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십육국춘추)] ||<-2> '''발해왕(渤海王)[br]{{{+2 劉敷 | 유부}}}''' || || '''시호''' ||없음 || || '''작위''' ||발해왕^^(渤海王)^^ || || '''성''' ||유^^(劉)^^ || || '''휘''' ||부^^(敷)^^ || || '''자''' ||불명 || || '''생몰''' ||? ~ 316년 7월 || || '''출신''' ||병주^^(幷州)^^ 신흥군^^(新興郡)^^ || || '''부황''' ||[[유총(전조)|열종 소무황제]]^^(烈宗 昭武帝)^^ || || '''형제자매''' ||20남 중 5남 || [목차] [clearfix] == 개요 == [[전조(오호십육국)|전조]]의 황족. 소무제 유총의 5남. == 생애 == 소무제 유총의 아들이라는 신분 덕에 젊은 나이에 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다만, 당시 태부 최위(崔瑋)가 황태제 유예(劉乂)와 반란을 모의하면서 "병영에 부재 중인 때가 더 많아 습격한다면 군대를 장악하기 쉬울 것이다"라고 주장한 것을 보면 직무에 그리 성실히 임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건원 2년(316년) 2월, 중상시 왕침(王沈), 선회(宣懷) 등이 소무제 유총의 총애를 등에 업고 국정을 농단했고, 유총은 매일같이 연회를 열어 후궁에서 놀기만 했다. 이에 유부는 형인 하간왕 [[유이(전조)|유이]]와 함께 어사대부 [[진원달]], 금자광록대부 [[왕연(전조)|왕연]] 등의 대신들을 거느리고 대궐로 나와 미리 준비한 표문을 올리며 아버지에게 간하였다. 그러나 유총은 이들의 상소를 들은 체도 하지 않았고 왕침의 작위만 높여주었다. 건원 2년(316년) 7월, 소무제 유총이 사망한 황후 장씨의 여종 번씨(樊氏)를 상황후로 삼았다. 이로써 황후의 옥새와 인수를 차고 있는 여인이 10명이 넘으니, 조정 내외로 법과 기강이 제대로 서지 않았고, 아첨하여 총애받는 자들만 넘쳐났으며, 뇌물은 아예 공공연하게 행해졌다. 군대는 항상 외지에 주둔해있었고, 굶주림과 전염병이 창궐하여 백성들이 큰 고통을 받고 있음에도 소무제 유총은 후궁에 사사로이 쓰는 금액이 천만 전에 달했다. 유부는 매번 아버지를 찾아가 눈물 흘리며 간언을 올렸으나, 유총은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번은 유총이 유부를 귀찮게 여겨 > "너는 네 아비가 죽기라도 바라느냐?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아침저녁으로 울기만 하는구나!" 라 분노하자, 유부는 걱정과 울분으로 병에 걸려 결국 형 유이처럼 분사하였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진서)]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흉노]][[분류:316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