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사명당' 명칭을 약칭으로 등록하여 사용하는 정당, rd1=한민족사명당)] || '''{{{#fff 유정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허균)] ---- [include(틀:조선의 승려)]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35deg, #0f1009 0%, #333620 30%, #333620 70%, #0f1009);" '''{{{#fff {{{+2 유정}}}}}}[br]{{{#fff 惟政| Yujeong}}}'''}}}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0px" [[파일:사명당 유정 영정.jpg|width=100%]]}}}{{{-2 [[통도사]] 소장 사명당영정(泗溟堂影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50-2호이다. 그의 진영(眞影)은 많이 전해지지만 별로 외모가 통일되어 있지는 않다.[[https://www.doopedia.co.kr/photobox/comm/community.do?_method=view&GAL_IDX=101227000774163#hedaer|#]]] || || {{{#fff '''본관'''}}} ||[[풍천 임씨]][* 정승공파(政丞公派) 12세 응(應) 항렬.] || ||<|2> {{{#fff '''출생'''}}} ||[[1544년]] [[10월 17일]][br](중종 39년, [[음력]] [[1544년]] [[10월 2일]]) || ||[[경상남도|경상도]] [[밀양시|밀양도호부]] 상서이동면 고라리[br],,(現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사명대사생가로 642[* 지번 주소로는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400]),, || ||<|3> {{{#fff '''사망'''}}} ||[[1610년]] [[10월 12일]][br](광해군 2년, [[음력]] [[1610년]] [[8월 26일]])[br]{{{-1 (향년 65세, 65년 2개월 26일 / 23,828일)}}} || ||[[경상북도|경상도]] [[합천군]] 각사면 치인리 [[해인사]][br]{{{-2 (現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해인사]])}}} || ||[[병사]] ([[입적]]) || || {{{#fff '''묘소'''}}} ||[[강원도]] [[고성군(강원도)|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유정의 기념관이 위치한 곳이며 이 곳에 유정의 비석이 있다. 이 곳에 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 {{{#fff '''학력'''}}} ||<사략> 수학 ([[1551년]])[br]황여헌의 문하 ([[1557년]])[br][[불교]] 출가, 신묵의 문하 ([[1559년]])[br]선과 급제 ([[1561년]])[br]과회 [[노수신]]의 문하 ([[1562년]])[br]서산대사 [[휴정(조선)|휴정]]의 문하 ([[1575년]]) || || {{{#fff '''직업'''}}} ||[[승려]], [[승병|승장]]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fff '''본관'''}}} ||[[풍천 임씨]] 정승공파[* 시조 12세손] || || {{{#fff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width=28]] [[조선]] || || {{{#fff '''공훈'''}}} ||알 수 없음[* 선무원종공신1등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목록에 없는 것으로 보아 다른 공신인 것으로 추정된다.] || || {{{#fff '''최종[br]관등'''}}}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br](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 || {{{#fff '''시호'''}}}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 || {{{#fff '''속성과[br]속명'''}}} ||임응규(任應奎) || || {{{#fff '''자'''}}} ||이환(離幻) || || {{{#fff '''호'''}}} ||송운(松雲), 종봉(鍾峯) || || {{{#fff '''당호'''}}} ||사명당(泗溟堂) || || {{{#fff '''종교'''}}} ||[[유교]] (성리학)[* 1559년 출가 이전], [[불교]][* 1559년 출가 이후] || || {{{#fff '''붕당'''}}} ||[include(틀:무소속)] || || {{{#fff '''작품'''}}} ||《사명당대사집(泗溟堂大師集)》[br]《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 || {{{#fff '''부모'''}}} ||부: 임수성 (任守成, ? - 1559)[br]모: 불명 (? - 1558) || || {{{#fff '''경력'''}}} ||{{{-1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대선[br]의승도대장[br]선교양종판사[br]선종 총섭[br]당상[br]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 || [목차] [clearfix] == 개요 == > 옳은 일이 아니고는 이로움을 찾지마라. 밝은 곳에는 해와 달이 있어서 비추고, 어두운 곳에는 귀신이 있어서 다 안다. 참으로 내 것이 아니거든, 털 한올이라도 탐하지 마라. >---- > 적장 [[가토 기요마사]]가 종이와 부채를 건네며 유정에게 글을 요구하자 써 준 글귀 중[* 1594년 왜군이 서생포(울산), 거제도, 창원 등에 성을 쌓으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유정이 권율 도원수의 지시에 따라서 서생포(울산)에 주둔한 가토 기요마사를 찾아가서 네 차례 회담을 하였다.] [[조선]] 중기의 [[승려]]이자 [[승병|승장(僧將)]]. 법명인 유정보다 당호인 사명당으로 더 유명하다. 오늘날에는 존경하는 뜻을 담아 '''사명대사(泗溟大師)'''라고 지칭할 때가 많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는 송운(松雲)이라는 당호를 더 즐겨 썼다.] 승려의 몸으로 국난이 닥치자 몸소 뛰쳐나와 의승(義僧)을 이끌고 전공을 세웠으며 전후의 대일 강화 조약 등 공훈을 세워 민족 의식을 발현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 생애 == [youtube(YoRLAH4nbM0)] > 그대 보지 못했던가? > 세거리 마을에 형 형 하면서 절하고 > 떠들썩한 저자에 아버지 아버지 하며 아는 것을. > > 또 보지 못했던가? > 주리면 밥 생각 목마르면 물 생각하여 > 앉으나 누우나 움직이나 고요하나 항시 따르는 것을. > > 고래가 성내어 바닷물 모두 마셔버리면 > 밝은 달에 산호가지는 훤히 드러난다네. > 종문[* 선종]의 옛 곡조 어떻게 부를 건가 생각컨데 > 돌 조각상 한밤중 옥피리를 불리라.[* "종문(선종)의 옛 곡조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에서 노승이 사명당에게 선종의 가르침을 물어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이 매우 문학적이고 아름답다. 이는 일종의 선문답이라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해석하자면 고래가 바닷물을 다 마실 리도 없고 돌 조각상이 옥피리를 불 리도 없으니,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 또한 그렇게 신비하게 숨겨져 있고, 또한 밝게 빛나며 아름다운 노래로 울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 >송원의 가장 큰 어르신인 노승에게 준 글귀 [[중종(조선)|중종]] 39년(1544) 음력 10월 2일 경상도 밀양도호부 상서이동면 고라리(現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400번지)에서 아버지 임수성(任守成, ? ~ 1559)[* 任守'''{{{+1 城}}}'''으로 표기된 자료도 있다.]과 어머니 [[달성 서씨]](? ~ 1558)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명종(조선)|명종]] 12년(1557) 13세 나이로 황여헌(黃汝獻)을 사사(師事)하다가 1558년 어머니가 죽고 1559년 아버지가 죽자 황악산 [[직지사]]에 들어가 신묵화상(信默和尙, ? ~ ?)에게 선(禪)을 받아 신묵(信默)의 가르침을 받아 승려가 되었고 이후 [[불교]]의 [[오의]](奧義)를 깨달았다. 명종 16년(1561) 선과(禪科)[* 승려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시험, 또는 임진왜란 당시에 공을 세운 승려들에게 내려 준 승려 자격증.]