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FFD700>[[고려청자|https://67.media.tumblr.com/d0ab98e78c55c6369f20b702ab560e77/tumblr_o9zoipyqmm1sqk8veo5_r2_400.png?width=50]][br] '''{{{+1 [[고려/왕사|{{{#800080 고려의 역대 국왕}}}]]}}}''' || ||<:> 23대 [[고종(고려)|고종]] 왕철 ||<:> {{{+1 ←}}} ||<:><#FBEC5D> '''{{{#black 24대 원종 왕정 }}}''' ||<:> {{{+1 →}}} ||<:> 임시국왕 [[영종(고려)|영종]] 왕창 || ||<:> 임시국왕 [[영종(고려)|영종]] 왕창 ||<:> {{{+1 ←}}} ||<:><#FBEC5D> '''{{{#black 24대 원종 왕정}}}'''(복위) ||<:> {{{+1 →}}} ||<:> 25대 [[충렬왕]] 왕거 || ||<:> '''[[묘호]]''' ||||<:> '''[[원종]](元宗)''' || ||<:> '''[[시호]]''' ||||<:> [[충경왕|충경]]순효대왕[br](忠敬順孝大王) || ||<:> '''[[능묘]]''' ||||<:> 소릉(昭陵) || ||<:> '''[[성]]''' ||||<:> 왕(王) || ||<:> '''[[휘]]''' ||||<:> 전(倎)/정(禎) || ||<:> '''[[자(이름)|자]]''' ||||<:> 일신(日新) || ||<:> '''[[왕후]]''' ||||<:> [[정순왕후 김씨(고려)|정순왕후]](靜順王后) || ||<:> '''[[부왕]]''' ||||<:> [[고종(고려)|고려 고종]] || ||<:> '''모후''' ||||<:> 안혜왕후(安惠王后) || ||<:> '''종교''' ||||<:> [[불교]] || ||<|2><:> '''생몰년도''' ||<:> 음력 || 1219년 3월 19일 ~ 1274년 6월 18일 || ||<:> 양력 || 1219년 4월 5일 ~ 1274년 7월 23일 (56세) || ||<|2><:> '''재위기간''' ||<:> 음력 || 1259년 6월 30일(임인일) ~ 1269년 6월 21일(1차)[* 당시 무인집권자였던 [[임연]]이 정치적 갈등 끝에 원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그의 동생이었던 안경공 창을 영종으로 옹립시켰다. 그러나 원의 개입으로 5개월만에 복위된다.] [br] 1269년 11월 ~ 1274년 6월 18일(2차) || ||<:> 양력 || 1259년 7월 21일 ~ 1274년 7월 23일(15년 2일) || [목차] == 소개 == [[고려]]의 제24대 왕. 자는 일신(日新). 휘는 정(禎). 본래 휘는 전(倎)으로 고종의 장남이다. 시호는 순효대왕(順孝大王)으로 원이 준 시호는 [[충경왕]](忠敬王). 고려 왕사에서 종(宗)의 묘호를 받은 마지막 임금이다. 휘에 대해선 [[고구려]]의 [[고국원왕]]과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원종이 백승현(白勝賢)의 주청대로 자신의 휘를 고대 주나라의 성군 강왕(康王)의 이름자랑 같게 바꾸려다 하필 그 이름이 '''제 명에 못 죽은'''[* [[고려사절요]]에 실제로 사용된 표현(不得其死)이다.] 고국원왕의 휘와 같다는[* 주 강왕과 고국원왕은 모두 이름이 쇠(釗)이다.] 걸 알고 '''기겁해서 그냥 옛날 이름 그대로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태자 시절 == [[몽골 제국]]과의 전쟁 중이던 1235년 태자에 책봉되었고 1259년 기나긴 몽골과의 전쟁 끝에 강화를 맺기 위해 '''태자 신분으로 몽골에 가, 당시 몽골의 실력자이자 화북지방의 총독이었던 [[쿠빌라이 칸]]을 만났다.''' 본래는 [[사천성]] 방면에서 원정 중이던 [[몽케 칸]]을 만나러 가던 길이었는데, 몽케가 전쟁에서 급사하는 바람에 칸위가 공백이 되었다. [[중국]] 화북에 있던 쿠빌라이와 몽골 초원 [[카라코룸]]을 지키던 [[아리크부카]] 사이에 칸위 계승 분쟁이 벌어졌고 고려 태자 일행은 둘 중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처했다. 어찌보면 [[한민족]]의 운명을 갈랐다고 할 수 있는 이 선택에서 태자는 쿠빌라이를 택한다. ~~[[신의 한 수]]~~ [* 물론 사료에서는 쿠빌라이를 선택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사천 육반산에서 아리크 부카가 있는 몽골 초원과는 반대 지역인 카이펑 쪽으로 움직였다는 것만 봐도 쿠빌라이를 선택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쿠빌라이는 기뻐하며 "고려는 머나먼 나라로 그 옛날 [[당태종]]이 쳐도 굴복시킬 수 없었던 나라였는데 지금 그 나라의 태자가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물론 이는 우리가 아는 [[고구려]]를 말하는 것인데 사실 고구려도 [[장수왕]] 때 국호를 고려로 바꿔서 멸망할 때까지 사용했으니 그 고구려와 이 고려는 이름도 고려국으로 같은 걸 후대 사람들이 구분을 위해 앞의 고려를 시기에 관계없이 이름을 고구려로 통일했을 뿐이다. 