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2차 세계대전의 전투 목록(유럽 및 아프리카))] ||<-3> {{{+1 '''유고슬라비아 침공'''}}} || ||<-3>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 ||<-3> [[파일:attachment/Operation25-yugoslavia_00001.jpg|width=50%]][[파일:external/serbianna.com/1016791_10202711005155601_1822960848_n.jpg|width=50%]][br][[파일:external/www.ushmm.org/85186.jpg|width=50%]][[파일:external/66.media.tumblr.com/tumblr_nn0m8hZbQ91spwf52o1_1280.jpg|width=50%]] || ||<-3> '''기간''' || ||<-3> [[1941년]] [[4월 6일]] ~ [[4월 18일]] || ||<-3> '''장소''' || ||<-3> [[유고슬라비아 왕국]] 전역 || || '''교전국''' ||<^|1>[include(틀:국기, 국명=나치 독일)][br]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width=23]] [[헝가리 왕국(1920~1946)|헝가리 왕국]][br][include(틀:국기, 국명=이탈리아 왕국)][br][include(틀:국기, 국명=크로아티아 독립국)] ||<^|1>[include(틀:국기, 국명=유고슬라비아 왕국)] || || '''지원국''' ||<^|1>[[파일:불가리아 국기.svg|width=23]] [[불가리아 왕국]][* 흔히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불가리아가 참전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불가리아는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참전하지 않은 대신 독일의 압력으로 [[삼국 동맹 조약]]에 가맹하고 독일군이 불가리아 영토를 통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는 것을 허용해주었다. 불가리아는 이를 통해 마케도니아와 남부 세르비아를 영토로 편입할 수 있었다. 이후 독일이 [[요시프 브로즈 티토|티토]]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 그 외 [[체트니크]] 등 저항 세력의 관리 및 진압을 할 여유가 없어지자 대신 진압을 해주기 위해 불가리아군이 베오그라드 인근과 그 북부를 제외한 [[세르비아 구국정부]] 관할 지역까지 [[https://en.wikipedia.org/wiki/Bulgaria_during_World_War_II#/media/File:Bulgarian_Army_deployment_in_occupied_Serbia_in_World_War_II_2.png|점령, 통제할 수 있었다.]]]||<^|1>[include(틀:국기, 국명=영국)] || || '''지휘관'''||<^|1>[[파일:나치 독일 국기.svg|width=23]] [[발터 폰 브라우히치]],,(육군총사령관),, [br]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width=23]] [[빌헬름 리스트]],,(제12군 사령관),, [br]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width=23]]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제1기갑군 사령관),, [br]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width=23]] [[https://ko.wikipedia.org/wiki/하인리히_폰_피팅호프|하인리히 폰 비팅호프]],,(제46차량화군단장),, [br]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width=23]]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제2군 사령관),, [br]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width=23]] [[https://en.wikipedia.org/wiki/Ludwig_K%C3%BCbler|루트비히 퀴블러]],,(제49산악군단장),,[br]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width=23]] [[https://en.wikipedia.org/wiki/Georg_Stumme|게오르크 슈툼메]],,(제40차량화군단장),, [br]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width=23]]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제41차량화군단장),, ||<^|1>[[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기.svg|width=23]] [[https://en.wikipedia.org/wiki/Du%C5%A1an_Simovi%C4%87|두샨 시모비치]],,(18대 