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려사)] [목차] == 개요 == 禹玄寶 [[1333년]] ~ [[1400년]] [[여말선초]]의 인물. 본관은 [[단양 우씨|단양]](丹陽), 자는 원공(原功). 우길생(禹吉生)의 아들이자 '''태종 이방원의 스승.''' == 생애 == 충청도 [[단양군]] 사람으로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해 춘추검열이 되고 여러 차례 승진해 집의가 되었으며, 좌사의대부를 지낼 때 [[윤소종]]이 김흥경, 김사행, 김광대 등의 간신들을 탄핵하자, 우현보는 윤소종이 직무를 게을리한다는 핑계로 윤소종을 탄핵해 축출시켰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여러 차례 내린 법령들을 다시 살펴보고 이를 시행하라는 상소를 올렸지만 시행되지 않았으며, [[우왕]] 초에는 밀직대언, 제학, 동지밀직사사 겸 대사헌 등을 지냈고, 우왕의 유모 장씨가 제사지낼 때 우왕이 금주령 때문에 산신에 제사지내는 것에 대해 묻자 술을 신에게 바친다는 증명서를 받으면 가능할 것이라 했다. 정당문학 겸 대사헌이 되었다가 옮겨서 문하찬성사, 삼사좌사, 찬성사 등을 역임하고 순충익대좌리공신의 호를 하사받았으며, 1388년에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고 우시중에 임명되었다가 며칠 만에 파직되고 단양부원군에 봉해졌다. [[공양왕]]이 즉위한 이후로는 [[태조(조선)|이성계]]의 반대파에 해당되어 [[정몽주]]와 당여를 만들었다는 것으로 인해 옥사가 일어날 때 무고되었는데, [[김저]]의 옥사가 일어날 때 진술 중에 우현보의 이름이 나와 그를 죽이거나 가산을 적몰하라는 상소가 올라왔지만 관직을 그만두는 선에서 끝났다. 윤이, 이초의 옥사 때 체포되어 공양왕이 그를 처벌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상소가 계속 올라오자 어쩔 수 없이 공양왕이 우현보를 철원으로 유배보냈는데, 얼마 못 가서 사면되어 단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정몽주가 살해당하고 김진양 등이 국문당할 때 우현보의 이름이 나왔고 도평의사로부터 체포되어 유배되었으며, 우현보는 '여러 번 죄를 짓고도 지나치게 용서를 받았고 그 죄질이 크다'는 상소가 올라와 계림으로 옮겨져 유배되었다. 그러나 우현보를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먼 곳으로 유배되어 다시는 등용되지 못하는 조치를 받았다. 고려가 멸망하고 1392년에 조선이 세워지자 7월 30일에 우현보는 해양으로 옮겨져 유배되었으며, 10월 12일에는 외부 지역에 아무 때나 살게 하는 조치를 받았다가 1396년 10월 1일에 사면되고 복권되어 재산을 돌려받았다. 1399년에는 단양백에 봉해졌고 1400년 1월 28일에 이방간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려 하는 것을 아내와 제자 이래로부터 듣고 이방원에게 이를 알리면서 2월 13일에 추충 보조 공신의 호를 받았으며, 11월 1일에는 전지 70결을 하사받고 11월 13일에 사망했다. == 여담 == [[태조(조선)|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건국하는데 앞장선 [[정도전]]과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정도전의 어머니가 고려말기쯤 우현보의 집안에서 일하던 여종의 피가 섞여있어 이에 트라우마가 있던 정도전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 조선개국에 반대한 반 역성혁명파의 유력 인사들을 처리하던 중 이 원한에 대한 앙갚음으로 우현보의 다섯 아들들 중에서 세명을 장살[* 한마디로 때려죽이는 벌. 정황상으로 보면 곤장형. 이 사건 이후 부터 대대로 지금까지 우가는 정씨와 혼인 하지말라고 가르친다.]시켜 끔찍하게 죽여버렸다. 다만 정도전 관련이 아니더라도 그의 행적을 하나씩 살펴보면 문제가 아예 없지는 않다. 