에 급제해 대선(大選)이 되었는데 조선 시대의 [[승과]]라는 점에서 특기할만한 일이다. [[문정왕후]]의 영향으로 잠깐 불교가 부흥하면서 벌어진 사건이었는데 문정왕후 시기 승과로 휴정과 유정 등 임진왜란 시기 [[승병]]을 이끈 지도자들이 대거 등장했으므로 참으로 절묘한 시점이었다. 승과 합격자들의 이후 활약만 봐도 문정왕후의 호불 정책은 적어도 본전은 건지고도 남았다. 사명당은 당시의 학자이자 시인들이었던 [[박순(조선)|사암(思菴) 박순(朴淳)]], [[허봉(조선)|하곡(荷谷) 허봉(許篈)]],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 ~ 1587) 등과 교제했다. 허봉과 교제하면서 허봉의 남동생을 제자로 들여서 가르친 적이 있었다. 이후 [[노수신]]의 문하에서 <[[노자]]>, <[[장자]]>, <문자』, <[[열자]]>와 시를 배웠다. [[선조(조선)|선조]] 8년(1575) 32세 나이로 선종(禪宗)의 주지에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서산대사 [[휴정(조선)|휴정]]에게서 가르침받아 각성했다. 이 일화에 설화적 상상력이 덧붙여져 사명대사가 자기 재주를 과시하다가 서산대사와 도술 대결을 벌인 후 이길 수 없음을 알고는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었다는 야사가 나왔다. 이후 유정은 금강산 보덕사(報德寺)에서 3년을 지내고 다시 [[팔공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유람했다. 선조 19년(1586) 43세 때 옥천산(沃川山) 상동암(上東菴)에서 하룻밤 소나기로 뜰에 떨어진 꽃을 보고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문도들을 해산시킨 다음 오랫동안 참선했다. 선조 22년(1589) 46세에 [[오대산]] 영감란야(靈鑑蘭若)에 있다가 [[기축옥사]]에 죄없이 걸렸으나 무죄 석방되어 [[금강산]]에서 3년 동안 지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설법으로 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대사 박서보 작 전쟁기념관, 한국문화정보원(공공누리).jpg|width=100%]]}}} || || 설법으로 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대사 (박서보 작)[* 1592년 금강산 [[유점사]]가 작품의 배경이다.] || >10월에 상남(湘南)[* 평안남도(平安南道) 중화군(中和郡). 평양(平壤)에서 불과 40여 km 떨어진 곳.]으로 의병이 건너가니 >나팔소리, 깃발(旗) 그림자. 강 옆 성에 흩날린다. >칼집 속 보검은 한밤중에 울부짖나니 >원컨대 [[왜군|요사]](妖邪)를 베어 성명[* 임금이 내린 명령]에 보답코자…. >---- > 의승병을 이끌고 평안도 순안으로 가던 유정대사가 읊은 시 선조 25년(1592), 49세 나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 순안에 가서 휴정의 휘하에 활약해서 의승도대장이 되었다. 1593년 3월 선교양종판사에 제수되었고 1593년 8월 경상도 선종 총섭에 임명된 적이 있다. 유점사에 있을 때 인근 9개 고을의 백성을 구출하기도 하고 휴정이 늙어서 물러나자 승군(僧軍)을 통솔하고 체찰사 [[류성룡]]을 따라 [[명나라]] 장수들과 협력하여 평양을 회복하고 도원수 [[권율]]과 함께 경상도 [[의령]]에 내려가 전공을 많이 세워 당상(堂上)에 올랐다. 1594년에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명나라)|유정]](劉綎)과 의논하고 [[가토 기요마사]]가 있는 울산 진중으로 세 번 방문하여 [[일본군]]의 동정을 살폈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와 나눈 문답은 두고두고 명언으로 전해진다. 자신의 진으로 몸소 찾아온 유정에게 가토가 '''"조선의 보배가 무엇이오?"''' 하고 묻자, 사명당은 '''"조선의 보배는 조선 것이 아니라 일본 것이오."''' 하고 답했다. 가토가 의아하게 여겨 그 보배가 무엇인지 묻자, 사명당은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당신의 머리를 보배로 생각하오."''' 하고 답했다. 조선에게 최악의 적장[* 가토는 한양을 점령한 뒤 왕릉을 파헤치고 경복궁을 불태웠으며 조선의 왕자들을 포로로 잡기까지 했다.]인 가토의 목을 베어 바친다면 조선에서 높은 벼슬을 받고 부유하게 살 수 있음을 뜻하는 것. 