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스폴레토 공작)] ||<-3><:>{{{+1 '''Rainald I von Urslingen''' }}}|| ||<-2> '''생몰년도''' ||<(> 1185년 ~ 미상 || ||<-2> '''출생지''' ||<(> 우르슬링겐 || ||<-2> '''사망지''' ||<(> 미상 || ||<-2> '''재위 기간''' ||1223년 - 1230년(토스카나 후작과 스폴레토 공작 요구자) || [목차] == 개요 == [[토스카나 후작령]] 후작위 요구자, [[스폴레토 공국]] 공작위 요구자, [[시칠리아 왕국]] 섭정. == 행적 == 1185년경 [[우르슬링겐의 콘라트 1세]]의 아들로 출생했다. 시칠리아에서 [[시칠리아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을 다스리던 [[프리드리히 2세]]의 핵심 보좌관이 되었고, 1223년경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토스카나 후작령]]의 후작과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되었지만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항하는 토스카나 연맹과 [[구엘프]] 파가 토스카나와 스폴레토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큰 의미가 없었다. 1228년에서 1229년 사이에 프리드리히 2세가 제6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을 때 시칠리아 왕국의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형제인 [[우르슬링겐의 베르톨트 1세]]를 시켜 스폴레토 공국 일부 영역을 공략하고 안코나 공화국에 속한 노케라에 주둔하게 했다. 이에 분노한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그 해 11월 프리드리히 2세, 레이날트 1세, 베르톨트를 [[파문]]하고 구엘프파를 독려해 전쟁을 벌였다. 베르톨트는 조반니 콜론나 추기경이 이끄는 교황군에 패한 뒤 시칠리아 왕국으로 도주했다. 1230년 7월 시칠리아에 돌아온 뒤 교황과 화해한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이 없는 동안 전쟁을 멋대로 벌이고 막대한 비리를 저지른 레이날트를 체포해 감옥에 가뒀다. 이에 베르톨트는 프리드리히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1231년 5월 안트로도코에 자리를 잡은 뒤 토마스 1세 다퀴노가 이끄는 제국군의 연이은 공세를 물리쳤다. 1233년 4월, 프리드리히 2세는 그의 항복을 유도하기 위해 레이날트를 안트로도코로 압송해 그 앞에 보이며 "당장 항복하지 않으면 이 자를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베르톨트는 레이날트를 풀어주면 안트로도코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했고, 프리드리히 2세는 그 말에 따랐다. 이리하여 겨우 풀려났지만 모든 직위에서 몰러나야 했고,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분류:스폴레토 공작]][[분류:1185년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