총리),,[br] [[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기.svg|width=23]] [[https://en.wikipedia.org/wiki/Danilo_Kalafatovi%C4%87|다닐로 칼라파토비치]],,([[총참모장]]),, [br] [[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기.svg|width=23]] [[https://en.wikipedia.org/wiki/Milorad_Petrovi%C4%87|밀로라드 페트로비치]],,(제1군집단 사령관),, [br] [[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기.svg|width=23]] [[https://en.wikipedia.org/wiki/Milutin_Nedi%C4%87|밀루틴 네디치]],,(제2군집단 사령관),, [br] [[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기.svg|width=23]] [[https://en.wikipedia.org/wiki/Petar_Drap%C5%A1in|페타르 드라프신]],,(제1슬라보니아 사단장),, [br] [[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기.svg|width=23]] [[https://en.wikipedia.org/wiki/Ko%C4%8Da_Popovi%C4%87|코차 포포비치]],,(제1프롤레타리아 여단장),, || ||<-3> '''결과''' || ||<-3> [[추축국]]의 승리 || || '''병력'''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width=23]] [[독일 국방군|나치 독일군]] [br] - 19개 사단 33만 7,096명 [br] - 전차 875대 [br] - 항공기 990대 [br] [br]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width=23]] [[이탈리아 왕국군|이탈리아군]] [br] - 22개 사단 30만 명 [br] - 항공기 666대 [br] [br]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width=23]] [[헝가리군]] [br] - 9개 여단 8만 명 [br] - 6개 항공대대 ||병력 70만 명 [br] 전차 200여 대 [br] 항공기 1,800대 || || '''피해규모'''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width=23]] 나치 독일군 [br] - 전사 151명 [br] - 부상 392명 [br] - 실종 15명 [br] - 항공기 40대 격추 [br] [br]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width=23]] 이탈리아군 [br] - 전사/부상 3,324명 [br] - 항공기 30대 이상 손실 [br] [br]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width=23]] 헝가리군 [br] - 전사 120명 [br] - 부상 223명 [br] - 실종 13명 [br] - 항공기 7대 격추 ||전사자 불명[* 민간인 학살 다수 포함. 전쟁 전체에서는 약 100만 명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br] 포로 37만 5천 명[* 34만 명은 독일군, 3만 명은 이탈리아군에게 잡혔다.] [br] 항공기 49대 격추 [br] 항공기 300대 노획 [br] 조종사 103명 사망 [br] 구축함 3척, 잠수함 3척 노획 || [목차] [clearfix] == 개요 ==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인 [[1941년]] [[4월 6일]] ~ [[4월 17일]],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삼국 동맹 조약]]을 탈퇴한 데에 대한 보복으로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을 중심으로한 [[추축국]] 6개국 군대가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한 사건이다. == 배경 == [[프랑스 침공]]과 [[노르웨이 침공]]에서의 승리로 [[독일 국방군]]이 한창 승승장구하던 1941년, 발칸 반도 서부의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추축국]]의 위협적인 기세를 불안스레 보고 있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1934년 국왕 [[알렉산다르 1세]]가 프랑스에서 암살당한 후, 어린 왕 [[페타르 2세]]의 [[당숙]]인 [[파블레 왕자]]가 [[섭정]]을 하고 있었다.[* 페타르 2세의 큰아버지인 조르제 왕자가 있었으나 이쪽은 원래 왕태자였는데 정신병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바람에 폐태자당하여 섭정을 할 수 없었다.] 파블레 왕자는 나치 독일의 위협적인 기세에 기가 눌렸고, 그리스를 제외한 모든 주변국이 모두 추축국에 가입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추축국 진영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황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파블레 왕자는 유고슬라비아의 안전은 추축국과의 제휴에서 나올 수 있다고 판단하였고, 1941년 3월 25일 빈에서 추축국에 가입하는 [[삼국 동맹 조약]] 문서에 서명을 하게 된다. 