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2> '''빈정간공(豳貞簡公)[br]{{{+1 牛仙客 | 우선객}}}''' || || '''[[시호|{{{#fff 시호}}}]]''' ||정간(貞簡) || || '''[[작위|{{{#fff 작호}}}]]''' ||농서군공(隴西郡公) → 빈국공(豳国公) || || '''성''' ||우(牛) || || '''이름''' ||선객(仙客) || || '''생몰''' ||675년 ~ 742년 || || '''본관''' ||경주(涇州) 순고현(鶉觚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재상. == 생애 == 경주(涇州) 순고현(鶉觚縣) 출생으로 처음에는 현의 아전을 지냈고 현령인 부문정(傅文靜)으로부터 매우 중시받았다. 부문정이 농우 영전사로 부임하면서 우선객은 부문정의 보좌를 맡았고, 뒤에 군공을 쌓아 조주(洮州) 사마(司馬)로 전임되었다. [[왕군착]]이 하서 절도사로 부임하자, 우선객은 왕군착의 판관이 되었고 송정(宋貞)이라는 판관과 함께 왕군착의 신임을 받았다. 727년, 왕군착이 죽고 [[소숭]]이 하서 절도사로 부임하면서 소숭은 다시 군정을 우선객에게 위임하였다. 729년, 소숭은 중서령이 되고 하서 절도사를 겸하면서 조정에 우선객을 수차례 천거하였다. 우선객은 소숭의 천거를 받아 태복소경, 양주(凉州) 별가, 하서 절도유후로 전임되었고, 소숭을 대신하여 하서 절도사로 전출되고 양주 자사를 겸하였으며, 태복경, 전중감을 역임했다. 736년, 우선객은 신안왕(信安王) 이의(李禕)를 대신하여 삭방 행군대총관이 되었고 최희일이 하서 절도사를 맡았다. 우선객은 하서 절도사를 맡을 때 비용을 절약하고 재물을 쌓았는데, 이 사실을 최희일이 조정에 보고하여 현종이 형부원외랑 장이정(張利貞)에게 하서로 가서 확인하도록 명하였다. 장이정이 확인해보니 창고는 꽉 차있었으니 최희일의 보고와 같았다. 737년, 우선객은 빈국공(豳國公)으로 책봉되었고, 부친인 우의(牛意)를 예부상서로 추증하고, 조부인 우회(牛會)를 경주(涇州) 자사로 추증하였다. 738년에는 시중으로 임명되고 하서 절도사를 겸하였으며, 738년에는 병부상서를 겸하였고 하서 절도사를 겸하지 않았다. 742년 좌상으로 임명되고 병부상서를 겸하였지만 결국 사망하여 상서좌승상으로 추증되고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기타 == 우선객은 삭방 절도사를 맡을 때 공신 요숭의 손자인 요굉(姚閎)을 판관으로 끌어들였다. 요굉은 우선객이 재상이 된 뒤 시어사까지 승진했는데, 자신이 귀신과 소통할 수 있고 길흉을 예지할 수 있다고 떠벌렸고, 우선객은 여기에 미혹되었다. 우선객이 병에 걸리자, 요굉은 기도를 올린다는 명목으로 우선객에게 상서우승 요혁(姚弈)과 병부시랑 노환(盧奐)을 천거하는 유표를 쓰도록 협박했다. 하지만 우선객은 이미 붓을 쥐어 글을 쓰지 못할 정도로 병이 심해서 우선객이 죽은 뒤에 우선객의 아내가 현종에게 실상을 알렸고, 현종은 분노하여 요혁을 영양군(永陽郡) 태수로 좌천시키고 노환은 임치군(臨淄郡) 태수로 좌천시키고 요굉을 사사시켰다.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675년 출생]][[분류:742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