몰 년도}}}''' ||기원전 110년 ~ 기원전 30년 || ||<-2><#FFFFF0> '''{{{#000000 재위 기간}}}''' ||기원전 67년 ~ 기원전 66년(1차 재위)[br]기원전 63년 ~ 40년(2차 재위) || [목차] [clearfix] == 개요 == [[하스몬 왕조]] 9대 군주. == 행적 == 하스몬 왕조 7대 군주 [[알렉산드로스 야나이]]와 8대 군주 [[살로메 알렉산드라]]의 장남이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가 죽었을 때의 연세가 80세였다고 한다. 이에 따른다면, 그는 기원전 110년에 출생했을 것이다. 기원전 76년 라가바 요새를 포위 공격하던 중 건강이 악화되면서 임종을 눈앞에 둔 야나이는 아직 어린 그를 대신해 아내 살로메에게 통치를 맡겼다. 살로메는 왕위에 오른 뒤 여자는 [[대제사장]]이 될 수 없다는 율법에 따라 대제사장 직임을 그에게 맡겼다. 기원전 67년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죽음이 임박했을 때, 그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유대 왕국의 군주가 될 에정이었다. 그러나 동생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형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는 데 자신은 일개 장군으로 취급받는 것에 반감을 품었다. 밤을 틈타 예루살렘에서 탈출한 뒤, 살로메 집권 이래 [[바리사이파]]가 정국을 주도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사두가이파]]를 포섭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2주 동안 22개의 요새를 공략해 예루살렘을 압박했다. 그런 상황에서 살로메가 세상을 떠났고, 요한 히르카노스 2세가 새 권력자가 되었다. 기원전 66년, 그는 군대를 이끌고 [[여리고]] 인근에서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반란군과 맞붙었다. 그러나 전투 도중 많은 병사들이 적에게 귀순하는 바람에 패배하고 예루살렘 성채로 피신했다. 그러나 이리스토불로스가 [[예루살렘 성전]]을 확보하고 계속 압박을 가하자, 그는 신변을 보장받고 대제사장 직위를 유지하는 대신 통치권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그렇게 합의가 이뤄졌지만, 이두매인 안티파트로스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는 아리스토불로스가 자신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안티파트로스의 참언에 귀를 기울였고, 결국 안티파트로스의 조언에 따라 [[나바테아인]]의 왕 [[아레타스 3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아레타스 3세는 이 기회에 유대 왕국에 영향력을 확대하기로 마음먹고, 기원전 65년 5만 대군을 일으켜 예루살렘으로 쳐들어가서 몇 달간 포위 공격했다. 한편, [[로마 공화국]]의 [[명장]] [[폼페이우스]]는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마무리한 뒤 [[셀레우코스 제국]]을 멸망시키고 시리아를 로마의 속주로 삼았다. 이때 그와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사절들이 폼페이우스에게 찾아갔다. 폼페이우스는 아리스토불로스로부터 400달란트를 제공할 테니 도와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여 아레타스 3세에게 군대를 철수시키라고 요구했다. 아레타스 3세는 강대한 로마와 싸우길 원치 않았기에 순순히 철수했다. 이후 그의 사절이 폼페이우스에게 더 많은 금액을 제시하며 유대의 왕으로서 복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한편, 하스몬 왕조의 내우외환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던 유대인들은 폼페이우스를 찾아가서 하스몬 왕조를 아예 멸망시켜달라고 청원했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는 양자의 갈등을 중재하겠다는 명분으로 유대로 진군해 여러 도시에 무혈 입성했다.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폼페이우스가 유대 왕국을 로마의 속주로 송두리째 삼으려 든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채고 저항하려 했지만, 곧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고 예루살렘을 로마군에 넘겨주기로 했다. 유대인들이 이에 불복하여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않자, 폼페이우스는 유대인들이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안식일]]에 급습하여 예루살렘을 공략하고 12,000명을 학살했다. 그 후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로마로 끌려갔고, 요한 히르카노스 2세는 대제사장으로 공인되었지만 정치적 권위는 없었다. 그 후 대제사장으로서 종교 활동에만 전념하던 그는 기원전 47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유대의 통치자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것은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 전쟁]]에 휘말린 자신에게 병력을 지원하고 막대한 뇌물을 바치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인 안티파트로스에 감화되었기 때문이지, 그가 한 건 하나도 없었다. 그는 명목상 통치자였을 뿐, 실권은 안티파트로스에게 있었다. 안티파트로스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고 두 아들 중 장남 파사엘을 유대와 이두매의 행정장관으로, 차남 [[헤로데 대왕|헤로데]]를 갈릴리의 행정장관으로 임명했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지면서 로마의 정국이 혼란스러워졌다. 이 무렵에 안티파트로스도 모종의 인물에게 독살당했고, 파사엘과 헤로데는 권력을 놓고 분쟁을 벌였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조정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던 [[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이 일어나자,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아들 [[안티고노스 2세 마타티아스]]가 파르티아 편에 가담해 예루살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요한 히르카노스 2세의 귀를 잘라서 파르티아군에 넘겼고, 파사엘을 살해했다. 오직 헤로데 만이 [[마사다]]로 피신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렇게 파르티아군에 넘겨진 그는 [[바빌론]]으로 이송되어 그곳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의 지도자 노릇을 했다. 기원전 36년, 유대 왕국의 새 권력자가 된 [[헤로데 대왕]]은 그가 파르티아인들에게 자신이 왕위를 되찾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추길 것을 두려워해 그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와달라고 요청했다. 바빌론의 유대인들은 함정이 분명하니 가면 안 된다고 경고했지만, 고향에 돌아가길 갈망했던 그는 받아들이지 않고 예루살렘에 향했다. 헤로데는 그를 정중히 대접하고 국무회의 의장 직을 맡겼다. 그러나 그는 기원전 30년 나바테아인과 음모를 꾸민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분류:하스몬 왕조 국왕]][[분류:기원전 110년 출생]][[분류:기원전 30년 사망]][[분류:폐위된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