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백제 국왕)]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16b6b, #008080 20%, #008080 80%, #016b6b); color: #fbe673" '''백제 제27대 국왕[br]{{{+1 威德王 | 위덕왕}}}'''}}}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2016012117421002.jpg|width=100%]]}}} || ||<-2><#008080> {{{#fbe673 {{{-2 위덕왕릉으로 추정되는 부여 왕릉원 전경.}}}}}} || ||<|2> '''출생[br]{{{-3 (음력)}}}''' ||[[525년]] || ||[[백제]] [[웅진성]][br](現 [[충청남도]] [[공주시]]) || ||<|2> '''즉위[br]{{{-3 (음력)}}}''' ||[[554년]] [[7월 1일]] || ||[[백제]] [[사비성]][br](現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 ||<|2> '''사망[br]{{{-3 (음력)}}}''' ||[[598년]] [[12월]] (향년 72~73세) || ||[[백제]] [[사비성]][br](現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 || '''능묘''' ||[[부여 왕릉원#s-4.1.1|능산리 동하총]] (추정) || ||<|4> '''재위기간[br]{{{-3 (음력)}}}''' ||'''{{{#fbe673 백제의 태자}}}''' || ||[[553년]] 이전 ~ [[554년]] [[7월 1일]] || ||'''{{{#fbe673 제27대 국왕}}}''' || ||[[554년]] [[7월 1일]][* 《일본서기》에는 558년 봄 3월 경자(庚子) 초하루에 즉위했다고 나와있다.] ~ [[598년]] [[12월]] {{{-2 (45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부여(扶餘) || || '''휘''' ||창(昌) || || '''부왕''' ||[[성왕(백제)|성왕]] || || '''왕자''' ||[[아좌태자|부여아좌]][* 《일본서기》 기록.], --[[혜왕|부여혜]]--[* 《[[동국통감]]》, 《[[삼국사절요]]》에 따르면 차남. 그러나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왕(백제)|성왕]]'''의 차남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아들이라고만 나오고, 《[[일본서기]]》에서는 위덕왕의 동생이라고만 언급되며, 성왕의 몇 째 아들인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법왕(백제)|부여선]]--[* 《[[수서]]》. 그러나 이곳에는 [[혜왕]]이라고 누락되어 있다.], [[임성태자|부여임성]][* [[아좌태자]]와 동일인으로 보아 [[위덕왕]]의 아들로 간주하는 것이 더 유력하다.] || || '''종교''' ||[[불교]] || || '''시호''' ||'''위덕왕(威德王)''' || || '''별호''' ||창왕(昌王)[* 이름을 그대로 사용함.] || || '''관등''' ||간솔(杆率) ||}}}}}}}}} || [목차] [clearfix] == 개요 == [[파일:external/51fb76ed4c6d3d041bcbfff6482923d716f15caa922c80c08dcc49370eede438.jpg|width=600]] >"'''성은 같으며[* 시조인 [[온조왕]]이 건국설화에 의하면 [[부여]]의 후손 혹은 [[동명성왕]] 고주몽의 친아들 혹은 양아들이었기 때문에, 왕가가 같은 후손이란 뜻이다. 아니면 진짜 성이 같을 수도 있다. 고대 중국에서 '성'과 '씨'는 원래 다른 개념이었는데 그때 기준으로 고구려와 백제는 성(해)은 같고, 씨(고씨, 부여씨)가 다른 가문이 된다.] 관위는 간솔, 나이는 스물아홉이다.'''" >姓是同姓, 位是杆率, 年廿九矣 >---- >[[백합야 전투]]에서 고(구)려 장수와 일기토[* 고구려는 일기토를 벌일 때 [[나노리|깃발을 높이 세우고 적장의 이름을 묻는 것이 관례]]인 듯 한 기록이 《일본서기》에 남아있다.]를 벌이기 전 표를 세워 나눈 말. 《일본서기》 기록. [youtube(5eQqnsMie98)] [youtube(MrPXsql--Lk)] [[백제]]의 제27대 군주이자 [[어라하|건길지]].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왕(백제)|성왕]]의 왕자[* 《일본서기》에는 [[태자]]라고 서술했다.]이자 다음 왕이다. [[신라]]의 [[문무왕]]은 그를 '무덕왕(武德王)'이라고 불렀으며 성은 부여, 휘가 창(昌)으로 당대의 백제 [[금석문]]에는 '창왕(昌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백제의 다른 군주도 마찬가지로 고대 삼국은 [[피휘]]를 하지 않았기에 [[이름]]을 그대로 존호에 썼다. 지금 보면 이상하게 보이지만 [[온조왕]], [[의자왕]] 등 대부분이 이름에 왕만 붙인 형태였으며, [[신라]]와 [[고구려]] 역시 비슷하다. 