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2> '''화산무왕(華山武王)[br]{{{+2 元鷙 | 원지}}}''' || || '''시호''' ||무(武) || || '''작위''' ||진양현남(晉陽縣男) → 창안현 개국후(昌安縣開國侯) → 화산군왕(華山郡王) || || '''성''' ||탁발(拓跋) → 원(元) || || '''휘''' ||지(鷙) || || '''자''' ||공작(孔雀) || || '''생몰''' ||[[473년]] ~ [[541년]] [[7월 17일]] || || '''출신''' ||대군(代郡) 평성현(平城縣) || || '''부친''' ||원굉(元肱) || || '''배우자''' ||공손증생(公孫甑生) || || '''자녀''' ||3남 || [목차] [clearfix] == 개요 == [[북위]]의 황족. 평문제 [[탁발울률]]의 후손. 기주자사 탁발굉의 아들. == 생애 == 체격이 건장하여 허리 둘레가 10위(圍)나 되고 강한 완력을 타고 나, 일찍이 우림대의 장부(仗副)에 임명되었다. 태화 20년(496년), 급사중으로 승진한 원지는 효문제의 정벌에 종군하여 여러 번 공을 세움으로써 진양현남(晉陽縣男)에 봉해졌다. 이후로도 누차 승진을 거듭해 직침(直寢), 직각장군(直閣將軍), 좌군장군(左軍將軍), 용양장군, 무위장군을 역임하였다. 희평 원년(516년), 산기상시, 무순6진대사(撫巡六鎮大使)에 임명되었다가, 은청광록대부로 옮겨지고 무위장군 직책은 이전과 같이 하였다. 정광 원년(520년), 금자광록대부로 승진하였다. 정광 2년(521년), 사지절, 도독유현회황무명3진제군사(都督柔玄懷荒撫冥三鎮諸軍事), 무군장군에 임명되고 유현진대장(柔玄鎮大將)으로 부임하였다. 정광 5년(524년) 12월, 분주(汾州)와 하주(夏州) 일대에서 산호(山胡)들이 들고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장무왕 원융(元融)을 파견해 이를 제압하려 했지만 원융이 역으로 패하면서 실패하였다. 이에 조정은 원지를 북중랑장으로 삼고, 무군장군 직은 전과 같게 하여 원융 대신 산호의 반란을 진압하게 하였다. 건의 원년(528년) 4월, 대장군 [[이주영]]이 하음의 변을 일으켜 호태후 등을 황하에 빠뜨려 죽이고, 군사들에게 명해 북위의 황족과 문무백관 2,000여 명을 살해하였다. 이때 이주영과 함께 높은 산꼭대기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원지는 이주영과 힘을 합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조정을 장악한 이주영은 원지를 정북장군에 임명하고 창안현 개국후(昌安縣開國侯)로 승작시켜주니 식읍이 800호에 이르렀다. 기존의 진양현남 작위는 셋째 아들 원계언(元季彥)이 이었다. 건의 원년(528년) 7월, 영군장군, 경기도독(京畿都督)으로 옮겨졌고, 그로부터 3달 뒤인 10월에는 좌위장군도 겸하였다. 영안 2년(529년) 10월, 하음의 변 당시 나라를 버리고 남조의 [[양(육조)|양나라]]로 망명했던 북해왕 [[원호(북위)|원호]]가 [[진경지]]의 7,000명의 군사와 더불어 북쪽으로 진격하며 질성(銍城)을 함락시켰다. 원호는 이어서 수양(睢陽)을 공격해 떨어뜨린 뒤 칭제하였고, 진경지는 형양(滎陽)을 함락시킨 뒤 기병 3,000명을 거느리고 상당왕 원천목(元天穆)을 대하여 호뢰(虎牢)를 손에 넣었다. 이로 인해 낙양(洛陽)이 크게 동요하자, 원지는 [[효장제]]를 모시고 북쪽으로 피신하여 하내(河內)로 들어갔다. 이때 원지가 상주하길, > "하내성은 낮에 문을 닫고 있다가 밤이 되어서야 문을 열어 저희들을 받아주었으니 그 뜻을 헤어리기 어렵습니다. 본래의 계획대로 지체없이 출발하길 원합니다." 라 하였다. 효장제는 원지의 말에 따라 바로 출발하여 장자(長子)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이주영이 협석(硤石)에서 원호의 군대를 대파했고 진경지는 병력을 모두 잃은 채 샛길로 도주했다. 외세를 끌어들이면서까지 반란을 일으켰던 북해왕 원호는 도주하다가 임영(臨穎)에서 일개 병졸에게 붙잡혀 참수당했다. 원호의 난이 진압된 후, 원지는 황제를 호위한 공으로 거기장군에 제수받고 화산군왕(華山郡王)으로 승작되었다. 