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2> '''{{{+1 劉尼[br]유니}}}''' || || '''작위''' ||창국현자(昌國縣子) → 건창군후(建昌郡侯)[br]→ 동안군왕(東安郡王) || || '''성''' ||독고(獨孤) / 유(劉) || || '''이름''' ||니(尼) || || '''자''' ||후니수(侯尼須) || || '''생몰''' ||? ~ 474년 || || '''부친''' ||유루(劉婁) || || '''본관''' ||대군(代郡) || [목차] [clearfix] == 개요 == [[북위]]의 관료로 자는 후니수(侯尼須). 대군(代郡) 출신으로 본래 성은 독고씨(獨孤氏). == 생애 == 유니는 유루(劉婁)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니는 어린 시절에 건장했고 힘이 있었으며, 용맹하고 활을 잘 쏘아서 [[태무제]]가 유니를 보고 칭찬하여 우림중랑(羽林中郞)으로 임명하고 창국현자(昌國縣子)에 봉했으며, 진무장군(振威將軍)을 더하였다. 452년, 환관 [[종애]]가 남안왕 [[탁발여]]를 세웠다가, 탁발여가 자신의 대권을 빼앗으려고 하자 분노해서 탁발여가 동묘를 참배한 틈을 타서 밤에 소황문(小黃門) 가주(賈周) 등을 시켜 밤에 탁발여를 살해하였다. 종애가 이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지만 유니만은 이런 정황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니는 종애에게 탁발준을 황제로 세우라고 권했다. 종애는 유니의 말을 듣고 놀랐는데, 다음은 두 사람의 문답이다. >종애: 그대는 정말 어리석소. 황손이 만약 즉위한다면 어찌 정평(正平)의 사건을 잊어버리겠소? >유니: 만약 그렇다면 지금 누구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오? >종애: 내가 환궁한 뒤에 왕들 중 현명한 이들을 골라서 세우겠소. 유니는 종애의 말을 듣고 종애가 정변을 일으킬까 염려해서 몰래 전중상서(殿中尙書) 원하에게 종애가 탁발여를 시해했다고 알렸다. 원하는 당시 유니와 함께 황궁을 수비하는 군대를 통솔하고 있었다. 원하는 이후 남부상서(南部尙書) 육려(陸麗)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원하: 종애는 이미 남안왕을 세웠다가 다시 남안왕을 죽였소. 지금 만약 황손을 세우지 않고 백성들의 희망에 따르지 않는다면, 사직이 위태로워질 것이오. 장차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육려: 우리가 몰래 황손을 받드는 것 밖에 없소. 이후 원하와 상서 장손갈후(長孫渴侯)가 황궁을 수비했고 유니는 탁발황의 아들 탁발준을 맞이하여 수도인 평성으로 입성했다.동묘에 도착한 유니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종애는 남안왕을 살해하는 대역무도한 짓을 저질렀다. 황손이 이미 제위에 오르셔서 호위병들을 모두 궁으로 돌려보내라는 조칙을 내리셨다. 유니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만세를 외쳤으며, 원하와 장손갈후는 종애와 가주 등을 사로잡은 뒤 평성으로 돌아와 궁문 밖에서 탁발준을 맞이하고 영안전(永安殿)으로 입궁하였다. 탁발준이 바로 [[문성제]]였다. 문성제가 즉위한 뒤 유니는 내행장(內行長)에 임명되고 건창군후(建昌郡侯)로 진봉되었다. 뒤이어 산기상시(散騎常侍), 안남장군(安南將軍)으로 전임되었으며, 다시 동안군공(東安郡公)으로 진봉되었다. 이윽고 유니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전임되고 시중(侍中)이 더해졌으며, 작위도 왕으로 올라갔다. 유니는 뒤에 정동장군(征南將軍), 정주자사(定州刺史)로 전출되었는데, 정주에서는 청렴하고 신중했지만 술을 자주 마셔서 정무를 보는 날은 매우 적었다. 유니는 뒤에 전중상서로 임명되고 시중, 특진(特進)이 더해졌으며, 사도(司徒)로 전임되었다. [[헌문제]]가 즉위한 뒤 유니는 더더욱 중시되었다. 470년, 헌문제가 북정을 단행할 때 유니는 술에 너무 취한 나머지 군대가 정연하지 못했다. 헌문제는 유니가 큰 공을 세웠기에 특별히 유니를 용서하고 면직시키는데 크쳤다. 유니는 이후 474년에 죽었다. [[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474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