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주 유엔 미합중국 대사)] ||<-2> [[펜실베이니아|{{{#ffffff '''제38대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30427%, #030427%, #030427%, #030427 '''{{{#ffc224 제13대 UN주재 미합중국 대사[br]{{{+1 윌리엄 워런 스크랜턴}}}[br] William Warren Scranton}}}'''}}} || ||<-2> {{{#!wiki style="margin:-6px -10px" [[파일:WilliamScrantonPortrait.jpg|width=100%]]}}} || ||<|2> {{{#ffc224 '''출생'''}}} ||[[1917년]] [[7월 19일]]|| ||미국 [[코네티컷주]] 매디슨 || ||<|2> {{{#ffc224 '''사망'''}}} ||[[2013년]] [[7월 28일]] (향년 96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테시토 || ||<|7> {{{#ffc224 '''재임기간'''}}} || ||<#f5f5f5,#222>제13대 UN주재 미국 대사 || ||[[1976년]] [[3월 15일]] ~ [[1977년]] [[1월 19일]] || ||<#f5f5f5,#222>제38대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 ||[[1963년]] [[1월 15일]] ~ [[1967년]] [[1월 17일]] || ||<#f5f5f5,#222>연방하원의원(펜실베이니아 10구) || ||[[1961년]] [[1월 3일]] ~ [[1963년]] [[1월 3일]] || || {{{#ffc224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미국)]|| || '{{{#ffc224 '''정당'''}}} ||[include(틀:공화당(미국))]|| || {{{#ffc224 '''가족'''}}} ||^^'''배우자'''^^ 메리 로우 체임벌린 ^^([[1942년]] 결혼)^^[br]^^'''아들'''^^ 윌리엄 스크랜턴 3세[* 제26대 펜실베이니아 부지사] || || {{{#ffc224 '''학력'''}}} ||[[예일 대학교]] {{{-2 ([[학사|B.A.]]/L.L.B.)}}}|| || '''{{{#ffcc24 서명}}}''' ||[[파일:스크랜턴서명.jpg|width=150]] || ||<-2> '{{{#ffc224 '''군사 경력'''}}} || ||<|2> {{{#ffc224 '''복무'''}}} ||<#f5f5f5>[[미국 육군]][* [[미국 공군]]의 전신인 육군 항공대로 복무] || ||[[1941년]] - [[1945년]] || || {{{#ffc224 '''최종 계급'''}}} ||[[대위]] || || {{{#ffc224 '''참전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 [목차] [clearfix] == 개요 == 미국의 [[정치인]], [[외교관]], [[펜실베이니아]] 주지사와 [[유엔]] 주재 미국 대사직을 역임했다. == 생애 == 부유한 사업가인 아버지 워런 스크랜턴과 [[여성 참정권]] 운동가인 어머니 [[https://en.m.wikipedia.org/wiki/Marion_Margery_Scranton|매리언 마저리 스크랜턴]]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크랜턴 가문은 [[부시 가문]],[[캐벗 로지 가문]]같은 정치인 가문으로 대대로 정치,경제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인 매리언 스크랜턴도 펜실베이니아 공화당의 공작부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당 내 영향력이 강했다.[* 23년간 공화당 전국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스크랜턴은 어려서부터 주 정치인들과 만나면서 정치 경험을 쌓았다. [[예일 대학교]]에 입학해서도 정치 동아리 활동을 했고 미래의 대통령인 [[제럴드 포드]]를 만나 친구가 된다. 예일대 [[로스쿨]] 과정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국 육군 항공대에 입대한다. 전쟁 중에는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고 후방에서 조종사를 훈련하는 임무를 맡았다. 전쟁이 끝나자 전역하고 [[변호사]] 사무실을 연다.