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양(남조) 상서복야)] [include(틀:양서)] ||<-2> {{{#ece5b6 '''{{{+1 소량의 대신[br]곡강목후(竟陵穆侯)[br]{{{+1 柳惔 | 유담}}}}}}'''}}} || || '''{{{#fff 시호}}}''' ||목^^(穆)^^ || || '''{{{#fff 작호}}}''' ||곡강현후^^(竟陵縣侯)^^ || || '''{{{#fff 성}}}''' ||유(柳) || || '''{{{#fff 이름}}}''' ||담(惔) || || '''{{{#fff 자}}}''' ||문통(文通) || || '''{{{#fff 출신}}}''' ||하동군(河東郡) 해현(解縣) || || '''{{{#fff 부친}}}''' ||유세륭(柳世隆) || || '''{{{#fff 생몰}}}''' ||[[462년]] ~ [[507년]] || ||<|2> '''{{{#ece5b6 재임}}}''' ||'''{{{#ece5b6 양나라의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 ||[[504년]] [[2월 6일]] ~ [[507년]] [[11월 29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북조시대]] [[양(육조)|양나라]]의 인물. 자는 문통(文通). == 생애 == 사공을 지낸 유세륭(柳世隆)의 아들로 462년에 태어났다. 유담은 학문을 좋아하였고 글을 잘 지었으며 음율에 정통하였고 큰형인 유열(柳悅)과 함께 이름이 알려졌으며, 특히 왕검(王儉)은 유열과 유담을 통틀어 ‘유씨의 두 마리 용’이라고 칭찬하였다. >“유씨의 두 마리 용이 가히 하루에 천 리를 달릴만하구나!” >---- > 『[[남사]]』 유담은 출사하여 당시 중군장군이었던 [[소색]]의 참군이 되고 주부로 전임되었으며, [[제(육조)|남제]]가 들어선 뒤에는 상서삼공랑(尙書三公郎)이 되었고 태자중사인, 파동왕(巴東王) [[소자향]](蕭子響)의 왕우(王友)가 되었다. 489년에 소자향이 형주(荊州) 자사를 맡으면서 유담은 그를 따라 형주로 갔지만, 소자향이 소인들을 가까이 하면서 불법을 저지르자 유담은 장차 재앙이 될 것임을 우려하여 병을 핑계로 수도인 건강으로 돌아갔다. 이후 소자향이 처형되었지만 유담은 이전에 이미 건강으로 돌아갔기에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유담은 이후로 남제에서 중서시랑, 중호군장사, 신안군 태수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신안군 태수를 맡을 때는 특별한 치적을 세운 적이 없어서 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나중에 우군장군 자의참군으로 기용되었다. 499년에는 영삭장군으로 서융교위, 양남진2주(梁南秦二州) 자사를 맡았다. 동혼후가 즉위한 뒤 남제는 혼란에 빠졌는데, 유담은 동혼후의 통치에 반대하다가 옹주 자사였던 소연이 거병하자 한중에서 소연에게 가담하였다. [[화제(남제)|화제]]가 즉위하자 유담은 시중(侍中), 전군장군으로 임명되었다가 정로장군으로 익녕2주(益寧二州) 자사를 맡았다. 502년 소연이 화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로 즉위한 뒤, 유담은 호군장군으로 임명되었지만 직위를 받지 않았고 대신 태자첨사로 임명되고 산기상시가 더해졌다. 또한 공적을 인정받아 곡강현후(曲江縣侯)로 책봉되었으며 식읍 1천 호를 받았다. 504년에는 상서우복야가 되었다. 505년 [[소굉]]이 도독북토제군사가 되어 북벌을 단행하면서 유담은 소굉을 보좌하였다. 하지만 북벌은 지지부진하여 결국 실패하였다. 유담은 당시 병을 앓고 있었는데 [[무제(양)|무제]]로부터 금자광록대부로 전임되고 산기상시가 더해졌으며 측근 20명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관직을 받지는 않았고 사지절, 안남장군, 상주(湘州) 자사가 되어 상주에 있었다가 507년에 죽었다. 무제는 유담의 죽음을 슬퍼하여 유담을 시중, 무군장군(撫軍將軍)으로 추증하고 목(穆)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분류:양(남조)/인물]][[분류:462년 출생]][[분류:507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