쿠빌라이 입장에선 이 고려 태자의 방문을 반길 수 밖에 없었다. 칸위를 놓고 대립하는 상황에서 수십년간 전쟁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고려가 스스로 자신의 진영을 찾아와 제후국을 청하면서 명분에서 크게 앞설수 있었기 때문이다. [[http://news.joins.com/article/9294940|# 내용 참조]] 쿠빌라이는 태자를 크게 환대하고 강화를 논의했으며 때마침 고종이 사망해 고려 국왕도 공석이 되자 쿠빌라이는 원종을 국왕으로 책봉해 고려로 보냈다. 그리고 향후 고려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한 가지 약속을 하게 된다. 바로 불개토풍(不改土風). 고려는 몽골의 속국이 되더라도 고유한 풍습을 고치지 않아도 된다는 선언이었다. 이 약속은 세조구제(世祖舊制)라고도 불리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쿠빌라이(세조)의 유훈이라서 후대의 칸들도 건드릴 수 없었다. 동양 왕조, 특히 유교 문화권에서는 선대 군주의 제도나 유훈은 함부로 거스를 수 없었다. 특히 태조나 세조처럼 왕조에서 중요한 임금들의 유훈은 거의 불문법 역할을 했다. 덕분에 고려는 원의 간섭을 받는 한편으로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긍정적으로만 사용된 건 아닌데 권문세족의 기득권 유지 명분으로 자주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원 간섭기에는 모수사패와 압량위천을 통한 농장의 확대와 양인 수 감소가 심각했는데 노비제 개혁을 통해 이를 개선하기 위해 원에서 환리길사라는 관료를 파견했을 때 권문세족이 노비제 개혁을 저지시킨 명분이 바로 이 세조구제였다. '''노비제는 동국(고려)의 고유한 습속이니 세조의 유훈에 따라 바꿀 수 없다'''는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결국 제대로 된 개혁 목소리가 나온 건 공민왕 시기였다. [[http://leekihwan.khan.kr/306|참조]] == 재위 기간 == 원종이 즉위할 무렵은 그 기나긴 무신 집권기가 끝나던 시기로 최씨 정권의 마지막 수장 최의가 살해되고 새로운 실권자인 [[김준(고려)|김준]]이 집권하던 시절이다. 사실 원종이 몽골에 입조하고 있을 때 고종이 죽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에 있어서 위험할 뻔했다. 바로 김준이 원종의 동생인 안경공 창을 왕위에 올리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종의 유언에 의해 고려에 남아 있던 태손 심[* 원종 사후 [[충렬왕]]으로 즉위한다.]이 왕위를 대신하게 만들었고, 결국 이듬해에 몽골과 강화를 맺고 돌아와서 정식적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1269년 태자 심을 몽골로 보내 친몽 정책과 개경 환도를 시도하다가 김준을 죽이고 무인 집정자가 된 [[임연]]에 의해 일시적으로 폐위되었다. 이때 잠시 즉위한 것이 이전에도 왕위에 거론이 되었던 안경공 왕창. [[영종]] 항목 참조. 그러나 마침 귀국 중이었던 태자 심이 이 소식을 듣고 몽골로 다시 돌아가 쿠빌라이에게 이 소식을 알리게 되었고, 결국 다시 복위하게 되었다. 그리고 몽골로 가서 직접 쿠빌라이와 만나서 일의 자초지경을 알리게 되고 동시에 몽골의 황족과 세자 심과의 혼인을 추진하게 된다. 그리고 개경 환도를 시도하게 되는데, 때 마침 임연이 병으로 죽고 새롭게 집정자가 된 임연의 아들 [[임유무]]를 그의 측근인 홍문계, 송송례를 회유하여 결국 죽이게 하는데 성공하고 무신정권을 무너뜨린다. 그 후 귀국과 동시에 개경 환도를 하게 된다. 하지만 서경(평양)에서는 최탄 등이 또 반란을 일으켜 서경을 비롯한 북계의 54성과 자비령 이북 서해도의 6성을 들어 [[원나라]](쿠빌라이가 원나라라는 국호를 쓴 것은 1270년)에 투항하고 말았는데 이 때 원은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여 이 지역을 직할통치하기에 이른다. 원종은 이를 돌려달라고 계속 쿠빌라이에게 요구했으나 쿠빌라이는 이를 듣지 않아 결국 원종이 죽을 때까지 이 영토를 돌려받지 못한다. 이 지역은 1290년 충렬왕 시대에 돌려받는다. 어쨌든 개경으로 환도했으나 근본적으로 무신 정권의 친위대였던 [[삼별초]]가 고려 정부의 친원 정책에 반발하여 결국 배중손을 중심으로 강화도에서 봉기하여 진도와 제주도를 전전하며 원나라와 고려에 저항했다. 이들은 왕족 승화후 왕온을 즉위시키고 서해, 남해안을 전전하며 막강한 해상세력을 구축했다. 