상술한 윤소종이 간신배들을 탄핵했을 때 오히려 윤소종을 축출했고, 심지어 당시 집권층인 이인임 일파의 권세가 극에 달했을 때에는 국왕인 우왕 대신 이인임 패거리였던 [[염흥방]]이 자기 멋대로 국사를 독단으로 처리하는데 끼어서 함께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 외에도 최영의 무리한 [[제2차 요동정벌]]을 말리지 않았으며, 나중에 시행되는 토지제도 개혁([[과전법]])을 반대하는 데 동참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더욱이 정도전이 오히려 학계에서 긍정적으로 재평가되고 사극에서도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분위기에 따라 우현보는 사극에선 등장하더라도 비중은 그리 크지 않지만, 정도전의 반대편에서 상술한 그의 혈통을 가지고 그를 조롱하며 음해하고 모욕하는 식으로 깎아내리고 반대하는 등, 부정적인 인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와 KBS의 [[정도전(드라마)|정도전]] 모두 다 그랬다. 일례로 정도전에서는 당시는 폐단이었던 사전(私田)이 [[태조(고려)|태조 왕건]] 이래의 아주 거룩한 제도라도 되는 것처럼 말[* 35회에서 [[조준(정도전)|조준]]과 대담을 하는데 전제 개혁안의 수용하라는 그의 요구를 물리치면서 "사전은 태조 대왕 이래로 유지돼 온 고려의 숭고한 가치이자 혼입니다"라고 발언한다. 우현보의 대사를 아무 생각 없이 들으면 사전이 정말 매우 위대한 제도인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들 지경이다. 우현보 역의 배우 [[심우창]]이 노련한 연기력으로 해당 대사를 읊으니 괜히 거룩하게 들리는 면도 있다. 참고로 심우창은 과거 [[태조 왕건]]에서 [[염상(고려)|염상]] 역을 맡기도 했다.]한다. 반면에 우현보는 이방원, 즉 훗날의 '''[[태종(조선)|태종]]'''이 존경하는 스승이기도 하였다.[* 논문 <태종 집권기 동년 급제자들의 관직 활동과 동년에 대한 태종의 인식> -전세영- ] 태종 이방원이 2차 문과 과거에서 급제했을 때 과거를 관장하는 지공거(고시관) 직책을 우현보가 맡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려의 과거제도는 과거 급제자들이 과거를 관장하는 지공거를 맡은 고위 관료들과 일종의 피후원(문생) - 후원자(좌주) 관계를 맺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래서 이런 피후원 - 후원 관계는 같은 당여로까지 발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양왕]] 때 이색과 정몽주와 더불어서 우현보가 고려수호파의 핵심으로 갑자기 대두된 이유는 우현보를 좌주로 따른 문생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색과 정몽주는 우현보 이상으로 문생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 세 거물의 문생들이 고려수호파의 마지막 핵심세력이 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방원 또한 우현보의 문생이었기 때문에 이색이 숙청당하고 정몽주가 참살당해서 고려수호파가 정치적으로 궤멸당하는 상황에서도 우현보는 가벼운 유배형인 경외종편에 그치는 행운을 얻었다. 이후 우현보는 [[2차 왕자의 난]] 때 [[이방간]]의 음모를 재빠르게 이방원에게 알리는 공을 세우고 얼마 못가서 사망하였는데, 이방원은 스승의 예로 각별하게 우현보의 죽음을 기렸고 우현보의 자손들을 우대하였다. 참고로 이방원은 [[이숭인]]의 문생이기도 하였는데, 1차 시험인 진사시의 지공거가 바로 이숭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숭인에 대해서도 이방원은 스승으로 모셨다.[* 이숭인이 전에 임술년 성균시를 관장한 적이 있었는데 태종이 그 시험에서 급제하였다. 태종이 감반(甘盤)의 옛 고사를 생각하여 추증하여 봉증(封贈)을 더하고 그의 두 아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문집도 간행하여 세상에 내놓도록 하였다. - 전녹생의 야은일고(野隱逸稿)] 공교롭게도 우현보와 이숭인 모두 정도전과는 악연으로 얽혀있었고, 우연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죽었다.[* 다만 유배형으로 끝난 우현보와 달리 이숭인의 최후는 굉장히 처참한데, 목은 [[이색(고려)|이색]]의 수제자이자 '고려사은'이라 불릴 정도로 고려수호파에서 적극적으로 가담했었기 때문이다. 이방원의 또 다른 스승인 원천석의 경우 일찍이 이색과 교류하곤 했으나, 천운인지 불행인지 고려 말 통탄스러운 정치로 인해 일찍이 사직하여 산에 은거했기에 동란을 피할 수 있었다.] [[분류:고려의 인물]][[분류:단양 우씨]][[분류:1333년 출생]][[분류:1400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