근데 이 때문에 [[고려]] 말기의 [[창왕]]과 혼동되기도 한다.] 《[[일본서기]]》에서는 '여창'이라는 축약 표기로 나오는데 아버지 성왕과 함께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기>에 태자 시절의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오는 인물이기도 하다. 성왕과의 관계가 각별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자기 [[고집]]으로 인해 아버지가 관산성 전장 한복판에서 참수당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고, 그로 인해 평생 아버지를 사지로 내몰았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비운의 [[군주]]였다. 초기에는 상당히 호전적인 성격이었던 듯하다. 태자 시절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관산성 전투]]를 강행한 것은 물론이고, 이후 어렵게 즉위한 후에도 국력을 모아 561년 음력 7월에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하지만 결국 신라 진흥왕과 [[이사부]]에게 참패했고, 후속전으로 [[대가야]]까지 신라가 완전히 병합하자, 이후에는 철저한 현상 유지로 [[정책]]을 완전히 전환하여 거의 40년에 가까운 남은 여생 동안 아무런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덕분에 이 시기에 [[한반도]]는 실로 오랫동안 큰 전쟁이 없었던 [[평화]]기가 도래했다. 비교적 자세한 기록 덕분에 [[무령왕]]과 함께 백제 역대 군주 중 탄생년이 전해지는 몇 안 되는 왕인데 553년 [[백합야 전투]]에서 스스로 29세였다고 밝혔으므로 525년생이며, 죽은 해가 598년으로 나이가 일흔넷이니 백제의 역대 군주 중에서 그나마 장수한 경우이다.[* 백제 초기의 군주들은 생년이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제외.] 재위 기간도 554년~598년까지 총 45년으로 긴 편이다. 50년씩 재위한 군주가 많아 기년 [[조작]]을 의심받는 제8대 [[고이왕]] 이전까지의 대다수 초기 왕들을 제외하고는 가장 길다. 동시대 인물이자 위덕왕의 철천지 원수 [[진흥왕]]보다 나이가 9살이나 많다. 그리고 위덕왕은 진흥왕의 손자 [[진평왕]] 치세와 20여 년이나 재위 기간이 겹칠 정도로 장수했다. == 생애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1)|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 태자 시절 === 아버지 성왕을 도와 국정에 참여했고, 수도 [[사비성]]에 머무는 성왕을 대신해 [[한강]] 유역 탈환의 임무를 부여받은 북벌군을 진두 지휘했다. 그가 [[역사서]]에 첫 등장하는 것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553년의 [[백합야 전투]]다. 태자였던 부여창은 왜군과 가야군까지 이끌고 고구려군과 대치해 고구려 장수와 [[일기토]]를 벌여 승리를 거뒀고, 이에 사기가 오른 백제, 가야, 왜국의 연합군이 고구려군을 밀어붙여 격파했다. 기세가 오른 백제는 554년 신라 정벌론을 펼치기에 이르는데 태자인 부여창이 강경하게 나가자 많은 [[신하]]들이 반대했으나 결국 성왕이 신라 공격을 전격 승인해준다. 그리하여 벌어진 전투가 왜국과 가야를 끌여들여 일으킨 바로 오늘날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일어난 [[관산성 전투]]다. >(전략) >여창(餘昌)이 신라를 치고자 꾀하였다. 기로(耆老)들이 간하기를,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고 하였다. 여창이 말하기를, "'''늙었도다. 어찌 겁이 많은가?'''" 나는 대국(大國)을 섬기고 있으니,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가?라고 하고 드디어 신라국에 들어가 구타모라 요새를 세웠다. >그 아버지 명왕(明王)은 여창이 오랫동안 진영에서 고생하고 또 오래도록 잠과 음식을 폐하고 있을 것을 우려하였고, 아버지의 자애는 성글기 쉽고, 자식의 효성은 이루어지기 힘들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스스로 가서 위로하고자 하였다. >(하략) >---- >백제 사서를 인용한 《일본서기》 기록. 일본의 기록이기에 프로파간다를 엿볼 수 있다. 이때까지는 뛰어난 무용과 자신감 넘치는 차세대 유망주로 전성기의 [[근구수왕]]처럼 백제판 [[흑태자]]로 용명을 떨칠 수도 있었겠지만. 