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연세대학교 총장)] [include(틀:대한체육회 회장)]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2957, #003876, #003876, #002957);" '''[[연세대학교/총장|{{{#ffffff 연희전문학교 제5대 교장}}}]][br]{{{#ffffff {{{+1 유억겸}}}[br]兪億兼 | Yoo Eok-gyeom}}}'''}}}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유억겸.jpg|width=100%]]}}} || || '''본관''' ||[[기계 유씨]] 자산공파[* 시조 27세손 '兼'자 항렬.] || ||<|2> '''출생''' ||[[1896년]] [[10월 23일]] || ||[[한성부]] 북서 가회방 재동계[br](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 [[http://db.history.go.kr/id/had_184_0550|#]]] || ||<|2> '''사망''' ||[[1947년]] [[11월 8일]] 오후 10시 30분[br](향년 51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자택 || || '''가족''' ||부친 [[유길준]], 빙부 [[윤택영]][br]아내 윤희섭, 아들 유병덕 || || '''학력''' ||계산보흥학교[* 이후 폐교되었는데, 당시 위치에 [[1925년]] 대동상업고등학교가 개교하여 현재 [[대동세무고등학교]]로 역사가 내려오고 있다.] {{{-2 (졸업)}}}[br][[성동고등학교|황성기독교청년학관]] 중등과 {{{-2 (졸업)}}}[br][[도시샤대학]] 부속중학교 보통부 {{{-2 (졸업)}}}[br][[교토대학|제3고등학교]] {{{-2 (졸업)}}}[br][[도쿄대학|도쿄제국대학]] [[법학부]] {{{-2 ([[법학|법률학]] / [[학사]])}}}[br][[도쿄대학|도쿄제국대학 대학원]] {{{-2 ([[법학|법률학]] / [[석사]])}}} || || '''경력''' ||[[중앙고등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 교사[br][[연세대학교 상과대학|연희전문학교 상과]] 법학 교수[br][[연세대학교 상과대학|연희전문학교 상과]] [[학과장|학감]][br][[연세대학교|연희전문학교]] 부교장[br][[신간회]] 경성지회 간사[br]조선기독교청년회 경성대표[br]사상보국연맹 경성지부 제3분회장[br]흥아보국단 경기도위원[br][[한국민주당]] 창당 발기인[br][[미군정]] [[교육부장관|문교부장관]]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교육자,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 생애 == 유억겸은 1896년 10월 23일 [[한성부]] 북서 가회방 재동계(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에서 [[유길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내가 [[윤택영]]의 둘째 딸이자, [[순정효황후]]의 동생이기에 [[순종(대한제국)|순종황제]]와는 [[동서#s-2]] 지간이다. [[경성부]] 사립 계산보흥학교(桂山普興學校)를 졸업하고 [[성동고등학교|황성기독교청년학관]] 중등과를 다니다가 1912년 [[일본]]에 유학, [[교토]] 도시샤(同志社)중학교 보통부, [[교토]] [[구제고등학교|관립 제3고등학교]]를 거쳐 1922년 [[도쿄대학|도쿄제국대학]] 법학부 법률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법률학을 연구했다. 1923년 [[중앙고등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같은 해 4월 [[연세대학교|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상과에서 법학을 강의하였다. 조교수, 학감을 거쳐 1934년에 부교장을 맡았다. 특히 체육에 관심이 깊어 그의 주선으로 연희전문학교 주최 전국중학교 체육대회를 매년 개최하기도 하였다. 한편, 1924년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6623&docId=557580&categoryId=46623|소년운동협회]] 의연금 모집위원으로 있었고 1927년 [[신간회]] 경성지회 간사로도 활동하였으며, 1929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정기대회 신임장 조사위원, 1930년 소년척후단 조선총연맹·중앙기독교청년회 등 한때 기독교계열 민족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9년부터 1942년까지 기독교 관련 서적을 출판·판매하는 조선기독교창문사(朝鮮基督敎彰文社)[* 이후 1939년경 창문인쇄(彰文印刷)로 상호명이 변경되었다.] 이사로 [[http://db.history.go.kr/id/hs_001_1929_03_14_6590|취임]][[http://db.history.go.kr/id/hs_001_1942_09_14_15810|했다]]. 친일로 전향한 직후인 1938년 10월 14일에는 [[윤치호]]와 함께 조선기독교청년회 경성대표로서 일본기독교청년회 산하에 가맹하여 일본기독교청년회 조선연합회위원회에 [[http://db.history.go.kr/id/pj_004_0010_0080|참석했다]]. 그러던 중 1938년 [[연희전문학교]] 부교장 재직 중에 '연희전문학교 적화(赤化) 사건'에 연루되어 자택 수색을 당하게 되는데[[http://db.history.go.kr/id/had_184_0690|#]], 이 과정에서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와 관련된 문서가 발견되어 비밀결사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양현혜(대학교수) 저, 《근대 한·일 관계사 속 의 기독교》,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9, p. 147]. 