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서)] [include(틀:남사)] ||<-2> '''남평목왕(南平穆王)[br]{{{+1 劉鑠 | 유삭}}}''' || || '''시호''' ||목(穆) || || '''작위''' ||남평왕(南平王) || || '''성''' ||유(劉) || || '''이름''' ||삭(鑠) || || '''부모''' ||부친 [[문제(유송)|문제 유의륭]][br]모친 숙의(淑儀) 오씨(吳氏) || || '''생몰''' ||431년 ~ 453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북조시대]] [[송(남조)|유송]]의 황족으로 자는 휴현(休玄). == 생애 == [[문제(유송)|문제 유의륭]]과 숙의(淑儀) 오씨(吳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440년, 도독상주제군사(都督湘州諸軍事), 관군장군(冠軍將軍), 상주자사(湘州刺史)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석두수사(石頭戍事)를 겸임하였다. 445년, 사지절(使持節), 도독남예예사옹진병6주제군사(都督南豫豫司雍秦并六州諸軍事), 남예주자사로 옮겼다. 이후 남예주를 수양(壽陽)에 통합하면서 유삭은 예주자사가 되고 안만교위(安蠻校尉)를 겸임하였다. 449년, 평서장군(平西將軍)으로 진호되었으나 받지 않았다. 이후 [[북위]]의 [[태무제]]가 유송을 침공하여 현고성(懸瓠城)을 포위한다. 이때 여남태수(汝南太守) 진헌(陳憲)이 성을 굳게 사수하였다. 진헌과 북위의 공방이 40여 일 동안 계속되자, 유삭은 안만부 사마 [[유강조]]와 영삭장군(寧朔將軍) 장질을 파견하여 진헌의 구원을 명했으며, 북위는 결국 현고성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451년, 북위의 형주자사 노상과 아우인 노수 등이 유삭에게 귀순하였다. 이에 문제는 노상을 의양에 진수시키고 노상의 아우 노수를 유삭의 참군으로 삼았다. 이후 생모인 숙의 오씨가 죽자, 유삭은 장례를 치르기 위해 수도로 돌아갔고 장례를 마친 뒤 복귀하였다. 453년, 유의륭의 태자 [[유소(유송)|유소]]가 유의륭을 시해한 뒤 유삭은 유소의 밑에서 중군장군(中軍將軍)이 되었다. 한편 무릉왕 유준이 유소를 토벌하고자 출병하자, 유소는 수도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유삭에게 위무를 명했다. 유삭은 시중(侍中), 사공(司空)으로 임명되었으나 문제의 장례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중의 벼슬을 사양했다. 이후 효무제 유준은 사람을 시켜서 유삭에게 줄 음식에 독을 넣어 유삭을 독살하였다. 유삭은 사후 시중, 사도(司徒)로 추증되고 목(穆)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유삭의 비인 강씨(江氏)는 465년 [[전폐제(유송)|전폐제 유자업]]이 궁으로 불러들였음에도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유자업이 유삭의 세 아들을 인질로 강씨를 협박했음에도 강씨는 부름에 응하지 않아서 유자업이 사람을 보내 유삭의 세 아들인 유경유(劉敬猷), 유경연(劉敬淵), 유경선(劉敬先)을 살해하고 강씨를 채찍으로 100대를 때렸다. 유자업이 죽고 [[명제(유송)|명제 유욱]]이 즉위한 뒤 유경유는 회(懷)라는 시호를 받았고, 남안현후(南安縣侯) 유경연은 도(悼)라는 시호를 받았고, 여릉왕의 작위를 이었던 유경선은 공(恭)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분류:송(남조)/황족]][[분류:431년 출생]][[분류:453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