유고슬라비아의 추축국 가입 문서에는 독일의 전쟁을 돕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만약 일이 잘 풀렸다면 유고슬라비아는 적어도 독일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안전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파블레 왕자가 친나치 인사라는 관점도 있으나, 오히려 파블레는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조지 6세]]와 그의 동생인 [[켄트 공작 조지]]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등 친영파에 가까웠다. 하지만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달마티아]]를 탐내던 [[이탈리아 왕국]]에게 외교적인 압박을 받고 있었고, 당장 영국의 현실적인 지원을 받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당시 독일은 소련 침공을 앞두고 있는지라 쓸데없이 발칸에서 전선을 늘리고 싶지 않았고 이 때문에 히틀러는 유난히 유고슬라비아에 호의적이었다.[* 당시 독일의 주력 전투기였던 [[Bf 109]]를 유고슬라비아 측에 제공하기도 했다.] 따라서 파블레는 이를 이용해 독일에 접근하여 삼국 동맹 조약에 조인 하는 것을 통해 압박을 줄이고자 하였다. == 발단 == 그런데 문제는 유고슬라비아 본국 내에서 터져 나왔다. 당시 독일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던 유고슬라비아의 국민들이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격렬한 반대 시위를 전개하였고, 삼국 동맹 조약 가입 후 사흘도 지나지 않은 3월 27일, [[페타르 2세]]는 [[연합국]]의 지원을 받은 친미, 친영파 장교단을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파블레 왕자는 [[남아프리카]]로 망명하려 했지만 도중에 [[케냐]]에서 억류되었다.[* 전후 파블레는 [[프랑스]]에서 살았다.] 그러나 이러한 페타르 2세의 쿠데타는 튼튼한 뒷배경이나 반파시즘 이념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그냥 국정 경험도 없는 18살짜리 젊은 왕이 왕좌를 둘러싼 각종 세력의 농단에 홀라당 넘어간 것에 불과했다. 애초에 페타르 2세는 단지 파블레 왕자의 독단에 질려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었느니만큼 추축국에 계속 남아 있으려 했고, 파블레 왕자의 정책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독일을 달래려 했다. 그러나 독일이 원치 않았던 친연합 쿠데타에 더해서 쿠데타가 성공했다는 이유로 베오그라드에서 독일의 외교관과 국기가 모욕당하는 일까지 발생하자 유고슬라비아는 본의 아니게 독일의 역린을 건든 셈이 되었고, 당연히 [[아돌프 히틀러]]는 분노하여 유고슬라비아를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독일의 침공이 코앞에 다다른 상황에서 당장 자신들을 도와야 할 [[영국군]]은 유고슬라비아에 병력을 파견할 여건이 전혀 안되었고, 자국 내의 군사력으로는 추축국에 포위된 상태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정부 인사들의 조언에 따라 페타르 2세는 해외로 도주하여 망명정부를 세우고 연합국에 지원을 요청한다는 무책임한 결정을 내린다. == 개전, 그리고 항복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german 1940-2.png|width=100%]]}}}|| || 짙은 녹색으로 칠해진 곳이 [[추축국]] 및 [[추축국]] 점령지이다. || 유고슬라비아의 지도를 보면 북쪽으로는 [[오스트리아 병합|독일에게 합병당한]] [[오스트리아 연방국|오스트리아]]와 추축국에 가입한 [[헝가리 왕국(1920년~1946년)|헝가리 왕국]]과 인접하고, 동쪽으로는 [[루마니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과 국경선을 맞대고 있다. 서쪽으로는 [[아드리아 해]]를 경계로 해서 [[이탈리아 왕국]]과 마주보고 있고, 남서쪽에는 이탈리아의 보호령 [[이탈리아령 알바니아|알바니아]]가 있으며, 심지어 [[달마티아]] 지역에 [[1920년]] 라팔로 조약으로 이탈리아의 영토가 된 [[자다르]]가 있다. 그리고 남쪽 끝 일부만 [[그리스 왕국]]과 국경선을 마주댄다. 문제는 유고슬라비아가 추축국과 그 점령지에 포위당해 있었고, 그나마 추축국이 아니었던 그리스와 우호국이 된 영국도 제 코가 석자라는 점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면초가. 