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우정화}}}'''[br]'''禹楨和'''}}}}}} || || '''본관''' ||[[단양 우씨]] || ||<|2> '''출생''' ||[[1893년]] [[4월 8일]] || ||[[경기도]] [[장단군|장단도호부]] 장북면 항동리[br](現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항동리[* [[6.25 전쟁]] 전에는 [[단양 우씨]] 집성촌이었다. [[독립유공자]] [[우정시]]도 이 마을 출신이다.] 181번지) || || '''사망''' ||[[1945년]] [[1월 22일]] (향년 51세)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93년 4월 8일 경기도 장단도호부 장북면 항동리(現 연천군 백학면 항동리 181번지)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9일 밤, 장단군 장도면 항동리 도덕암산(道德岩山) 위에서 [[우정시]]를 비롯한 마을 주민 10여 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다음날인 30일 밤 마을 경내 시라위산 위에서 봉화를 올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31일 밤 마을 주민 7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도면 고읍리(現 [[개성시]] [[장풍군]] 고읍리)에 있는 장도면사무소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그날 밤 11시 경에는 시위군중 150명과 함께 장도면 석주원리(現 개성시 장풍군 사시리)에 있는 장도면장 윤좌영(尹佐榮)의 집을 찾아가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주로 야간에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던 4월 2일 오전 10시부터 정오가 지날 무렵까지 항동리 옛 시장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동네 주민들과 고랑포 시장으로 향하는 사람 100여 명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12일 이른 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형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4798&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28825&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선고받아]] 공소하였으나 7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062&evntId=0034971466&evntdowngbn=Y&indpnId=0000003875&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공소가 기각되었다]]. 이어 상고하였으나 9월 11일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062&evntId=0034971468&evntdowngbn=Y&indpnId=0000003877&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3년 12월 24일부터 1926년 9월 28일까지 3,500엔의 세액을 내고 자가용[[탁주]]제조면허를 취득하여 탁주 제조에 종사했다.[[http://db.history.go.kr/id/gb_1926_09_28_a42320_0320|#]] 이후 1945년 1월 22일, 해방 7개월을 앞두고 별세하였다. 199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단양 우씨]][[분류:연천군 출신 인물]][[분류:1893년 출생]][[분류:1945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