이 대답을 듣고 가토가 놀라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 명언은 일본에도 널리 퍼져 유정이 포로석방을 타진하고자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인들이 "이 사람이 보배 이야기를 했던 그 화상(설보화상)인가?"라고 입을 모았다고. 당시 일본에서도 이 문답이 널리 퍼졌던 모양이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적진에 들어가서 적장 앞에서 '네 목을 따서 바치면 여럿 팔자 고친다'는 식의 말을 하기란 웬만한 강심장 아니면 하기 힘들다. 유정의 대범함이 잘 드러나는 말. 기요마사와 4번 회담을 치렀으며 선조에게 토적보민사소, 을미상소언사를 올려 전시 대처와 부국강병에 대한 의견들을 전했다. [[왕]]의 [[환속|퇴속(退俗)]] 권유를 거부하고, 영남에 내려가 팔공(八公)·용기(龍起)·금오(金烏) 등의 산성을 쌓고 양식과 무기를 저축한 후 인신(印信, 도장이나 관인)을 되돌리고 산으로 돌아가기를 청했으나 허락을 얻지 못했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를 따라 울산의 도산(島山)에 쳐들어갔으며, 이듬해 명나라 장수 유정을 따라 순천예교(順天曳橋)에 이르러 공을 세워 종2품 가선대부(架善大夫)[* 종2품 하계의 계급 이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중추부의 동지사 보직.]에 올랐다. [youtube(zdVF5DKWHgk)] > 有約江湖晩 (강호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지 오래되었지만) > 紅塵已十年 (어지러운 세상에서 지낸 것이 벌써 10년이네) > 白鷗如有意 (갈매기는 그 뜻을 잊지 않은듯) > 故故近樓前 (기웃기웃 누각 앞으로 다가오는구나) >---- >일본 [[교토]]의 고쇼지(興聖寺)가 소장하고 있는 한시 유묵.[* 선조 38년(1605) 강화협상을 위해 일본에 갔을 때 고쇼지를 창건한 승려 엔니 료젠(円耳了然)에게 남긴 것으로, 2018년 BTN불교TV가 사명대사 다큐멘터리 촬영 중에 존재를 확인하여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 전시됐다.] 1604년(선조 37년) 국서를 받들고 [[일본]]에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포로 3천 5백 명을 데리고 이듬해 돌아와 가의대부(嘉義大夫) 직위인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와 어마(御馬: 임금이 타던 말)를 하사받았다. 그 뒤 휴정이 입적한 이듬해 묘향산에 들어가서 스승의 영탑에 애하고 치악산으로 들어갔다. 선조의 부보를 듣고 한양으로 달려와 배곡한 후 병을 얻어 [[광해군]]이 국토 서쪽을 지키게 했으나 응하지 못하고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입적했다. 사명당에게 약을 지어 보내는 등 병세를 걱정하던 광해군은 입적 소식을 매우 슬퍼했다고 하니, 조선시대 [[숭유억불]]이 일상인 가운데 왕에게 이렇게까지 대우받았던 승려도 없었다. 입적 후 다비한 사리는 합천 [[해인사]] 인근의 홍제암 부도에 안치했다. == 저서 == * 『사명당대사집』 7권 *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1권 == 여담 == * 해인사에 홍제존자비(弘濟尊者碑)[* 홍제는 사명대사의 다른 별칭이다. 널리 구제한다는 뜻.]가 있다. 이 비석은 한국 불교사에서 큰 의의가 있으니, '''무려 2백 년 만에 세워진 고승비이기 때문이다.''' 승려의 묘비라고 할 수 있는 고승비는 [[신라]], [[고려]] 때는 활발히 제작되다가 숭유억불을 채택한 조선 시대 들어서는 건국 직후인 태조 연간에 세워진 것을 제외하고 15세기, 16세기 200여 년 동안 단 하나도 건립되지 못하였다. 이 홍제존자비를 기점으로 우후죽순처럼 고승비가 세워져 19세기까지 고승비 170여 개가 세워졌다. * 인터넷상에 흔히 [[선조(조선)|선조]] 또는 [[광해군]]이 유정에게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설명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실은 [[허균]]이 홍제존자비의 비문을 쓰면서 개인적으로 올린 사시(私諡)이다. 유정이 입적하자 광해군이 안타까워하며 장례에 쓸 물품을 적당히 지원해주라고 명령하긴 했지만, 광해군이나 이후의 조선 임금이 법호나 시호를 내린 적은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법명 '유정'으로만 기록했다. * 저서로는 문집 《사명당대사집》7권, 《분충서난록》이 있다. * 유정이 [[승려]]가 된 사연을 두고 희한한 [[야사(역사)|야사]]가 하나 있다. 