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467년 사망]][[분류:진군 원씨]] [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2> '''{{{+1 袁式[br]원식}}}''' || || '''시호''' ||숙후(肅侯) || || '''작위''' ||양하현자(陽夏縣子) || || '''성''' ||원(袁) || || '''이름''' ||식(式) || || '''자''' ||계조(季祖) || || '''생몰''' ||? ~ 467년 || || '''부친''' ||원연(袁淵) || || '''본관''' ||진군(陳郡) 양하현(陽夏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동진]], [[북위]]의 관료로 자는 계조(季祖). == 생애 == 진군(陳郡) 양하현(陽夏縣)을 본관으로 하는 진군 원씨 출신으로 [[후한]]의 사도(司徒) [[원방(삼국지)|원방]]의 후손이었다. 원식의 아버지 원연(袁淵)은 [[효무제(동진)|효무제]]의 치세에 시중(侍中)을 지냈다. 원식은 동진에서 무릉왕(武陵王) [[사마준(동진)|사마준]]의 자의참군(諮議參軍)을 지냈다가 415년 사마문사 등과 함께 [[후진(오호십육국시대)|후진]]의 [[요흥]]에게 귀순하였다. 417년, 동진의 [[무제(유송)|유유]]가 후진을 멸하자, 원식은 다시 [[북위]]로 망명하여 상객(上客)이 되었고 양하현자(陽夏縣子)에 봉해졌다. 원식은 사도 최호와 만나고 그와 친교를 맺었다. 이때 조정의 의례와 제도는 모두 최호가 주관하고 있었는데, 최호는 원식이 고사에 정통하다고 여겨서 제도의 초안을 만들 때마다 항상 원식에게 자문을 구했다. 원식은 비록 동진에서 망명했지만 청빈하게 생활하고 법도를 따랐으며, 선비의 절개를 잃지 않아서 당시 사람들이 원식을 공경하여 원자의(袁諮議)라고 불렀다. 433년, 위대장군(衛大將軍) 낙안왕(樂安王) 탁발범이 옹주자사(雍州刺史)로 부임할 때 원식과 중서시랑(中書侍郞) 고윤을 모두 탁발범의 종사중랑(從事中郞)으로 삼았으나, 원식은 이를 사양하여 면직되었다. 원식은 침착하고 절도를 지켰으며, 평소에 많은 서적을 읽었고 삼창(三倉)이나 [[이아]](爾雅)에 더욱 열중했다. 원식은 자석(字釋)을 지으려고 했으나 착수하지 못하고 467년에 죽었다. 사후 예주자사(豫州刺史)로 추증되고 숙후(肅侯)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