태자 부여창이 직접 선봉에 서서 관산성(管山城)[*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 공략에 나서고 우덕, 탐지가 이끄는 신라군에 승리를 거두며 초반 기세를 잡자, 아버지 성왕은 관산성을 공격하고 있던 태자를 독려하기 위해 병사 50명만 대동하고 밤길을 달려가다가, 북쪽 한강 유역에서 내려온 [[김무력]]이 이끄는 신라군에게 급습을 당해 전장 한복판에서 전사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처음에 부여창이 관산성 전투에서 한 번 승전하고, 성왕은 전후 수습을 위해 달려가다가 잡혔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참수된 채 전달된 왕의 시신을 받은 태자의 백제군 본대도 사기를 잃고, 전투에서 패배, 부여창의 부대 역시 포위되어 '''성왕 포함 4인의 좌평과 29,600명의 군사가 전사하는 큰 참화를 입었다.'''[* <김유신 열전>에서는 장수 4명과 10,000명이라고 되어 있다.] 포위당한 태자는 일본 지원군의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筑紫國造)[* 이 긴 명칭은 본명이 아니고 관직명이다. 《일본서기》에는 이 사람 말고도 또 한 명의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를 역임했던 이와이(磐井)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신라]]와 내통해 일본 본토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즉 위덕왕을 살린 사람과 다른 사람이다.]가 뛰어난 궁술로 분전해 신라군의 포위를 겨우 뚫었고, 태자는 샛길로 도망쳐 겨우 살아남았다고 한다.[* 위덕왕은 탈출한 뒤 자신을 살린 츠쿠시노 쿠니노 미야츠코를 칭찬해 '쿠라지노키미(鞍橋君)'[* 쿠라지는 고대 한국어로 어떤 존칭을 의미하는 걸로 보인다. 고대 한국에서 흔히 쓰인 ~지 형태의 존칭이기 때문. 뒤의 노는 연결사, 키미는 일본어 존칭이다.]라는 칭호를 내렸다고 한다.] === 즉위 === >(555년) 8월 백제 여창(餘昌)이 여러 신하들에게 “소자(少子)는 이제 돌아가신 부왕(父王)을 받들기 위하여 출가하여 도를 닦고자(修道) 한다”라고 말하였다. >여러 신하와 백성들이 "지금 임금께서 출가하여 수도하고자 하신다면 우선 왕명을 받들겠습니다. 슬프도다. 이전에 가졌던 생각이 바르지 못하여 후에 큰 근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누구의 잘못입니까. 무릇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가 다투어 멸망시키고자 하는 것이 나라를 연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고 있으니, 지금 이 나라의 종묘사직을 장차 어느 나라에게 넘겨주려하십니까. 무릇 도리는 왕명을 따르는 것이 분명한데, 만약 능히 늙은 노인(耆老)[* 60세 이상의 노인을 일컫는다.]의 말을 들었다면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습니까. 바라건대 앞의 잘못을 뉘우치고서 속세를 떠나는 수고로움은 하지 마십시오. 원하시는 것을 굳이 하고 싶으시다면 백성들을 출가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여창이 “좋다”고 대답하고는 곧 나아가 신하들에게 꾀하도록 하였다. 신하들은 마침내 상의하여 100명을 출가시키고 깃발과 우산 모양의 장식물(幡蓋)를 많이 만들어 여러가지 공덕을 행하였다고 운운하였다. >---- >《[[일본서기]]》 권 19 <[[긴메이 덴노|긴메이기]]> 성왕이 전장 한복판에서 갑작스레 최후를 맞았으니 태자 창이 뒤를 이어 왕이 되어야 하는 것은 자명했으나 창은 자신의 고집으로 인해 아버지와 함께 많은 군사들이 죽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이에 왕위를 포기하며 [[승려]]가 되기 위해 출가하려고 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만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왕위를 승계하였다. 태자가 나이 든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아 대패를 당했으니 이번에는 제발 나이든 신하들의 말을 들으라고 설득한다. 그리고 대신 백성 100명을 출가시켰다. 부여씨의 왕권이 땅바닥에 떨어진 것은 위의 기록으로도 알 수 있는데, 취임하자마자 귀족들로부터 "진작에 말을 안 듣다가 이제는 왜 또 그러시는데요?"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대놓고 무시) 선왕이 주도해 일으킨 전쟁에서 왕과 재상을 비롯한 대신들과 연합군 수만명을 잃고 후계자인 자기는 간신히 살아 돌아온 꼴이다 보니, 즉위 이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선대의 [[동성왕]] - [[무령왕]] - [[성왕(백제)|성왕]]의 치세에 단단히 쌓아왔던 왕권이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수서(隨書)》에는 사비 천도 이후 형성된 [[대성팔족]](大姓八族)이 실세가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는 왕권이 많이 떨어졌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때 《[[일본서기]]》의 기록을 근거로 554년 ~ 557년 까지 부여창이 태자로 있었던 이른바 [[공위시대]]가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인정받기도 했으나, 1995년 부여 능산리 유적에서 발굴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에 의해 없었던 것으로 판명났다. 