이에 경찰은 같은 해 5월 20일부터 유억겸을 비롯해 [[신흥우]]·[[최두선]]·[[정춘수]] 등 54명을 검거하기에 이르렀다. 유억겸은 이 때문에 3개월 간 옥고를 치른 뒤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소유예로 [[http://db.history.go.kr/id/had_189_0590|석방되었다]]. 직후에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을 사임하였으며, 1937년부터 [[변호사]]업을 시작하였다. 1937년부터 합자회사 천은광업사(天銀鑛業社)에 입사하여 [[http://db.history.go.kr/id/hs_001_1937_04_13_1300|중역으로 근무했고]], 1939년부터는 주식회사 남포수산(南圃水産)에서 [[http://db.history.go.kr/id/hs_001_1939_03_12_0720|감사]], 이화토지경영(梨花土地經營)에서 이사 등으로 재직하였다[[http://db.history.go.kr/id/hs_001_1939_03_15_3570|재직했다]]. 한편, 흥업구락부 사건 이후 친일로 전향하여 1939년 7월 사상보국연맹 경성지부 제3분회장에 취임하였고[[http://db.history.go.kr/id/pj_004_0010_0080|#]] 1941년 2월 [[윤치호]]가 연희전문학교 교장이 되면서 서무부장으로 복직하였다[* 1942년 9월 일제의 사립학교 탄압이 가중되자 다시 사임하였다.]. 그 해 8월 윤치호가 위원장을 맡은 친일 단체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에 가입하여 경기도위원이 되었고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에 참여하여 위원으로 있었다. 같은 해 9월 7일에는 [[박영희#s-3]] 등과 함께 [[경복궁 광화문|광화문]] 앞에서 전쟁 채권을 들고 "銃後奉公(총후봉공)은 채권으로부터"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중들에게 전쟁 협력을 [[http://db.history.go.kr/id/pj_001_0030_0010|독려했다]]. 같은 해 10월 친일 단체 조선임전보국단이 설립되자 이사가 되어 [[조선신궁]]에 [[http://db.history.go.kr/id/pj_001_0030_0040|참배했다]]. 1942년에는 친일 잡지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6668&docId=548343&categoryId=46668|조광]](朝光)》에 戰必勝 功必取(전필승 공필취)라는 [[태평양전쟁]]을 옹호하는 논설을 [[http://db.history.go.kr/id/pj_004_0010_0090|게재했다]]. 그 밖에 친일 단체 대화숙(大和塾)에서 [[http://db.history.go.kr/id/pj_004_0010_0100|활동했고]], 1943년 학도병 종로익찬회 강연대원,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 등을 역임하며 [[8.15 광복]] 직전까지도 친일 행적을 드러냈다. 이러한 행적들로 그는 사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기에 이른다. 1948년 11월 민족정경연구소(民族政經硏究所)에서 간행한 《친일파군상(親日派群像)》에서는 유억겸을 [[김성수(1891)|김성수]]와 함께 거론하면서, '피동적으로 끌려서 활동하는 체한 자'면서 '경찰의 박해를 면하고 신변의 안전 또는 지위, 사업 등의 유지를 위하여 부득이 끌려 다닌 자'로 분류하였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45년 10월 연희전문학교의 제5대 교장에 취임하여 학교의 기틀을 마련하고 이어 기독교청년회 회장을 지냈다. 1946년에는 [[미군정]]의 문교부장(지금의 교육부장관)에 취임하였다. 당시 문교차장 [[오천석]]이 제안한 [[서울대학교/역사#s-3|국대안]]을 실현시키는 등 대한민국 교육정책 수립의 기초작업을 하였다. 또한 1927~1947년까지 제8대·12대 [[대한체육회]] 회장을 지냈으며, 각종 국제회의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였다. 1947년 11월 8일 밤 10시 30분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자택에서 [[뇌일혈]]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7111100209202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47-11-11&officeId=00020&pageNo=2&printNo=7433&publishType=00020|별세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려 1962년 제17회 광복절을 맞아 교육부문의 [[훈장(상훈)|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연세대학교]]에 유억겸기념관이 있다. 묘는 [[하남시]] [[덕풍동]]에 있다가 그 지역의 도시개발로 인해 현재는 [[창우동]]에 이장되어 있다. 장로회 사회운동가 [[유각경]]이 그의 사촌 누나이다. [[분류:연세대학교 재직]][[분류:대한민국의 교사]][[분류:대한민국의 사회과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교사]][[분류:연세대학교 총장]][[분류:종로구 출신 인물]][[분류:1896년 출생]][[분류:1947년 사망]][[분류:기계 유씨]][[분류:성동고등학교 출신]][[분류:교토대학 출신]][[분류:도쿄대학 출신]][[분류:뇌혈관질환으로 죽은 인물]] [[분류:대한체육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