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캐나다 총리)]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500d0c, #700f1e 20%, #700f1e 80%, #500d0c)" [[캐나다 총리|{{{#fff '''캐나다 제7대 총리'''}}}]][br]{{{#fff '''{{{+1 앙리 샤를 윌프리드 로리에 경}}}[br][[The Right Honourable|{{{#fff Rt Hon.}}}]] Sir Henri Charles Wilfrid Laurier'''}}}}}}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The_Honourable_Sir_Wilfrid_Laurier_Photo_A_(HS85-10-16871)_cropped.jpg|width=100%]]}}} || ||<|2> '''{{{#fff 출생}}}''' ||[[1841년]] [[11월 20일]] || ||[[영국령 캐나다]] [[퀘벡]]주 생로랑티드 || ||<|2> '''{{{#fff 사망}}}''' ||[[1919년]] [[2월 17일]] (향년 77세)|| ||[[캐나다 자치령]] [[온타리오]] 주 [[오타와]] || || '''{{{#fff 국적}}}'''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1868-1921).svg|width=28]] [[캐나다 자치령]] || || '''{{{#fff 학력}}}''' ||[[맥길 대학교]] || || '''{{{#fff 직업}}}''' ||정치가, 변호사 || || '''{{{#fff 종교}}}''' ||[[가톨릭]] || || '''{{{#fff 정당}}}''' ||[include(틀:캐나다 자유당)] || || '''{{{#fff 서명}}}''' ||[[파일:윌프리드 로리에 서명.svg|width=170&bgcolor=#fff]] || [목차] [clearfix] == 개요 == [[캐나다]]의 정치가. [[1896년]]부터 [[1911년]]까지 캐나다의 제7대 총리직을 역임하였다. 15년여간 총리로 있으며 캐나다에서 연속 집권으로는 가장 오랜 총리 생활을 하였고, 당 대표로는 무려 31년여간 있으며 캐나다 주요 정당 정치인 중에선 가장 오랫동안 당대표를 지낸 인물로 남아있다. == 생애 == === 총리 이전의 삶 === [[프랑스계 캐나다인|프랑스계]]로 [[퀘벡 주]]에서 태어났다. 11세 때 [[스코틀랜드]] 이민자가 많이 모여 사는 지역의 학교에서 공부하며 [[영어]]를 배우고 영국계 문화에도 익숙해졌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영국계와 프랑스계 양쪽 교육을 두루 받은 인물인 셈. [[몬트리올]]의 [[맥길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캐나다 자유당|자유당]] 소속으로 1871년 퀘벡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874년 연방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하원 진출 후 그는 자라온 환경의 영향을 받았는지 영국계와 프랑스계의 통합에 노력하였다. 1885년에는 [[메티스]]인(프랑스계와 원주민의 혼혈인) 반란을 이끈 정치인 루이 리엘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요구하는 연설로 유명해졌다. 리엘은 그 해 사형당했지만, 로리에는 원칙을 지키고 높은 이상을 가진 인물로 명성을 굳혔다. 그 사이 자유당 정권 시절에는 정부 여러 부처 장관을 지냈고, 야당 시절인 1887년 자유당 대표가 되었다. 그리고 1896년 선거에서 자유당은 큰 차이로 승리하여 그는 프랑스계로는 처음으로 캐나다의 총리가 되었다. === 총리 재임기와 이후 === 총리가 된 후 캐나다의 중요한 정치적 현안이던 [[정교분리]] 문제, [[영국]]·[[미국]]과의 관계 문제, [[영국계 캐나다인|영국계]]와 [[프랑스계 캐나다인|프랑스계]]의 대립 문제 등에서 유연한 태도를 보이며 국민적 통합을 이끌어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총리를 지낸 그는 '20세기는 캐나다의 세기'이라는 슬로건으로 경제 발전에 앞장섰다. 대륙횡단철도를 개통시켜 많은 이민을 유치하고 미국과의 교역을 늘렸다. 영국과의 관계를 중시하였으나, 미국과의 관계도 중시하며 캐나다의 독자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독립된 국가들로 이루어진 [[영연방]]이라는 개념은 이 때부터 형성된 것이다. 로리에의 경제 정책과 외교 정책은 집권 초중기에 국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어냈으나, 집권 후반기에 가선 반발도 불러일으켰다. 1911년 총선 이슈는 미국과의 자유무역 조약 문제였는데, 당시 영국계와 프랑스계가 모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것. --역설적이지만 통합을 이뤄냈다?-- 결국 총선에서 자유당은 패하고 로리에도 총리직에서 물러난다. 그 후로도 계속 하원의원직과 자유당 대표직을 지내다 1919년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난다. 영국계와 프랑스계의 화합을 위해 힘쓴 그는 오늘날 캐나다 번영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 여담 == [[파일:pavel-protasov-canada-04.jpg|width=400]] [[문명 6]]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문명 6/등장 문명/캐나다|캐나다]]의 지도자로 나온다. [[몬트리올 지하철]]에 로리에의 이름을 딴 [[로리에 역]]이 있다. [[캐나다]] 5[[캐나다 달러|달러]] 지폐에 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분류:캐나다 총리]][[분류:퀘벡 출신 인물]][[분류:프랑스계 캐나다인]][[분류:1841년 출생]][[분류:1919년 사망]][[분류:맥길 대학교 출신]][[분류:화폐의 인물]][[분류:캐나다의 변호사]][[분류:법조인 출신 정치인]][[분류:캐나다의 가톨릭 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