애초 《[[일본서기]]》의 그 출가 기사가 권력대립 보단 성왕의 전사에 따른 비감한 분위기가 물씬나는 부분이고, 위덕왕 스스로가 출가하려 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공위설'은 한계가 있다. === 재위 === 국정을 맡고 몇개월 후인 554년 9월,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변경 진성(珎城)이라는 곳을 공격해 상당수의 백성과 말을 탈취했지만, 중요한 영토 확장은 실패한 소극적인 성과였다. [*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이때 남녀 36,000명과 말 8,000필을 약취했다고 전한다. 허나 학계에선 과장된 전과로 보며, 실제 성과는 미미했을 것으로 보인다.] 혹은 이 진성 공격 기록이 《[[삼국유사]]》에만 있는데 진성이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에 나오는 관산성의 다른 이름이거나, 554년 7월에 있었던 관산성 전투가 7월 한 달만에 종결된 짧은 전쟁이 아니었다면 이 진성 전투도 관산성 전쟁의 일부가 아니냐는 설이 있다. 아무튼 관산성 전투의 일부라면 이는 위덕왕의 즉위 이전에 벌어진 사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어 바로 [[고구려]]가 쳐들어왔다. '''성왕이 전사한지 불과 3개월 만에 쳐들어 온 것이다.'''[* 하지만 《[[일본서기]]》에서 성왕의 사망 시점이 최소 동년 12월 이후인 점과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이 창왕 13년 정해년(567)에 세워진 점을 보면, 이는 성왕 대에 벌어진 일일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 신라가 한강 하류까지 차지했으니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가 닿지 않는데, 일설에는 신라가 길을 열어줬다고 한다. '가도정명'이 아니라 '가도정백제'. 실제로 [[김무력]]이 관산성 전투 때 한강 유역의 주력군을 남쪽으로 보내 한강 유역의 방비가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고구려는 신라를 공격하지 않았고, [[마운령비]]에서도 고구려가 신라의 영토 확장을 오히려 축하하거나 《[[일본서기]]》에서도 고구려와 신라가 (백제를 막기 위해) 손을 잡았다는 말이 있는 것을 봤을 때, 고구려와 신라가 백제를 박살내기 위해 밀약을 맺어둔 상태였다고 추정된다. 허나 여기에도 다른 견해가 많다. 당시 한강 유역을 막 접수한 신라가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틈을 타 일부 소통로를 고구려가 장악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고구려]]가 금강 유역 일대인 웅천성(혹은 안성천 일대로 비정됨.)까지 단숨에 밀고 들어오자 위덕왕은 이를 방어해냈다. ||[[파일:external/db.kookje.co.kr/115715_LImage1.jpg|width=100%]]|| || 연맹설에 근거하여 제작된 가야의 지도 || 이후 고구려가 신라와 연합하여 재침할 것을 우려하여, 왜로부터는 계속 선진문물을 지렛대로 해 병장기와 군마 등 군수물품을 제공받는 동시에 대가야 [* 성왕 치세에 신라가 가야 동부 몇몇 나라를 집어삼킨 뒤 남아있던 가야 제국(諸國)은 몇 차례 [[사비회의]] 등 조율을 거쳐 친백제 성향으로 기울어있던 상태였고, [[관산성 전투]]에도 참전했다.]에 밀사를 파견, 즉 왜와 가야를 이용해 신라의 후미를 치고 562년 금관가야 지역을 다시 되찾아주면서 신라를 견제하게 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백제군이 신라군의 반격에 당하면서 1,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 말 그대로 '''[[역관광]]''' 당했고, 가야를 집어삼키려고 호시탐탐 노리던 신라에게 오히려 좋은 명분이 되고 만다. 이에 562년 음력 7월, 장군 [[이사부]]와 화랑 [[사다함]]의 활약으로 신라는 대가야를 패망시켜 '''[[도설지왕#s-2|가야 전 지역을 집어삼켰다.]]''' 게다가 [[가야멸망전|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원군으로 온 왜군도 대장이 신라군에 사로잡혀 아내를 신라 장수에게 노예로 바치고 겨우 풀려날 정도로 대패했다.]] 그러나 근성가이 위덕왕은 포기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위덕왕 24년과 [[진지왕]] 2년의 기사를 보면 577년 백제가 신라 서쪽 주, 군을 쳤는데, [[이찬]] [[김세종]][* [[김유신]]의 큰할아버지. 