이야기에 따라 며느리가 [[자결]]하거나 며느리가 자결하려고 할 때 사명대사가 설득해서 며느리를 잘 돌려보냈다는 [[버전]]이 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사명대사가 승려가 된 건 13세 때이니 그냥 낭설일 가능성이 높다. >그가 진사로 있었을 때 아들 하나를 낳고 본처가 세상을 떠나자 후처와 후처가 낳은 아들을 맞아들였을 때 후처는 전처에 자식이 있으면 자신이 낳은 아들에게 불리할 것 같아서 임 진사 아들이 장가를 갈 때 종을 불러서 그 아들을 살해했다. 그 바람에 같이 자던 며느리는 신랑을 살해했다는 살해 누명을 받게 되었으며,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다가 어느 집에서 묵을 때 그 종이 후처의 명령으로 살해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중에 임 진사 집으로 가서 모든 사실을 털어놓자 임 진사는 종의 집으로 찾아와 아들을 죽인 증거를 찾아낸 다음 후처와 후처 소생들을 다 곳간에 가두어서 불태워 죽인 다음에 재산의 일부는 며느리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다 사용한 뒤 인생 무상을 느껴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 [[외교]] 활동을 하던 시절 야사가 제법 많고 판본도 다양한데 사명대사를 이야기하면 이 이야기들이 가장 유명하다. >사명당이 [[일본]]에 사절단으로 [[입국]]시 일본에서 [[지위]]가 높은 누군가가 '조선에서 오는 중이 영험하다던데 어디 [[시험]] 좀 해볼까?' 하는 생각에 [[항구]]에서 [[궁궐]]로 오는 길에 1만여 자가 넘는 [[글씨]]가 빼곡히 쓰인 [[병풍]]을 쭉 세워 놓고 사명당을 [[가마(탈것)|가마]]에 태운 다음 그 병풍 옆을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궁궐에 당도하자 그는 "이름 높은 스님께서 오셨구려! 어디 오시는 길에 병풍이 있던데 보았소?" 하고 물었는데, 사명당은 "아 그거요?" 하더니 병풍 속 [[글]]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밤새도록 좔좔 읊었을 뿐 아니라 오자가 하나 난 것까지 완벽히 짚어내어 [[일본인]]들을 [[데꿀멍]]시켰다. 판본에 따라서는 줄줄 외우다가 딱 한 폭만 말하지 못하자 그 이유를 물었는데 그의 대답은 "그런 것도 있었나? 난 못 봤소." 였고, 나중에 확인해보니 그 한 폭이 [[바람]] 때문에 접혀서 가려져 있었다고도 한다. >---- >숙소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오셨으니 대사 [[목욕]]이나 하셔야죠?" 하면서 욕탕으로 안내했다. 사명당은 욕탕에 들어서자 깜짝 놀랐는데 욕탕에 [[독사]]들이 드글드글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시험하려는 의도를 알아챈 사명당이 쥐고 있던 [[염주]]를 탕 안에 던져 넣자 염주가 무언가에 부딪쳐 탕 소리가 났고 독사들에게 닿지 않았다. 제 아무리 [[뱀]]이라도 온열탕에서 무사할 리 없으므로 욕탕의 밑바닥 두꺼운 [[유리]]판을 덮고 그 밑으로 독사들을 풀었던 것이다. 사명당은 그제서야 안심하고 탕에 들어가 목욕을 하였다. >---- >사명당이 침소에 들어가자 방바닥이 미친 듯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사명당을 태워 죽이려는지 숙소에 [[불]]을 잔뜩 땐 탓이다. 일본에는 온돌이 없어서 불을 지필 수 없다는 걸 고려해서 특별히 무쇠로 만든 방을 준비했다는 판본도 있다.[* 〈임진록〉에서는 [[구리(원소)|구리]]로 만든 방에다 넣고 밖에서 불을 피워 방을 달궜다고 한다. 〈[[맹꽁이 서당]]〉에서는 숙소에 불을 지피라고 명령받은 [[부하]]가 "맹꽁이 서당처럼 말이죠?" 라고 [[개그]]를 친다.] 사명당은 "이 놈들이 역시나…"하면서 얼음 빙([[氷]]) 자와 겨울 동([[冬]]) 자를 쓴 [[부적]]을 천장과 벽에다 붙여놓고 [[명상]]에 잠겼다. 사명당이 뛰쳐나오길 기다리던 일본인들은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었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 죽었나 싶어 방을 열었더니 방 안에 [[고드름]]이 얼어있었다.[* 이 일화는 〈[[머털도사와 108요괴]]〉에서도 나온다. 