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능연각 24 공신)] ||<-2> {{{#fff '''능연각훈신[br]영흥문의공(永興文懿公)[br]{{{+1 虞世南 | 우세남}}}'''}}}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hxlsw.com/1-110ZGH602.jpg|width=100%]]}}} || || '''[[시호|{{{#fff 시호}}}]]''' ||<(> 문의(文懿) || || '''[[작위|{{{#fff 작호}}}]]''' ||<(> 영흥군 개국공(永興郡 開國公) || || '''{{{#fff 이름}}}''' ||<(> 우세남(虞世南) || || '''{{{#fff 자}}}''' ||<(> 백시(伯施) || || '''{{{#fff 부친}}}''' ||<(> [[우려(남진)|우려]](虞荔) || || '''{{{#fff 숙부}}}''' ||<(> 우기(虞寄) || || '''{{{#fff 형제}}}''' ||<(> 우세기(虞世基) || || '''{{{#fff 생몰}}}''' ||<(> [[558년]] ~ [[638년]] [[7월 11일]] || || '''{{{#fff 출신}}}''' ||<(> 월주(越州) 여요현(餘姚縣) || || '''{{{#fff 국적}}}''' ||<(> 진(陳) → 수(隋) → 당(唐)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당나라]] 시대의 정치가이자 서예가로 우세기(虞世基)의 동생이다. 서예가로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중국]] 초당사대가(初唐四大家)로 일컬어진다. 자는 백시(伯施). == 생애 == === 남진 시기 === 558년, [[진(육조)|남진]]의 여요현에서 [[우려(남진)|우려]]의 아들로 태어난 우세남은 형인 우세기와 함께 당대의 문학가였던 고야왕(顧野王)의 밑에서 수학하였으며, 서릉(徐陵)을 동경하며 그의 밑에서 수학하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 승려였던 지영(智永)[* 지영은 남북조시대의 승려로 동진의 유명한 서예가 [[왕희지]]의 7대손이었다.]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지영의 밑에서 왕희지의 필법을 터득하여 뛰어난 명성을 얻었다. 561년, 아버지인 우려가 세상을 떠날 당시 우세남은 어린 나이였다. [[진욱]]은 우려의 두 아들이 박학함을 알고 궁중에서 사람을 보내 두 사람을 보호하였다. 상기를 채운 이후, 우세남은 건안왕(建安王) 법조참군(法曹參軍)으로 벽소되었다. 이때 우세남의 백부였던 우기(虞寄)가 진보응에게 붙잡혀 있었는데, 우세남은 아버지의 장례를 끝낸 이후에도 계속해서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우기는 진보응이 몰락한 뒤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지덕 연간에는 서양왕우(西陽王友)로 임명된다. 우세남은 글을 짓는 재주가 뛰어났으며, 청빈한 성품을 지녔고 욕심이 적은 인물이었다. === 수나라 시기 === 589년 진나라가 멸망한 뒤, 우세남은 형인 우세기와 함께 [[수나라]]의 수도인 장안으로 입성하여 수나라의 관원이 된다. 우세기와 우세남 형제의 명성은 굉장하여서, 우세기와 우세남 형제를 300년전 같은 강남 출신이자 육손의 손자들이었던 [[육기]], [[육운]] 형제에 비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수나라의 진왕(晉王) 양광과 진왕(秦王) 양준이 우세기, 우세남 형제의 명성을 듣고, 그들에게 소집문서를 보냈는데, 우세남은 모친이 연로하다는 이유를 들어 소집 문서를 사양하였다. 604년 [[문제(수)|수문제]]가 사망한 뒤, 진왕 양광이 [[수양제]]로 즉위한다. 우세남은 비서랑으로 제수되었다가 기거사인으로 제수된다. 양제 시기에 들어 우세남의 형인 우세기는 뛰어난 말재주로 양제의 총애를 받아 점점 지위가 높아져갔다. 우세남의 처자가 왕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우세남은 오히려 청빈하게 생활하였다. 이후 양제의 잇따른 실책으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가운데, 우세기, 우세남 형제는 양제를 따라 강도로 대피하였다. 양제가 강도에서 [[우문화급]]에게 시해당한 이후, 우문화급이 우세기를 처형하려고 할 때, 우세남은 눈물을 흘리면서 형 대신 자신을 죽여달라며 청하였지만, 우문화급은 우세남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결국 우세기를 죽인다. 우문화급이 멸망한 이후 우세남은 [[두건덕]]의 휘하가 되었고, 두건덕이 멸망한 뒤에는 다시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 당나라 시기 === 당나라에 투항한 이후, 우세남은 진왕 이세민의 참군으로 임명되었다가 뒤에는 기실참군으로 전임되었다. 이세민이 자신의 밑에 문학관을 설치하면서 우세남은 진왕 이세민의 홍문관 학사가 되었고, 두여회, 방현령, 저량, 요사렴, 우지녕 등과 함께 18학사의 일원이 된다. 626년 이세민이 [[현무문의 변]]을 일으킨 뒤, 우세남은 태자중사인(太子中舍人)으로 승진하여 이세민을 보좌하였다. 이세민은 곧 [[태종(당)|당태종]]으로 즉위하였고, 우세남은 저작랑으로 전임되었으며 홍문관 학사를 겸임하였다. 당시 우세남은 연로하여(558년생으로 진이 멸망할때 이미 서른이 넘었으며 당고조 이연보다도 10살 가까이 많았다), 태종에게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지만, 태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태종은 우세남을 태자우서자로 제수했으나, 우세남이 태자우서자를 고사하여 비서소감의 직위를 주었다. 633년 우세남은 비서감으로 전임되고, 영흥현 개국자(永興縣 開國子)로 봉해졌다. 634년에는 작위가 공으로 올라간다. 638년 우세남은 벼슬에서 물러나 은청광록대부가 되고 예전과 같이 홍문관 학사를 맡았다가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우세남은 예부상서로 추증되었고, 문의(文懿)라는 시호를 받았다. == 기타 == * 우문화급이 우세기를 죽일 때, 우세남이 형을 감싸면서 자신을 죽여달라고 청한 모습에 대해 봉덕이는 “우세기가 주살될 때 우세남은 땅에 엎드려 형을 대신해서 죽기를 청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여기에는 [[허선심]], [[허경종]] 부자를 비교하는 뉘앙스도 같이 깔려있는데, “허선심이 죽을 때 허경종은 춤을 추어 살 길을 구했다”고 평가한다. * 우세남이 죽은 뒤, 태종은 우세남을 위하여 시 한편을 지었고, 흥망의 도리를 술회하면서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 >종자기(鐘子期)가 죽자, 백아(伯牙)는 다시는 [[백아절현|금(琴)을 연주하지 않았다]]. 짐의 이 시는 장차 누구에게 보여주겠는가? 태종은 직후 [[저수량]]에게 우세남의 빈소로 가서 우세남을 위해 지은 시를 읽은 뒤에 이를 불태울 것을 명하였다. 태종이 우세남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 남송 초기 명재상 [[우윤문]]이 우세남의 후손이라고 한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진왕 18학사)] [include(틀:초당사대가)]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include(틀:당시기사)]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558년 출생]][[분류:638년 사망]][[분류:사오싱시 출신 인물]][[분류:중국의 공신]][[분류:중국의 서예가]][[분류:회계 우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