즉 위덕왕의 아버지 성왕을 죽인 [[김무력]]의 형이다.]이 3,700명의 목을 베었다고 하는 것을 봤을 때 백제군의 대패로 보인다. 위덕왕은 진흥왕에게 반격당해 패배한 후 장장 16년을 준비했을 텐데, 이렇게 또 패배했으니 개인적으로도 원통했을 것이며, 관산성 전투 당시부터 전쟁을 반대했던 '늙은 대신'으로 대표되는 주화파 세력이 대두하고 위덕왕의 왕권은 더욱 추락했을 것이다. 결국 한동안 백제는 신라에 대한 공세를 중단하게 된다. 게다가 577년에는 위덕왕에게 악재가 겹쳤다.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 (扶餘 王興寺址 出土 舍利器)'에 의하면, [[아좌태자]]의 동생으로 추정되는 한 왕자를 잃은 것이다. 위덕왕은 죽은 왕자를 위해 왕흥사를 세웠다. >백제에게 알야산성(閼也山城)을 주었다. >與百濟閼也山城.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지왕 3년(578) 그나마 다행이라면 578년(신라 [[진지왕]] 3)에 알야산성을 백제에게 '주었다'는 기사가 있긴 한데. 이는 백제 위덕왕의 자료에는 나오지 않는다. 알야산성이 [[전북]] [[익산시]] 낭산면으로 비정되는 걸 볼 때, 이 시기 신라가 백제 중심부에 가까운 익산까지 진출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맞는지 실존을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다만 이 시기 신라는 백제와의 전쟁에서 여러 번 승리해서 백제 중심부와 인접한 아막성([[남원시]]), 내리서성([[영동군]]), 장대리 고분군([[금산군]]), 계족산성([[대전광역시]] [[대덕구]]) [* 백제 산성이냐 신라 산성이냐를 두고 논쟁이 있었다가 지금은 백제 산성으로 보는 시각이 유력하지만, (통일 이전의) 신라 유물도 어느 정도 출토되었기 때문에 신라가 진출한 시기도 존재했다고 추정되기도 하며, 신라가 통일 이전에 이곳을 점거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기가 위덕왕 시기다.] 등을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과 50km 정도 떨어진 익산 낭산면 공격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입장도 존재한다. 이 사건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보는 측에서는 * 진흥왕 시절 백제를 크게 꺾은 신라가 진지왕 초기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해 과감한 공세를 펼쳤다가 정세가 불리하자 잠깐 점거했던 익산을 되돌려주고 철군했다고 보거나, * '[[줄 여]]([[與]])'자를 [[오기]]로 보아서 해당 구절을 '침([[侵]])'이나 '거(擧)'로 읽어 '알야산성을 공격/함락했다'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보며, 반면 이 전투 여부를 부정적으로 보는 측은 * 알야산성을 익산 낭산면이 아니라 국경 지역의 다른 성으로 비정하거나, * 후대 [[백제부흥운동]] 시기의 기록이 위덕왕 대의 일로 시기가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아무튼 알야산성 전투는 기록이 굉장히 소략해서 어떻게 보더라도 추정일 뿐이지만, 신라가 수도 사비에서 멀지 않은 익산을 실제로 공격했다고 본다면 백제에게는 멸망이 100여년은 앞당겨질 수 있는 또 한 번의 큰 위기였다. 하지만 위덕왕은 이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내고 나라를 지켰다. 위덕왕은 국제적인 고립을 피하고,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남북조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펼쳤다. 남북조와 동시적인 외교 관계를 맺은 것은 백제 역사상 최초였다. 이는 중국 정세 외에도 위덕왕이 다각도로 위기를 청산해보고자 한 발로로 보인다. 다음해인 579년에는 웅현성과 송술성을 쌓아서 신라 성들을 연결하는 길을 막았다. 이후 남북조가 [[수나라]]로 통일되고, 어느 정도 내부가 안정되자 위덕왕은 잠재적인 위협 요소인 고구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수나라를 이용하기로 방침을 정한다. 상황을 주시하던 위덕왕은 598년에 [[문제(수)|수문제]]와 고구려가 요동을 놓고 제1차 [[고구려-수 전쟁]]을 벌이자, 수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는 예의 없고 오만한 나라라며 까고, 수나라가 고구려를 친다면 백제가 길 안내, 군량 보급 등을 협력 하겠다고 제의했다. 허나 수 문제는 그럴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위덕왕의 제의를 무시했다. 그리고 백제가 수나라 뒤를 봐주려고 접촉했다는 사실을 안 고구려는, 백제로 진격하여 보복을 감행한 후 돌아갔다. 