설상가상으로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는 얼마 안가서 시작될 예정인 [[바르바로사 작전]]을 위해 독일 제12군이 배치된 상태며,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는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발진한 독일군 항공기가 한 시간이면 넉넉잡고 올 정도로 가깝다. 즉 만일 독일군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기로 결심한다면 유고슬라비아는 순식간에 사방에서 집중공격을 받는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1941년]] [[4월 6일]], 독일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기 시작한다. 우선 [[루프트바페]]가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를 기습적으로 폭격해서 잿더미로 만듬과 동시에 4,000명 이상의 시민을 사망하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종전 후 폭격을 명령했던 4항공대 사령관 알렉산더 뢰어가 그 책임으로 유고슬라비아에 인도되어 총살당했다. 참고로 뢰어는 [[에르하르트 라우스]], [[프란츠 뵈메]], [[로타르 렌둘릭]], [[카를 에글제어]] 등과 같은 오스트리아계 국방군 장군이었다. 명예직까지 더하면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원수까지 포함.] 이와 동시에 독일 제12군은 유고슬라비아 동부와 그리스 북부를 향해 침공을 개시했고, 헝가리군도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이전에 헝가리는 유고와 불가침조약을 맺었었다고 한다.] 여기에 이탈리아도 이탈리아 본토와 알바니아에서 군대를 보내서 유고슬라비아를 협격했다. 이에 대응하는 유고슬라비아의 전략과 전술은 사실상 '''없었다'''. 애초에 유고슬라비아의 국가방위계획 자체가 형식상으로만 존재하고 실현성도 거의 없는 종이쪼가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유고슬라비아 왕국군은 일단 숫자는 70만명이었지만, 이 중 50만명은 방금 징집돼서 훈련도 못 마친 병력이며, 제대로 된 중장비도 없어서 병력의 대부분은 오로지 [[보병]], 그것도 소총 숫자도 부족한 알보병에 불과했다. 물론 형식상으로는 기갑부대, 해군, 공군이 있었으나, 기갑부대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 개발된 전차로 해당 시점에서는 그냥 구식이며, 수량도 몇 대 안되는 [[르노 FT]] 전차가 전력의 전부였고, 해군은 1925년 독일에서 수입한 방호순양함 1척, 구축함 3척, 잠수함 4척, 어뢰정 10척, 기뢰부설함 7척, 강상 순찰정 4척이 사실상의 전력 전부였다. 공군의 경우에는 영국제 [[호커 허리케인]] 50대와 영국제 [[브리스톨 블렌헤임]] I 폭격기 60대, 이탈리아제 사보이아-마르케티 [[SM. 79]] K 폭격기 40대에 앞서 언급한 파블레 왕자와의 친선을 위해 히틀러가 공급한 [[Bf109]] 전투기 70여대와 [[Do 17]] 폭격기를 70대 보유하고 있었지만, 독일제 기체들의 경우에는 인도받은 지 얼마 안 된데다가 부품 및 소모품도 부족하고[* 기총은 물론이고 심지어 무전기나 예비 타이어도 없이 딱 비행 가능한 기체만 보냈다.] 조종사의 실력도 형편없어서 별 도움이 안되었다. 덤으로 유고슬라비아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 문화가 혼합된 국가였는데, 다수민족인 [[세르비아인]]들이 권력을 독점하며 자민족 우선주의와 [[선민의식]][*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보슈냐크인]]들에 대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외세]]에 맞설 줄도 모르는 민족들을 우리가 계도한다'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을 보이다 보니 [[크로아티아인]] 등의 타 민족들은 "유고슬라비아는 그냥 대세르비아일 뿐이었다", "우리는 너네 동포 따위가 아니다"[*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인들과 보슈냐크인들을 '갈라선 동포'라 여기고 있었다.]며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들은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가 흔들리기만 하면 분리독립할 생각이었으므로 안 그래도 다민족성을 가진 [[유고슬라비아 왕국군]]은 통일성조차 가질 수 없었다. 덕분에 개전하자마자 1주일도 되기 전에 유고슬라비아의 대도시 2개가 함락되고, 크로아티아 등은 분리독립을 선언한 다음 독일군 편에 가담하였다. 따라서 안 그래도 방어전 준비가 안 되어 있던 유고슬라비아 군대는 총붕괴했고, 독일군은 하루에 150km 이상의 맹진격을 거듭했다. 이는 독일군 뿐 아니라 헝가리군, 그동안 제대로 된 활약을 못했던 [[이탈리아 왕국군]]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니 이 시점에서 유고슬라비아는 그냥 무방비였다고 보면 된다.