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기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존 포스터 덜레스]], 크리스티안 허터(Christian Herter) [[국무장관]]의 특별보좌관을 역임하면서 외교 경험을 쌓는다. 1960년 하원의원 선거에서는 등록된 [[미국 민주당|민주당]]원이 공화당원보다 5만명이나 많은 민주당 강세 지역인 펜실베이니아 10구에 [[록펠러 공화당|온건파 공화당원]]으로 출마한다. 험지인데다 당의 지원도 부족했지만, 현직 민주당 하원의원이던 스탠리 A. 프로콥(Stanley A. Prokop)을 활발한 선거운동과 청년 유권자들의 지지로 17,000표라는 큰 차이로 꺾고 승리한다. 스크랜턴은 공약대로 중도주의적인 하원의원 활동을 하였다. 시민권, 사회보장 확대, [[최저임금]] 인상, [[평화봉사단]] 창설에도 긍정적이었다. 공화당원답게 재정 지출에는 보수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케네디 행정부의 정책에 54%나 찬성표를 던져 언론으로부터는 "케네디 공화당원"이라는 별명을, 펜실베이니아 유권자들에게는 높은 지지율을 얻는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스크랜턴타임지.jpg|width=100%]]}}} || || '''1962년 10월 19일 타임지 표지''' || 1954년 이후 [[주지사]]를 2연속으로 민주당에게 뺏겨 경쟁력이 있는 후보를 고민하던 펜실베이니아주 공화당에게 중도적인 스크랜턴은 최고의 주지사 후보였다. 1962년 중간선거에서 스크랜턴-레이먼드 P. 셰이퍼(Raymond P. Shafer)[* 스크랜턴과 예일대 동문으로 펜실베이니아 23대 부지사(1963~1967), 펜실베이니아 주지사(1967~1971)을 지낸다. 스크랜턴과 동일한 온건파 공화당원이었고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닉슨의 러닝메이트로 고려되기도 했다.] 조는 민주당 리처드슨 딜워스(Richardson Dilworth)[* 필라델피아 시장(1956~1962)]-스티븐 맥캔(Stephen McCann)조에게 대승한다. 그의 주지사 임기 중 [[실업률]]이 7.5%에서 3.6%로 떨어졌고, 주의 평균 임금도 증가했다. 주 교육,[[커뮤니티 칼리지]]에도 자금 투자가 확대되었다. [[필라델피아]] 교외 지역인 체스터 카운티에 위치한 학교의 인종 통합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성공적인 주지사 행정으로 스크랜턴은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대권주자로 꼽힌다. 초기에는 대선 경선 출마에 미온적이었지만[* 다만 부통령 후보를 제안하면 수락하겠다고 했다.] [[넬슨 록펠러]]의 경선 선거운동이 캘리포니아 경선 패배로 무너지자 골드워터의 지명을 필사적으로 차단하려 한[* Stop Goldwater] 온건파 공화당원들의 추대를 받아 경선에 공식 출마한다. 스크랜턴의 지지자들은 [[에버렛 더크슨]]을 포섭하려 하거나[* 더크슨을 일리노이주의 "Favorite Son"(홈스테이트에서만 출마하는 경선 후보,전당대회에서는 타 후보에 획득한 대의원을 몰아준다.)으로 올리려 했으나 당사자가 거부하고 일리노이 경선에서는 골드워터가 승리한다.] 전당대회에서 골드워터의 대의원을 빼내 [[배리 골드워터]]의 대의원 과반 확보를 막으려 했지만 실패한다. 골드워터가 공화당 대선후보로 지명되고 [[부통령]] 후보로도 예상되었으나 [[뉴욕주]]의 보수파 하원의원 [[윌리엄 E. 밀러]]가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다.[* 부통령 후보는 일반적으로 당내 통합을 위해 대통령 후보와 다른 지역/성향을 가진 후보가 뽑힌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레이건]](캘리포니아-보수파)/[[아버지 부시|부시]](텍사스-온건파) 조합이 있다.] 대선 본선에서 강경 보수파 골드워터에 혐오감을 느낀 온건 공화당원 다수가 골드워터 지지를 거부했다.[* Never Goldwater] 그러나 스크랜턴과 [[스피로 애그뉴]] 등 일부 온건 공화당원들은 본선에서 골드워터를 지지했다.[[https://www.slate.com/articles/news_and_politics/politics/2016/05/never_goldwater_the_failed_attempt_to_wrest_the_1964_gop_nomination_from.html|#]] 결국 그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펜실베이니아를 비롯한 북부 지역에서 골드워터는 대패한다.