전쟁 결과는 나오지 않지만 백제가 방어해 낸 것으로 보인다. 결국 위덕왕은 얻는 것도 없이 손해만 본 셈이다. 백제가 돕겠다고 바람을 불어넣은 것이 한 이유로 작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훗날 수나라 다음 황제 [[양제(수)|수양제]]가 진짜로 백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가긴 했다. 그러나 고구려가 져서 나가떨어지길 바랬던 백제의 생각과는 달리 '''[[수나라]][[살수대첩|가 오히려 털렸다]]'''. [* 수나라가 113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친 것은 612년인데, 이 때는 위덕왕 이후 [[무왕(백제)|무왕]]의 치세였다. 무왕은 위덕왕과 생각이 달랐던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말로는 수나라가 고구려를 치면 돕겠다 했어도, 실제로 전쟁이 났을 때는 돕지 않았다.] 재위 기간 내에 [[관산성 전투]]의 복수를 하기 위해 빈번히 신라를 침공했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단지 오래 산 게. [* 기록 미비로 알 수 없지만, 그의 재위 기간 내에 줄창 위기에 빠진걸 보면.] [* 백제에서 40년 이상 재위한 왕은 다루왕, 기루왕, 고이왕, 초고왕, 비류왕, 위덕왕, 무왕 이렇게 7명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백제의 전성기(근초고왕~진사왕 초기) 이후 왕은 위덕왕과 무왕 둘뿐이다. 즉 위덕왕의 치세는 무왕과 더불어 매우 긴 편이다. 더욱이 백제 초기의 왕들은 재위기간이 이상하다고 할 정도로 길어 기록이 의심받는걸 생각해보면 위덕왕은 그나마 재위기간이 매우 길었다고 확실하게 말해질 수 있는 왕이다.] 그러나 위덕왕이 신라를 침공해서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을지언정 그것이 신라를 충분히 피로하게 했을 가능성은 크다. 신라의 [[진평왕]] 재위 기간이 위덕왕 후반부터 [[무왕(백제)|무왕]] 재위 중반기까지인데, 위덕왕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왕이 즉위해 신라에 파상 공세를 펼치자 신라는 백제, 고구려, 말갈에게 얄짤없이 털리기 시작한다. 물론 왜도 외교적으로 이들의 편을 든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왜국]]의 츠쿠시국(현 [[후쿠오카현]])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일라]]의 팀킬로 실패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북제]]의 사실상 마지막 황제인 [[후주(북제)|후주]]로부터 '사지절 도독 동청주자사(使持節都督東靑州刺史)'라는 관직을 받은적도 있었는데 [[청주(중국)|청주(靑州)]]는 당시 중국의 [[산둥]] 지방이었다. 당시에는 남의 [[영토]]를 책봉명으로 [[하사]]받는 일이 흔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 최후 === 598년 74세의 보령[* 왕의 나이를 높여 부르는 말.]을 일기로 승하했고, 그 묘는 [[능산리 고분군]]에 있다고 추정되며, 그의 승하 후 아들인 [[아좌태자]][* [[쇼토쿠 태자]]의 스승, 597년 일본으로 건너감.]가 왕위를 승계하지 않고 동생인 [[혜왕]]이 71세의 나이로 왕위를 이어 받았다. 다만 이상한 점은 장성한 나이의 아좌태자가 일본에 머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귀국하여 위덕왕의 뒤를 잇지 않아 동생인 혜왕이 왕위를 이었다는 것이다. 태자가 버젓이 있음에도 늙은 동생이 보위를 이은 것으로 보아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학자들 중 많은 이들이 위덕왕이 귀족 세력 혹은 혜왕에게 시해당한 것이 아니냐는 설을 제기하고 있다. 노년의 나이라 하더라도 자연사하지 않고 횡사했다면.. 그 전대의 여러 국왕들이 귀족 세력에 의해 시해당한 경우가 여러 번 있었으므로, 사서에 나타난 위덕왕과 혜왕의 승계 과정을 둘러싼 석연치 않은 정황은 위덕왕의 비정상적인 최후를 암시하는 게 아니냐는 것. 다만 기록 상으로는 관련해서 나온 게 일절 없다보니 확실하다고 보기는 힘든 실정이다. 한편 《[[북사]]》에는 제30대 왕인 [[무왕(백제)|무왕]]이 위덕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즉 위덕왕은 아들이 여럿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중국 남북조 시대 북조의 사서인 《북사》에 근거한 것인데, 정작 《북사》에는 혜왕, 법왕의 존재에 대한 기록없이 바로 위덕왕에서 무왕으로 왕위가 이어진 걸로 기록되어 있으며, 여기서 무왕이 위덕왕의 아들인 것처럼 기록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혜왕]], [[법왕(백제)|법왕]]이 워낙 재위 기간이 짧았기에 《북사》 편찬자들이 이들의 존재를 모른 채 무왕이 위덕왕의 아들이겠거니 여기고 그들을 기록에서 누락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거의 유일하게 백제 공주의 기록이 전한다. 