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우기돈}}}'''[br]'''禹基敦'''}}}}}} || || '''창씨명''' ||탄요 모토이치로(丹陽基一郞) || || '''자''' ||치홍(治洪) || || '''본관''' ||[[단양 우씨]][* 판서공파-처사공(處士公) 홍숙(洪淑)파 28세 기(基) 항렬.] || ||<|2> '''출생''' ||[[1920년]] [[5월 25일]] || ||[[경상북도]] [[칠곡군]] 칠곡면 동천동[br](현 [[대구광역시]] [[북구(대구광역시)|북구]] [[동천동(대구)|동천동]]) || ||<|2> '''사망''' ||[[2007년]] [[4월 10일]] (향년 86세) || ||[[서울특별시]] || ||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 3층-320실-188호 || || '''상훈''' ||건국포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전 기업인. 2020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920년 5월 25일 경상북도 칠곡군 칠곡면 동천동(현 대구광역시 북구 동천동)에서 아버지 우진하(禹鎭夏)와 어머니 [[김해 김씨]] 김이응(金以應)의 딸 사이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대구광역시|대구부]] [[원대동]](현 대구광역시 [[서구(대구)|서구]] [[원대동]])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1943년 10월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미국]]과 [[중국]] 등지에서 송신되는 단파방송을 통해 [[일본제국]]의 패전 전황을 청취하고 그 내용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944년 4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구류 처분을 받고 구금되었다가, 1945년 3월 29일 [[기소유예]]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출옥하였다.[[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882&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2180&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1950년대에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삼덕동(대구 중구)|삼덕동]]과 [[북구(대구)|북구]] [[침산동(대구)|침산동]]에 각각 풍천산업(豊川産業) 주식회사와 풍천직물(豊川織物) 주식회사를 창업하여 대표에 취임하기도 했다.[[http://db.history.go.kr/id/hs_003_1957_12_18_11180|#]][[http://db.history.go.kr/id/hs_003_1959_03_18_9060|@]] 그 뒤 2007년 4월 10일 서울특별시에서 별세하였다. 사후 202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그의 유해는 2020년 5월 28일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 3층 320실 188호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남성 기업인]][[분류:단양 우씨]][[분류:북구(대구) 출신 인물]][[분류:1920년 출생]][[분류:2007년 사망]][[분류:건국포장]][[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