영안 3년(530년) 9월, 효장제가 궁중에서 천주대장군 이주영과 상당왕 원천목을 주살하자, 이주영의 사촌동생 이주세륭(爾朱世隆)이 하내의 북중성(北中城)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키고 고도(高都)를 함락해 성 안의 모든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이주영의 조카인 분주(汾州)자사 [[이주조]] 또한 진양(晋陽)을 점거하고 난을 일으켜 장자에서 이주세륭과 세력을 합치고, 장광왕 원엽(元曄)을 황제로 옹립한 뒤, 서주(徐州)자사 이주중원(爾朱仲遠)을 보내 낙양성을 치게 하였다. 효장제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이주조의 세력을 치려 했으나, 내부에서 이주조와 내통하던 원지가 효장제를 말렸다. > "만 길이나 되는 황하를 어찌 빨리 건널 수 있겠습니까!" 효장제는 원지의 말이 일리있다 여겨 안심하였다. 영안 3년(530년) 12월, 이주조가 경무장한 병사들로 단곡(丹谷)을 돌파해 출발한지 이틀만에 낙양에 다다랐다. 이주조가 이렇게 빨리 올 줄 모르고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던 낙양성은 순식간에 함락당했고, 이주조가 병사들을 이끌고 낙양성 내로 입성하여 황궁으로 들어갔다. 이때 원지가 황궁의 근위병들을 통제한 덕에 이주조와 그 병사들은 황제가 있는 곳까지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고 진입할 수 있었다. 이렇듯 황제가 핍박당하고 도읍이 무너진 것은 모두 원지의 계략이었다. 이주조는 효장제를 진양으로 옮기고 삽급불사(三級佛寺)에서 황제를 목졸라 살해하였다. 진태 원년(531년) 4월, 원지는 시중, 상서복야, 표기대장군에 임명되었다. 영희 2년(533년) 4월, 한릉(韓陵)에서 이주조의 200,000대군을 전멸시켜 이주조 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고환(남북조시대)|고환]]이 [[절민제]]를 유폐하고 [[효무제(북위)|효무제]]를 황제로 세웠다. 원지는 사지절, 시중, 도독서주제군사(都督徐州諸軍事), 서주자사에 임명되었고 표기대장군 직은 전과 같았다. 천평 2년(535년) 3월, [[효정제]]가 원지를 수도로 소환하고 대사마로 삼았다. 원지는 힘은 쎘지만 과묵하고 말투가 어눌하였으며, 점잖고 충직한 성정을 지니고 있어 더운 여름 날 궁중에서 근무를 설 때도 의관을 벗지 않았다고 한다. 한번은 청하왕 고악(高岳)의 연회에 참석해 시중드는 일이 있었는데, 함양왕 원탄(元坦)이 술에 취해 제멋대로 굴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모두 그의 권세가 두려워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있었다. 그때 원탄이 원지에게 다가가 말했다. > "늙은 무관 공작(孔雀)아, 너는 어떻게 왕작을 얻었느냐?" 원지가 즉시 답했다. > "반란자 원희(元禧)의 목을 참수하여 얻었다네." 함양왕 원희는 원탄의 아버지로, 효문제 재위기에 역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사사당한 인물이었다. 이에 좌중의 사람들이 대경질색하여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원지는 신경쓰지 않고 유쾌하게 연회를 마저 즐겼다. 흥화 3년(541년) 6월 9일[* 양력으로 계산할 시 7월 17일.], 원지가 사망하니 그의 나이 69세였다. 원지의 장례는 업(鄴)의 무성(武城)에서 치러졌고, 사후 가황월(假黃鉞), 상서령, 사도공(司徒公), 도독정기영창4주제군사(都督定冀瀛滄四州諸軍事), 기주자사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무(武)'. 아들 원대기(元大器)가 화산왕 작위를 습작하였으나, 후에 상시 순제(荀濟)의 [[고징]]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가 상서사부 낭중 원근(元瑾) 등과 더불어 저잣거리에서 [[팽형]]당했다. 그 뒤에 화산왕 작위나 후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지만, 이 사건으로 북위의 황족 60명이 연루된 것을 감안하면 봉국이 삭제되고 멸족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분류:남북조시대/황족]][[분류:탁발선비]][[분류:다퉁시 출신 인물]][[분류:473년 출생]][[분류:541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