능산리사지에서 발굴된 사리감에 "백제 창왕 13년 정해년(567)에... 누이인 양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百濟昌王十三... 丁亥妹亮公主供養舍利)"라는 기록이 있어, 생전에 백제 왕은 이름으로 불렸고, 형공주라는 누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양공주가 아니라 형공주로 볼 경우, 대략 누나 또는 공주 중에서 첫째 공주 등으로 해석되는데, '妹'의 의미가 여동생을 의미하므로 큰여동생일 가능성이 크다. 사망 기사도 묘한 여운을 주는데, 보통 《삼국사기》에서 왕이 죽으면 그냥 "왕이 죽었다. 시호를 뭐라 하고, 어디다가 장사지냈다"는 기록으로 끝맺는 게 대부분이지만, 위덕왕은 "'''여러 신하들이 논의한 끝에(群臣議)''' 시호를 위덕이라고 정했다고 적혀 있다." 물론 왕이 죽은 후 시호를 논의하는 것은 당연히 후임 왕이나 신하들이지만, 굳이 이런 표현이 붙어 있는 삼국시대 왕은 위덕왕이 유일하다. 뭔가 시호를 두고 백제 조정에서 큰 갑론을박이 있었거나, 위덕왕 말년의 불안정했던 백제 정국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 유물 == 이름이 '부여창(扶餘昌)'인데, 당시 백제는 아직 [[피휘]]를 하는 관습이 없어 왕명 표기법이 '이름 + 왕' 이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백제 [[왕흥사#s-3|왕흥사 사리함]]에 '창왕'이라고 표기했다.[* [[무령왕]]의 경우에도 '부여사마(扶餘斯麻)'가 이름인데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무령왕릉#s-6|금석문]]에 '사마왕(斯麻王)'이라고 기록되었다. 고구려나 신라 역시 마찬가지로 피휘를 하지 않아 [[동명성왕|추모왕]]ㆍ[[유리명왕|유류왕]]ㆍ[[대무신왕|대주류왕]]ㆍ[[법흥왕|무즉지태왕]]ㆍ[[성덕왕|융기대왕]]ㆍ[[원성왕|경신태왕]] 등 이름과 왕 자를 나란히 쓴 경우가 많았다.] >丁酉年二月十五日 '''百濟王昌''' 爲亡[* 三으로 보는 학자도 있지만 이 경우 [[임성태자]]의 존재가 부정된다는 문제가 생긴다.]王子 立刹 本舍利二枚 葬時神化 爲三 >정유년(丁酉年: 577) 2월 15일 '''백제왕 창(百濟王 昌)'''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찰(刹)을 세우는데, 2매였던 사리가 장시(葬時)에 신(神)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 백제 시대 왕 중 드물게 한반도에 유물이 다수 존재한다. 1993년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 옆 절터에서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창왕명석조사리함]]'''[* 창왕은 위덕왕의 본명인 부여(성) + 창(이름)에서 창 + 왕]이 발견되었는데 '창왕 13년'(567)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접 장소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 역시 위덕왕 때 부왕인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2007년 10월 10일에는 충남 부여 규암면 신리 왕흥사지에서 사리장엄구('''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가 발견되었다. 이전부터 [[왕흥사]]에 대한 기록과 위치는 알고 있었지만, 드디어 구체적인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청동 사리함에는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子, 立刹本舍, 利二枚葬時神化爲三{정유년(丁酉年, 577년) 2월 15일에 백제왕 창(百濟王昌)이 죽은 왕자(위덕왕의 아들)를 위하여 찰(刹)을 세우는데, 2매였던 사리가 장시(葬時)에 신(神)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는 구체적인 창건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전까지 왕흥사는 《[[삼국사기]]》 기사에 따라 무왕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져왔으나, 왕흥사지에서 사리함이 발견되어 선왕(先王)인 창왕 재위 기간에 창건되었음이 밝혀졌다. 발굴한 학자 왈, 자기가 이걸 직접 파낸 게 아니었다면, 《[[삼국사기]]》와 내용이 달라 위조품이라고 코웃음쳤을 것이란다(...). 어쨌든 이걸로 정확하다고 정평이 난 《[[삼국사기]]》의 위상에 흠집이 났다(...). 이같은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 관련 유적, 유물이 워낙 적은 상황에서 이 사리함은 기존의 기록과 다른 내용을 밝힌 중요 유물이다. 