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부여]]의 왕족 == [include(틀:백제의 시조)] ---- ||<:> '''[[성씨]]''' || 해(解) / 우(優)(?) || ||<:> '''[[이름]]''' || 우태(優台) / 태(台)(?) || ||<:> '''생몰''' || 미상 || ||<:> '''[[조부]]'''('''[[조상]]''') || [[해부루]] || === 개요 ===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 기록 중 '''비류 시조설'''에 등장하는 [[북부여]]의 왕족이다. 《삼국사기》의 [[비류]] 시조설에서만 등장한다. 고려 때 쓰인 《[[삼국사기]]》에 시조가 [[온조]]와 [[비류]]로 나오는 계통이 다른 전승이 남아있다. 온조 설화보다 비류 설화에서 주로 우태가 강조된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1)|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 상세 === 비류 시조설의 전승에 따르면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는 [[동명성왕]] 고주몽이 아닌 우태라고 하며, 우태는 부여왕 [[해부루]]의 서손(庶孫)이라고 한다. 우태는 [[졸본]]의 연타발의 딸 [[소서노]]와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으며, 일찍 죽어 소서노는 [[과부]]로 살다가 이후 주몽과 재혼했고, 주몽은 비류와 온조를 친아들처럼 대했지만 비류는 이복형인 [[유리명왕]] 고유류가 태자가 되자, 어머니 소서노를 모시고 동생 온조와 함께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 백제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구태]] 시조설'''을 제외한 '''온조 시조설'''을 비롯한 다른 기록들은 모두 백제 왕족은 고구려 동명성왕 고주몽의 후손이라 기록하고 있기에, 비류만 부여 왕족인 우태의 아들이고 온조는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아들이라고 보는 가설도 있다. 또는 소서노가 우태 사후 주몽(추모)에게 재가했다는 기록에서 [[형사취수]]를 연상해 우태와 추모는 사실 형제관계였을 것이라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이외에도 같은 [[해부루]]의 서손인 [[갈사왕]]과 동일인물일 가능성도 있다. 비류 시조설은 사실 11대 [[비류왕]]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것이라 보는 가설이 있다. 이에 따르면 해부루의 후손 우태와 그 아들인 비류는 비류왕을 모델로 했으며, 해모수의 후손 고주몽과 그 아들인 온조는 13대 [[근초고왕]]을 모델로 했는데, 근초고왕이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 나라를 강성하게 하여 근초고왕이 자리를 아예 굳히게 되자 계보도를 재구성하면서 온조 시조설이 비류 시조설을 흡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모티브와 모델을 엉뚱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 의미 전달이 잘 안되므로 수정이 필요해보인다. 가령 문단을 해석해보건데 비류왕이 비류설화를 작출해 냈고 추후 비류왕을 근초고왕이 밀어내며 근초고왕이 온조의 설화를 작출해냈다는 것이 된다는 의도로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기초적인 작문레벨에서 망가져있는 글이라 이러한 해석도 원저작자의 의도와 다른 해석일 수 있으니 잘 아는 이의 재작성이 필요한 문단. 백제 역사에서 '우씨(優氏)'로 보이는 인물들은 8대 고이왕 대 내법좌평 우두(優豆), 고이왕의 동생 [[우수(백제)|우수]](優壽), 11대 비류왕 대 왕의 동생이자 반란자인 [[우복]](優福), 25대 [[무령왕]] 대 달솔(達率) 우영(優永) 등으로 주로 '''고이왕계'''가 세력이 있을 때 집중되어 있는데 이에 근거해 고이왕계는 사실 왕성이 우씨(優氏)로 온조왕계의 부여씨(扶餘氏)와는 다른 왕가였을 거라는 가설도 있다. 위와 같이 우태를 실존 인물로 보는 견해 외에도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구려]]의 관직인 [[우태]]와 동일시하여 후대에 만들어진 '관념상의 시조'로 보는 견해가 있다. 우태의 출자가 부여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백제가 고구려에게 세력이 밀리던 16대 [[진사왕]]과 17대 [[아신왕]] 시대를 지나면서 백제 내부에서 반[[고구려]] 및 [[부여]] 계승 의식이 확실하게 정립되었다고 본 것이다. 21대 [[개로왕]] 때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강 유역과 경기도 북부 지역을 잃자 고구려와의 연계를 부정하기 위한 가상의 시조, 우태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부여와 격렬한 투쟁을 벌였던 고구려 또한 동명성왕 고주몽이 일단 부여에서 태어났다고는 해놨지만 부여의 후예라는 것은 완전히 부정하고, 독자적인 계통의 천손임을 주장했다. === [[구태]]와의 관계 === 중국측 사서에 기록된 백제의 구태 시조설에 대한 다른 시각도 있다. 구태와 우태는 둘다 부여의 인물이지만, 활동 시기가 다른 인물이며 백제 측에서 자신들의 출자를 중국측에 소개할 때 자신들의 시조가 우태임을 강조하다가 중국측에서 잘못 받아 적어서 우태=구태로 인식하였고 백제의 시조가 구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시, 년도나 활동시기에서 다소 의심스러운 부분도 해소될 수도 있고,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 [[고구려]]의 관직 == [include(틀:고구려의 관직)] 고구려의 관직 중에 하나. 서기 68년([[태조왕]] 16년) 8월에 [[갈사국|갈사]]왕의 손자 [[도두]]가 고구려로 투항하는데, 그가 고구려의 첫 우태(于台)가 된다. 이후 132년(태조왕 80년) 7월에 관나(貫那) 우태 미유(彌儒)와 환나(桓那) 우태 어지류(菸支留)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191년 4월에는 [[유리왕]] 때의 대신 을소(乙素)의 후손[* 원문은 孫이나, 시간차를 봤을 때 손자일 가능성은 아주 작다.]인 서압록곡(西鴨淥谷) 좌물촌(左勿村) 사람 [[을파소]](乙巴素)가 우태로 임명되지만, 을파소 본인의 권유로 더 높은 관작인 국상으로 임명되었다. 230년 7월에는 우태 [[명림어수]](明臨於漱)가 국상이 되었다. 따라서 우태{于台(優台)}는 나(那, X나부) 내 한 집단의 장(長)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도두도 나(那) 내에 편입된 우태로 볼 수 있는데, 이전에 대소왕의 사촌동생이 안치되었던 연나부(掾那部) 또는 계루부 이전의 전왕족이었던 연나부{涓奴部, 혹은 소노부(消奴部)} 내에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출처 이장웅, (2016). 百濟 始祖 仇台·沸流 傳承의 성립과 高句麗·公孫氏 관계, 55, 5-33.] [[분류:동음이의어]][[분류:부여의 인물]][[분류:백제의 왕족]][[분류:고구려의 관직]] [include(틀:포크됨2, title=우태, d=2022-07-13 01: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