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고려의 군인]][[분류:1019년 사망]][[분류:전쟁 사망자]] '''庾伯符''' ? ~ [[1019년]] [목차] == 개요 == [[고려]] 초의 문관, 무장. 3차 [[여요전쟁]]에서 전사했다. == 생애 == [[1010년]]에 사재주부(司宰注簿)[* 고려시대 사재시(司宰寺)·사재감(司宰監)의 종7품 벼슬이다.] 직을 역임했으나 [[성종(요)|요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이유로 [[제2차 여요전쟁|전쟁을 일으키자]] 상서도사(尙書都事) 고연경(高延慶)과 함께 중군병마판관(中軍兵馬判官)으로 임명되었다.[* 출처 - 고려사 반역열전 [[강조(고려)]]] 중군병마판관으로 임명된 정황으로 볼 때 이후 벌어진 [[통주 전투]]에 참전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록이 없다. 2차 전쟁이 끝나고 8년 후 유백부는 통주 도부서(通州都部署)로 올랐으나 [[제3차 여요전쟁]] 도중 전사했는데, [[현종(고려)|현종]]은 [[1019년]] 음력 3월 유백부 이하 173명의 전사자들에게 관직을 높히고 그들의 집에 쌀과 보리를 내리되 차등 있게 하라고 명을 내렸다. 현종 사후 [[덕종(고려)|덕종]]이 즉위한 원년에 위위소경으로 증직했다. == 기타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평안도]] 선천에 [[양규]], [[김숙흥]], 유백부를 제향한 삼충사(三忠祠)라는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삼충사(三忠祠) 고려 때 세웠는데 뒷날 병란 때 없어졌다. 본조 인조 을유년에 중건(重建)하였다. >양규(楊規)는 안악(安岳) 사람인데 고려 현종 2년에 서북면 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로서 거란과의 싸움으로 통천(通川)에서 죽었다. 벼슬은 형부 낭중 벽상공신(刑部郎中壁上功臣)이다. >김숙흥(金叔興)는 서북면 도지휘사 귀주 별장(西北面都指揮使龜州別將)으로서 양규와 함께 순절하였다. >유백부(庾伯符)는 통주 도부서(通州都部署)로서 양규와 함께 순절하였다. 위위소경(衛尉少卿)에 추증되었다. >----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3권 평안도 선천군 그런데 유백부가 [[애전 전투]]에서 양규, 김숙흥과 같이 전사했다고 언급되었다. 고려 때 지어진 삼충사에서 유백부를 양규, 김숙흥과 함께 모셨다는 기록과 헷갈린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