문화재청은 발굴된지 불과 5년 밖에 안 된 2012년에 이 사리함들을 [[대한민국의 보물|보물]] 제1767호로 등록시켰다. == 대중매체에서 == * 2002년 개봉한 영화 <[[싸울아비(영화)|싸울아비]]>에서는 위덕왕 사망이 초반에만 언급된다. * 2005년 [[SBS]] 드라마 <[[서동요(드라마)|서동요]]>에서는 배우 [[정욱(1938)|정욱]]이 연기했다. 드라마에서는 《[[북사]]》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무왕(백제)|무왕]]이 위덕왕의 숨겨진 아들로 설정되어 등장하지만 역사적 사실과 맞는지는 논란이 있는 편이다. 결국 위덕왕이 [[아좌태자]]에게 양위를 하려고 하나 양위식 직전 [[혜왕]] 부여계의 아들로 훗날 [[법왕(백제)|법왕]]이 되는 부여선이 암살단을 보내 태자를 암살하자 위덕왕이 비밀리에 자신의 숨겨진 아들인 서동을 태자로 책봉하고 부여선을 제거하려다 되려 [[역관광]]당해 시해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위덕왕과 혜왕의 석연치 않은 승계 과정을 생각하면 타당하다고 볼 수도 있는 스토리이기는 하지만 역사 기록상의 근거가 없는 이상 픽션이라고 봐야할 듯. * [[겁스 무한세계]]의 화랑 세계에서는 587년 신국 신라에게 백제가 멸망당하자 자살한다. * 2016년 [[KBS]] 드라마 <[[화랑(드라마)|화랑]]>에서는 배우 [[김민준]][* 김민준의 매력적인 남성미와 연기력이 겹쳐 악역임에도 섹시하다는 반응이 많았다.]이 연기했다. [[성왕(백제)|성왕]] 재위기 태자 부여창으로 등장해 크게 비중은 없고 에피소드 하나에 엮인 조연 정도이며 주인공이 신라 측이라 그런지 비열한 성격으로 묘사되었다. 마지막회에서 [[관산성 전투|관산성]]으로 쳐들어왔다고 1번 더 언급된다. == 《[[삼국사기]]》 기록 == [include(틀: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99&categoryId=49615&cid=49615|《삼국사기》 <위덕왕 본기>]]''' 一年秋七月 위덕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月 고구려가 웅천성을 공격하다 六年夏五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八年秋七月 신라의 변경을 공격하다 十四年秋九月 진나라에 조공을 보내다 十七年 제가 왕을 거기 대장군으로 책봉하다 十八年 제가 왕을 다시 책봉하다 十九年 사신을 제에 보내 조공하다 十九年秋九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二十四年秋七月 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四年冬十月 신라의 서부 변경을 공격하다 二十四年冬十一月 사신을 우문주에 보내 조공하다 二十五年 사신을 우문씨의 북주에 보내 조공하다 二十六年冬十月 혜성이 나타나다 二十六年 지진이 일어나다 二十八年 수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八年 수에서 왕을 책봉하다 二十九年春一月 수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一年冬十一月 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三年 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六年 수가 진을 평정하다 三十六年 수의 배가 탐모라국으로 표류하다 三十九年秋七月 일식이 일어나다 四十一年冬十一月 혜성이 나타나다 四十五年秋九月 수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四十五年 수의 군도가 되기를 요청하다 四十五年冬十二月 위덕왕이 죽다 == 《일본서기》기록 == * 553년 겨울 10월 경인(庚寅) 초하루 기유(己酉) : [[백합야 전투|백합야에서 고려군을 물리치다]] * 555년 겨울 12월 : [[관산성 전투|함산성]]에서 패배하다. * 556년 봄 2월 : 일본에 [[혜왕|왕자 혜]]를 보내 성왕의 죽음을 아뢰다. * 558년 : 왕위에 오르다. * 575년 2월 을축 : 일본에 조공하다. * 575년 4월 을유 초하루 경인 : 일본에서 사신이 오다. * 577년 여름 5월 계유 초하루 : 일본에서 파견온 大別王과 小黑吉士을 재상으로 삼다. * 577년 겨울 11월 경오 초하루 : 일본에 불상 등을 조공하다. * 583년 [[아리사등]]의 아들 일라를 일본에 보내주다. * 584년 가을 9월 : 사신을 보내 불상을 보내다. * 586년 일본에 승려들을 파견하고 조공을 바치다. * 587년 여름 6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 598년 여름 4월 정축 초하루 : 백제왕이 왕자 [[아좌태자|아좌(阿佐)]]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각주] [[분류:525년 출생]][[분류:598년 사망]][[분류:백제 국왕]] [include(틀:포크됨2, title=위덕왕, d=2022-07-08 18:1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