[* '''공화당 창당 직후부터''' 텃밭이던 [[뉴잉글랜드]] [[농촌]],[[교외]] 지역에서도 [[린든 B. 존슨]]이 압승한다.] 남은 주지사 임기 중에는 주지사 연임 금지 규정 철폐를 지원했다.[* 최종적인 법안 통과는 그의 후임 주지사 때 완료되어 후후임 주지사부터 재선이 가능해졌다.] 주지사 임기가 끝난 뒤에는 지역 활동에 힘쓴다.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리처드 닉슨]]이 당선되고 닉슨 행정부 국무장관을 제안받았으나 고사한다. 대신 중동 특사직을 수락한 그는 미국의 중동 정책 변화를 촉구했다.[* 친[[이스라엘]]에만 매몰된 정책 대신 다각적인 접근을 옹호했다. 물론 [[유대계 미국인]]들은 반발했다.] [[오하이오 켄트 주립대학교 발포 사건]] 후 닉슨의 요청을 받아 캠퍼스 불안에 관한 대통령 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대학의 무질서,폭동과 예방 방안을 제시한 스크랜턴 보고서를 작성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이 사임하자 후임 [[제럴드 포드]]의 대통령직 인수인계를 도왔다. 1976년 3월 전임 대사 패트릭 모이니한(Patrick Moynihan)이 상원의원 출마를 위해 사임하자 포드 행정부의 주 [[유엔]] 미국 대사에 임명되었다. 스크랜턴은 전임 대사들과는 달리[* 같은 온건 공화당원이었던 헨리 캐벗 로지도 UN 대사로서의 행보는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가 지원한 [[과테말라]] 쿠데타를 옹호하는 등 타국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전임 대사 패트릭 모이니한도 [[시온주의]] 비판에 격렬히 반발했다.] 미국 우월주의보다 [[인권]]에 대한 헌신과 중재적인 태도로 많은 [[제3세계]] 국가와 미국의 적대 국가들에게도 긍정적인 평가를 얻었다.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이번에도 스크랜턴 부통령 후보 제안이 나왔으나 보수파 [[밥 돌]]이 부통령 후보가 된다.]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대사를 그만두고 공직에서 은퇴한다. 2000년에는 같은 공화당 주지사 [[톰 리지]]에게 펜실베이니아 창립자상을 수상받았다. 2013년 7월 28일 96세의 스크랜턴은 [[뇌출혈]]로 사망한다. == 선거 이력 == || '''연도''' || '''선거'''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락''' || '''비고''' || || 1960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펜실베이니아]] 10구 ||<|2> [include(틀:공화당(미국))] || '''97,012 (54.76%)''' ||<|2> '''당선 (1위)''' || '''초선''' || || 1962 || 미국 주지사 선거 || [[펜실베이니아]] || '''2,424,918 (55.39%)''' || '''초선''' || == 여담 == *그의 아들인 윌리엄 스크랜턴 3세는 1979년부터 1987년까지 펜실베이니아의 제26대 부지사를 지냈다. 그는 1986년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밥 케이시 시니어]]에게 밀려 낙선한다. 20년 뒤인 [[2006년 미국 중간선거]]에서 주지사에 재도전하지만 경선 도중 사퇴한다. [[2010년 미국 중간선거]]에서는 불출마했다. *[[조 바이든]]의 출생지인 펜실베이니아 주의 소도시 [[https://en.m.wikipedia.org/wiki/Scranton,_Pennsylvania|스크랜턴]]을 만든 [[https://en.m.wikipedia.org/wiki/George_W._Scranton|조지 W. 스크랜턴]]이 그의 증조부의 사촌이다. [[분류:1917년 출생]][[분류:2013년 사망]][[분류:미국의 남성 정치인]][[분류:펜실베이니아 주지사]][[분류:미국 공화당 소속]][[분류:뉴헤이븐 카운티 출신 인물]][[분류:뇌출혈로 죽은 인물]][[분류:미국의 외교관]][[분류:예일 대학교 출신]][[분류:예일 대학교 로스쿨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