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include(틀:남송7왕)] ||<-2> {{{#ece5b6 '''{{{+1 남송의 명장[br]정충보국(精忠報國)[br]부무희왕(鄜武僖王)[br]{{{+1 劉光世 | 유광세}}}}}}'''}}} || || '''[[시호|{{{#fff 시호}}}]]''' ||무희(武僖)^^추대^^ || || '''[[작위|{{{#fff 작호}}}]]''' ||안성군왕(安城郡王) → 부왕(鄜王)^^추봉^^ || || '''{{{#fff 최종 직위}}}''' ||태사(太師)^^추증^^ || || '''{{{#fff 이름}}}''' ||유광세(劉光世) || || '''{{{#fff 자}}}''' ||평숙(平叔) || || '''{{{#fff 부친}}}''' ||유연경(劉延慶) || || '''{{{#fff 출신}}}''' ||북송(北宋) 보안군(保安軍) || || '''{{{#fff 생몰}}}''' ||1089년 ~ 1142년 || || '''[[주군|{{{#fff 주군}}}]]''' ||[[휘종(송)|송휘종]][br][[흠종(송)|송흠종]][br][[고종(송)|송고종]] || || '''[[국적|{{{#fff 국적}}}]]''' ||남송(南宋) || [목차] [clearfix] == 소개 == [[남송]]의 명장이자 방랍의 난과 [[정강의 변]]을 막아 남송을 존속시키기 위해 싸운 무관이다. 자는 평숙(平叔), 시호는 무희(武僖), 작위는 부왕(鄜王)이다. == 생애 == 유광세는 [[북송]] [[철종(송)|철종]] 원우 4년(1089년)에 보안군(保安軍)[* 오늘날 산시성 옌안]에서 유연경(劉延慶)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광세는 음서를 통해 삼반봉직(三班奉職)이 되었고, 이후 부연로(鄜延路) 병마도감(兵馬都監), 기주(蘄州) 방어사(防禦使)까지 승진하였다. 1121년 [[방랍의 난]]이 일어나자, 유광세는 당시 선무사 도통이었던 아버지 유연경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출병하여 방랍의 난을 진압하였다. 방랍의 난을 진압한 공적으로 유광세는 요주(耀州) 관찰사로 제수되었고, 부연로 병마검할(兵馬鈐轄)로 승진하였다. 이후 송나라가 [[금나라]]와 연합하여 [[요나라]]를 공격할 때, 유광세는 아버지를 따라 요나라 공격에 참전하였다. 유광세는 여기서 역주(易州)를 취하고 봉국군(奉國軍) 승선사(承宣使)로 제수되었으며, [[곽약사]]가 항복하자 유광세는 무위군, 봉령군 승선사로 제수되었다. 유연경은 이후 장수들을 보내 요나라의 허점을 공격하면서 유광세를 후속부대로 삼았으나, 유광세는 약속을 어기고 제때 도착하지 않아서 이로 인해 좌천되고 말았다. 이후 하북에서 장적(張迪)이라는 도적이 반란을 일으키자, 유광세는 장적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아 이를 훌륭하게 격퇴하여 승선사 지위를 회복하였고, 부연로 마보군(馬步軍) 부총관(副總管)을 맡았다. 1125년 [[요나라]]가 멸망한 이후, [[휘종(송)|휘종]]과 [[흠종]]은 금나라와의 약조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금나라는 여기에 분노하여 결국 송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본격적으로 침공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이 와중에, [[서하]]의 군대가 금나라의 공격에 발맞춰서 행자보(杏子堡)를 침공하였다. 하지만 당시 행자보에 배치되었던 유광세는 서하군의 침공을 막아냈으며, 시위마군도우후(侍衛馬軍都虞候)로 발탁되었다. 이후 금나라가 다시 송나라를 공격하자, 유광세는 금나라의 침공을 막기 위해 개봉으로 향하기로 한다. 범치허(范致虛)가 전국에 격문을 돌린다는 소식을 들은 유광세는 범치허와 합류하기로 했는데 수도의 상황을 전해들은 뒤, 부하들을 안심시키며 섬부(陝府)로 이동해 주둔하였다. 범치허가 오로의 군대를 동원하여 금나라와 전쟁을 벌이려고 하자, 유광세는 범치허의 생각에 반대하여 괵주(虢州)로 달아났고, 제주(濟州)에 당도하고 휘종의 서자인 강왕 조구를 알현하여 오군도제거(五軍都提舉)로 임명되었다. 강왕이 즉위한 뒤, 유광세는 반란을 일으킨 이욱(李昱)을 토벌하였고 봉국군 절도사로 승진하였다. 또한 진강부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들을 토벌하여 제치사로 전임되었다. 하지만 변이 끝나고 계속해서 싸운 둘은 하다못해 조정에서까지 마주쳐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한편 1127년에는 아버지를 잃기도 하였다. 1140년, 금나라가 순창부(順昌府)를 포위하자, 유광세는 태보(太保)로 임명되고 삼경(三京) 초토제치사(招撫處置使)가 되어 유기(劉錡)를 원조하였다. 그러다가 1141년에는 [[진회]]가 휴전을 주장하면서 유광세는 결국 복귀한다. 유광세는 이후 만수관사(萬壽觀使)가 되고 양국공(楊國公)으로 작위가 고쳐졌으며, 1142년에 사망하였다. 사후 유광세의 자손과 생질 14명에게는 관직이 하사되었고, 유광세 본인은 태사로 추증되었고 무희(武僖)라는 시호를 받았다. 효종 건도 8년(1172)년에는 안성군왕(安城郡王)으로 추봉되었고, 영종 개희 원년(1205년)에는 부왕(鄜王)으로 추봉되었다. 유광세가 1205년에 부왕으로 추봉된 것은 유광세의 손자인 유백진의 주청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당시 권신이었던 한탁주가 북벌을 위한 내부의 사기 진작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분류:송나라/인물]][[분류:1086년 출생]][[분류:1142년 사망]][[분류:송나라의 추존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