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유고슬라비아 침공 후 분할.png|width=100%]]}}}|| ||{{{#757575 ■}}} : [[나치 독일]][br]{{{#f7d3aa ■}}} : [[헝가리 왕국(1920~1946)|헝가리 왕국]][br]{{{#a8cdac ■}}} : [[이탈리아 왕국]][br]{{{#b89797 ■}}} : [[크로아티아 독립국]][br]{{{#757575 ■}}}{{{#d2d2d2 ■}}} : [[세르비아 군정청]][br]{{{#c3e5d4 ■}}} : [[이탈리아령 몬테네그로]][br]{{{#a5d0aa ■}}} : [[이탈리아령 알바니아]][br]{{{#d0c0a0 ■}}} : [[불가리아 왕국]] || || 패전 후 해체당한 유고슬라비아 왕국. || 결국, 유고슬라비아는 개전 11일째인 1941년 4월 17일에 독일군에게 항복하고 유고슬라비아는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에 의해 삼분할된다. 유고슬라비아 국왕인 페타르는 그리스로 이미 도망간 후였고, 항복을 거부한 유고슬라비아 군대는 험준한 산악지대로 들어가서 게릴라가 된다. 이들 중 파르티잔이 된 일부는 훗날 독일에게 매우 피곤한 존재가 되지만, 적어도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될 때까지는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처지라 유고슬라비아는 당장은 평안했다. 게다가 이렇게 유고슬라비아가 항복할 때까지 독일군이 입은 피해는 '''전사자가 고작 151명'''. 한마디로 말해 거의 무혈입성에 성공한 셈이라서 히틀러가 "그것 봐. 주먹을 쳐들기만 하면 단 한방에 끝난단 말이야." 란 말을 남길 정도로 성공적인 침공을 달성하였다. 유고슬라비아를 석권한 이후 전쟁은 동시에 진행된 [[그리스 침공]]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전개되었으며,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의 유고슬라비아의 게릴라전에 대해서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게릴라전]]을 참고. == 평가 == 유고슬라비아 침공에서 유고슬라비아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한 것은 독일에 맞서 싸울 의기를 보였다는 점 하나뿐이다. 그 외의 것은 차마 전쟁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의 추태와 붕괴 그 자체다. [[추축국]]에 대항해서 싸우겠다는 생각이야 좋았지만, 싸울 준비도 없고, 국내의 사정도 조율하지 않고,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무모한 행동을 보인 것은 그냥 바보짓일 뿐이다. 게다가 [[폴란드 침공]] 당시의 폴란드군처럼 상황이 불리하더라도 한번이라도 용감하게 싸워보지도 않고 사실상 전투를 포기하여 국가가 썩은 나무가 넘어지듯이 일거에 망한 것은 유고슬라비아의 불리한 조건을 감안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 만일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가열찬 파르티잔 게릴라전이 없었다면 그냥 멍청이로 까여도 할 말이 없었을 정도로 유고슬라비아의 졸전은 문제가 많다. 설상가상으로 유고슬라비아가 국가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빠르게 붕괴되는 바람에 이웃 우방국인 그리스의 방어전 준비에도 악영향을 주었다. 물론 그리스 역시 자국의 모든 영토를 사수하기 위해 자신들의 역량을 넘어서 방어선을 너무 넓게 짜는 실수를 했지만, 유고슬라비아가 2주도 채 되지 않는 시간에 붕괴되지만 않았어도 자신들의 실수를 교정할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든다. 결론적으로 유고슬라비아의 끝없는 졸전과 삽질로 요약되는 전쟁이지만, [[독소전쟁]]의 발발을 늦췄다는 견해도 있다. 독일을 비롯한 추축국도 병력을 빼서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침공, 점령하는 데에도 군사력이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4월이나 5월에 일찍 [[바르바로사 작전]]이 발동되었다면...[* 4월에 공세가 시작됐다면 독일이 승리할 수도 있었으리라는 견해도 있다. 단, 4월은 [[라스푸티차]]가 아직 끝나지 않은 기간으로 이때 독일의 대규모 기갑부대가 기동했다가는 소련에게 대비할 시간은 시간대로 벌어 주고 진격은 진격대로 못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소련이 초기에 밀린 데에는 독일이 침공을 하면 4-5월달에 했지 6월달에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스탈린의 계산도 있었기에 대비를 못해 밀린 점도 감안해야 한다. 즉 더 이르게 침공했으면 소련군의 준비로 인해 초기에 원역사만큼의 전과를 달성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결국 실제 역사와 비슷하게 흘러갔을 것이다.] [[분류:1941년 전투]][[분류:유고슬라비아 전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