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仁願 생몰년도 미상 [목차] == 개요 == [[당나라]] 초기의 장수. 자는 사원(士元). 유대구의 아들. 그의 아버지인 유대구가 원화성찬에 따르면 좌현왕 [[유표(흉노)|유표]]의 후예라고 기록되어 흉노계 출신으로 보인다. == 생애 == [[645년]]에 [[고구려]] 원정에 참전해 공을 세우면서 상주국이 되었고 여양현개국공, 우무위봉명부좌과의도위가 되었으며, [[647년]]에는 행군대총관으로 임명되어 [[이세적]]을 따라 [[설연타]]를 공격했다. [[648년]]에도 대총관이 되어 고구려 [[요동]]을 공략하고 [[649년]]에 우무위 부과좌의도위에 임명되었으며, [[651년]]에는 [[철륵]]에 들어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절충도위에 임명되었다. [[654년]]에는 총산도행군대총관이 되어 정지절을 따라 하로를 토벌했으며, [[656년]]에는 좌효위낭장으로 옮겼다가 [[657년]]에는 [[과거시험]]을 관장하고 [[659년]]에는 [[토욕혼]], [[토번]]을 위무했다. [[660년]]에 [[소정방]]이 이끄는 [[백제]] 원정에 참전해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661년]]에 [[소정방]]의 명으로 정복한 백제의 옛 수도 [[사비성]]을 [[백제부흥운동]]군으로부터 지켰다. [[웅진도독부]]가 설치되면서 웅진도독이 되었지만 [[귀실복신]]이 이끄는 백제의 잔당의 공격으로 포위되었다가 [[유인궤]]의 원군으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유인궤]]와 함께 지라성, 윤성, 대산, 사정의 성책을 부쉈다. 유인원이 상주문을 올려 치주, 청주, 내주, 해주의 군사 7천명이 파견되었으며, 7월 30일에 유인궤와 함께 백제의 잔당군을 공격해서 웅진의 동쪽에서 물리치고 [[진현성]]을 함락했다. 8월에는 [[손인사]], [[신라]]의 [[문무왕]]과 함께 육군을 거느려 [[주류성]]으로 나아가 함락했으며, [[백강 전투]]에서의 승리로 백제 잔당군이 평정되자 유인원은 [[당고종]]이 상주한 일에 대해 이는 모두 [[유인궤]]가 한 것이라 이야기했고 [[상관의]]는 유인궤와 함께 유인원을 칭찬하면서 유인원에 대해 통제권을 쥐고서도 현명한 사람을 추천할 수 있으니 군자라 할 만하다고 했다. 664년에는 우위위장군을 지내면서 유인궤가 귀국하려는 것을 만류해 그만두게 했으며, 665년 가을 8월에는 [[한반도]]에 사신으로 가서 이미 자신들의 컨트롤 하에 놓인 옛 [[백제]]왕자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을 대등한 위치로 간주하고 서로 화해하라는(즉 신라를 견제하고 격하하는) '[[취리산 회맹]]'을 주도했다.[* 이 취리산 회맹은 이후 [[나당전쟁]]의 한 원인이 된다.] 668년에는 비열도의 행군총관, 우위위장군으로 있으면서 고구려 정벌에서 머뭇거렸다는 죄에 연루되어 요주로 유배를 갔다. [[분류:몰년 미상]][[분류:수당시대/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