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장성군 출신 인물]][[분류:1890년 출생]][[분류:1943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운동가|{{{#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br] {{{#ffffff '''{{{+1 유상설}}}'''[br]'''柳相卨'''}}}}}} || ||<-2> [[파일:유상설.jpg|width=300]] || ||<|2> '''출생''' ||[[1890년]] [[11월 1일]] ||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 || ||<|2> '''사망''' ||[[1943년]] [[12월 26일]] || ||[[전라남도]] [[장성군]]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유상설은 1890년 11월 1일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3일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저녁 때 신경식(申耕植)·유상순(柳相淳)·[[고용석]]·[[정병모]] 등의 마을 유지들과 함께 이곳의 고유 풍속인 화전회(花煎會) 모임을 이용하여 박승화(朴承化)의 집앞 냇가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시국담을 나누었다. 이때 그는 고용석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파리 강화 회의]]의 결과를 알려주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찬성하자 한편에서는 「대한독립기」라고 쓴 대형 태극기를 만들고, 한편에서는 마을 주민에게 연락하여 2백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여들었다. 그는 시위군중들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모현리 일대를 시위행진한 후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사가리 헌병주재소에서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일본 헌병들이 출동하여 주동자 검거를 시작하게 되자 그도 체포되었다. 결국 이해 7월 10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장성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3년 12월 2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유상설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