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진서)] [목차] == 개요 == 袁瓌 생몰연도 불명 [[서진]] 및 [[동진]]의 인물. 자는 산보(山甫). 예주 진군 양하현 출신. [[위(삼국시대)|조위]] 시기 낭중령을 지낸 원환(袁渙)의 증손자.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일찍 요절하여 기록이 없다. == 생애 == 서진 말기에 원괴는 동생 [[원유(동진)|원유]]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강회(江淮) 일대의 현으로 피난가고, 여현(呂縣)의 현령에 임명되었다. 이후 강도(江都) 현령으로 전임되었으나, 원괴가 더 남쪽으로 내려가 [[원제(동진)|낭야왕 사마예]]에게 귀순하니, 사마예는 그를 단양현령으로 삼았다. 건무 원년(317년) 3월, 낭야왕 사마예가 진왕(晉王)에 등극하고 동진 정권을 세우자, 원괴는 봉조청에 제수받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치서어사로 옮겨졌다. 당시 동해왕 [[사마월]]의 시신은 [[석륵]]에 의해 불 타 없어졌는데, 동해왕비 배씨(裴氏)는 동진 조정에 저승에 있는 사마월의 혼을 불러들여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허락해달라 청했다. 동진 조정은 배씨를 의심하면서 결정을 보류하던 중, 원괴는 박사 부순(傅純)과 의논하여 강령술에 의한 장례는 이른바 "매신(埋神)"이라는 금기라 허락해서는 안 된다 주장했다. 사마예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배씨에게 사마월을 기리는 장례는 허용하되, 혼백을 불러서 장례를 치르는 건 금지했다. 이후 원괴는 여강태수, 대장군 [[왕돈(동진)|왕돈]]의 자의참군, 임천태수를 역임했다. 태녕 2년(324년) 8월, 왕돈의 반란이 모두 평정된 후, 진남장군 변돈(卞敦)의 군사(軍司)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사직하고 회계(會稽) 땅을 유람했다. 함화 3년(328년) 5월, 역양내사 [[소준(동진)|소준]]의 반란으로 도성 건강(建康)이 반란군의 손에 넘어갔다. 회계내사 [[왕서]]가 소준을 토벌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자, 원괴도 의병에 참가해 반란군과 싸우니, 그 공을 인정받아 장합향후(長合鄉侯)에 봉해지고 산기상시에 임명되었다. 이후 대사농을 거쳐, 국자좨주에 제수받았고, 산기상시 직책은 전과 같이 하였다. 함강 3년(337년) 정월, 왕돈, 소준 등의 연이은 반란으로 동진은 황폐해졌고, 설상가상으로 [[후조]]의 실권자인 중산왕 [[석호(후조)|석호]]가 호시탐탐 변경을 어지럽히면서 백성들은 불안에 떨었다. 이러한 국가적 혼란에 더해 귀족 지배층 사이에서 [[현학]]이 널리 유행하면서 유학의 예교를 쇠퇴시키자, 원괴는 [[성제(동진)|성제 사마연]]에게 태학을 설립해 유학자들이 그곳에서 제자를 양성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박사에게 벼슬을 더해 뭇 관리들이 유학을 존중하게 할 것을 건의했다. 성제는 그의 말대로 시행했으나, 이미 널리 퍼져버린 현학의 영향력에 때문에 유학은 동진에서 주류 학문으로까지 자리잡지는 못 했다. 원괴는 여러 해가 지나도록 성제를 모시다가 노령을 이유로 은퇴를 구했다. 그리고 이내 사망하니, 광록대부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공(恭)'. 아들 [[원교(동진)|원교]]가 후사를 이었다. [[분류:서진의 인물]][[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진군 원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