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안동시 출신 인물]][[분류:1898년 출생]][[분류:1983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운동가|{{{#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br] {{{#ffffff '''{{{+1 유동수}}}'''[br]'''柳東壽'''}}}}}} || ||<|2> '''출생''' ||[[1898년]] [[2월 2일]] || ||[[경상북도]] [[안동시|안동군]] 임동면 수곡동 || ||<|2> '''사망''' ||[[1983년]] [[6월 26일]] || ||[[경상북도]] [[안동시|안동군]]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유동수는 1898년 2월 2일 경상북도 안동군 임동면 수곡동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유동욱(柳東旭), 유만수(柳晩秀)이다. 그는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중평동 편항 장날을 이용하여 [[유연성(독립운동가)|유연성]]·[[유동수(1887)|유동수]]·이강욱(李康郁)·홍명성(洪明聖)·[[박재식]]·[[유교희]]·박진선(朴晋先)·유곡란(柳谷蘭)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여 편항주재소를 파괴하고 경찰관 사택을 방화하고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등 군중의 격렬한 시위에 함께 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5월 31일 대구(大邱)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건조물 손괴·가택 침입·상해 및 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았다. 출옥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원 [[유림(독립운동가)|유림]]의 지시에 따라 군자금을 모집했고, 향리에서 후진을 양성하며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8.15 광복]] 후 안동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3년 6월 2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유동수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