또한 고려를 거점으로 한 일본 원정에 쓰일 함선을 파괴하기도 했는데 이는 이 함선들이 자신들을 토벌할 때에 쓰일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결국 원나라의 흔도와 고려의 김방경을 위시한 여몽연합군에게 토벌되었다. 이 외에도 일본 공격 방침을 세운 쿠빌라이의 요구로 고려는 일본 원정을 위한 함대를 만드는 데 국력을 쏟아부었으며 또 '결혼도감'을 설치에 원나라로 가는 공녀를 모집하기 시작하여 백성들의 원망과 한탄이 극에 달했다. 실로 안습으로 향하던 시기로 이를 지켜보다가 1274년 향년 56세로 승하했다. 고려의 정식 묘호인 '종'을 쓴 마지막 군주가 되었으며 이후의 왕들은 30대 [[충정왕]]까지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모두 '충(忠)'자를 붙이게 되었다. 원종 생전에 [[충경왕]](忠敬王)'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그의 아버지 고종은 충헌왕(忠憲王) 시호로 다시 올렸다. 또 '[[태자]]'가 '[[세자]]'로, '[[짐]](朕)'이 '[[고]](孤)'로, '[[폐하]]'가 '[[전하]]'로 바뀐 것도 원종 때가 시작으로, 왕실의 칭호가 모두 격하된 시대가 바로 이 때다. 이렇게 제후국의 격으로 격하된 칭호들은 이후 500년이 지난 1894년(조선 고종 31년) [[갑오개혁]] 때에 와서야 되돌려진다. 왕실의 칭호 뿐만 아니라 각종 관직명도 이전까지는 공후백자남 [[오등작]]을 썼지만 원종 이후로 격하된다. == 원 간섭기의 시작 == 원종 치세는 한국사의 한 '치욕'으로 남아 있는 '원 간섭기'를 연 시대이다. 그런데 정작 이후 고려 말이나 조선 사대부들의 평가를 보면 원종에 대해서는 동정적이다 못해 상당히 호의적이다. 무신 정권을 수습한 군주이고, 당시 몽골의 세력이 강했는데 원종은 치욕을 감수하고 나라의 보전을 꾀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이냐라는 식의 평가가 대부분. ~~[[청나라]]에 무작정 대항하다가 [[병자호란]] 맞고 털린 [[인조]]보다는 낫다는 맥락인가~~ 다소 의외인 대목일 수도 있지만 당대 세계 최강국인 몽골과 장기전을 벌였음에도 직할 통치를 면한 점 자체는 나름 인정해 줘야 할 부분이다. 쿠빌라이 칸이 약속한 "불개토풍(不改土風)"으로 고려는 고유 풍속을 유지하고, 자치국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이 세조의 유지를 이후의 몽골 칸들도 바꾸지 못하였다[* 다만 한국 학계에서 몽골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바꾸지 못한' 게 아니라 '바꾸지 않은'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실제로 몽골 제국은 고려뿐 아니라 다른 지방에서도 그 지방의 풍습을 대체로 인정해주었으며, [[일 칸국]] 같은 경우는 아예 페르시아의 종교였던 이슬람을 국교로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즉 왕조의 입장을 제하고 나면, 고려가 엄청난 특별대우를 받은 것은 아니다.]. 원종 또한 치욕임을 알았으면서도 더 이상의 전란으로 백성들을 더 고단하게 하기보다는 몽골에 복속하는 것을 선택한 점은 나름대로 백성을 생각했을지도 모르며 이 때문에 고뇌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뭐 거의 [[코버넌트]]하고 전쟁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일 정도로 수많은 왕조와 수도들이 몽골에 갈려버렸으니.~~ 사실 무신정권 주도 하에 벌어진 대몽항쟁은 말이 좋아 대몽항쟁이라고 불러줄 뿐이지 그 실상은 무신정권은 안전한 강화도에 앉아서 조세나 강탈해가고 본토의 백성들은 조세는 조세대로 뜯기고 몽골이 쳐들어오면 약탈당하고 학살당하는 게 일이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강화를 맺는 게 확실히 현명한 선택이긴 했다. 하다못해 쿠빌라이 칸 대신 다른 계승자를 지지했다면 작게는 고려 왕실, 크게는 [[한민족]] 전체의 존망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운이 따라준 감은 있지만 그의 이런 줄서기는 결코 그냥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 기타 창작물 ==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시리즈에서 등장한다. 능력치는 시대가 시대인지라 안습하다. ~~정치력, 외교력 좀 높여줘야하는 것 아닌가~~ 부하로는 [[김통정]], [[김방경]]만 있을뿐.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원종, version=13)] [[분류:고려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