내기 [[요괴]]가 [[머털이]]를 오래 못 버티게 하려고 장작을 마구 쑤셔넣어서 [[온돌]]방을 데웠는데 문을 열어 보니까 방 안에 고드름이 얼어있고 머털이가 "으. 춥다. 문 닫아라." 라고 한다. 이 야사에서 몹시 추운 것을 빗대는 '사명당의 사첫방'이라는 [[속담]]이 나왔다. '사첫방'은 [[손님]]이 묵는 곳을 뜻하는 '사처'의 방이라는 말. [[국립국어원]] 표준대사전에 실리기는 했지만 지금은 잘 안 쓰이는 속담이다.] 어떤 판본은 이를 보자 반대로 얼려 죽일 수 있나 싶어 방 주위에 [[얼음]]으로 둘러싸고 [[소금]]을 쳐 놨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방문을 여니 [[찜질방]]이 되었더라는 얘기도 있다. 당연히 일본인들은 KO패를 인정하고 만다. >---- >다른 판본에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사명당을 시뻘겋게 달아오른 철마 위에 앉히려 하자 사명당이 결국 폭발하여 [[팔만대장경]]을 외우자 일본 전역에 [[태풍]]이 불어 대[[홍수]]가 나버리고[* <임진록>에서는 [[용]]이 내려와 왜왕이 기대고 있던 누각을 신나게 흔들어댔다고 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제서야 잘못을 빌자 일본인의 대를 끊기 위해 매년 일본인 [[여자]] 아이의 가죽 300장과 일본인 [[남자]] 아이의 불알을 석 섬 서 말씩 [[조공]]으로 바치라 해서 결국 도쿠가와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간신히 모면했다고도 전한다.[* 하도 쇼킹한 [[스토리]]라서 [[아동]]용에서는 다시는 [[전쟁]] 못 일으키게 [[철(원소)|쇠]]를 왕창 뜯어냈다고 바꾸었다. 왜왕이 "어떻게 그 많은 쇠를 마련하겠습니까?"라고 변명하자 "전쟁 일으키려고 만든 [[무기]] 녹이면 되지 않나?" 하고 데꿀멍을 하게 만든다.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어느 패전국이라도 차라리 죽을 각오로 다시 싸울지언정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애초에 아무리 조선이 일본의 침공을 격퇴했으나 그 과정에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이런 요구를 하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말이다. 전해지는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사명대사가 인피를 공물로 요구하자 일본의 [[공주]] 하나가 "나부터 벗겨라."라고 [[저주]]하며 자진했다고 한다. 전쟁 직후 [[조선인]]의 일본인에 대한 분노가 이만큼 컸다는 반증이다.] 이후 [[귀국]]한 사명당은 금부도사의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 판본에 따라서는 [[바다]] 위에 구리 방석을 올려놔 그 위에 앉도록 했는데 사명당은 구리 방석을 가볍게 들어 바다에 내던지고 태연하게 앉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철로 지은 집에 가두고 불을 질렀는데도 무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상당수 내용이 <[[임진록]]>과 겹치고 거슬러 올라가면 <[[최고운전]]>의 흔적까지 보이는데 소설을 바탕으로 야사를 지어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 심지어 [[유몽인]]이 민중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 문학 또는 구비 문학인 야담을 모은 <[[어우야담]]>을 바탕으로 생겨난 야사도 있다. >사명당이 절에 거주할 때, 왜군이 쳐들어와서는 행패를 부리는데, 장수와 필담을 나눴던 일화가 있다. 장수가 '''"죽고 싶지 않거든 이 절의 보배를 가져오라"'''[* 일본에서는 불교를 국교로 한 이후 특별한 탄압이 없었고 덕분에 불교는 쑥쑥 자라나 헤이안 시대 말 그 강력한 후지와라 씨를 억누르고 강력한 왕권을 누렸던 시라카와 덴노조차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졌으며 센고쿠 시대에 이르면 일개 절 하나가 아예 '''영주''' 노릇까지 할 정도로 성장했기 때문에, 장수가 여기도 그러려니 하고 보물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렸을 법도 하다. 근데 일본에서 그랬으면 그 절에 소속된 승병들에게 개털렸을 거라는 게 함정.] 했으나, 사명당이 '''"절에서 풀 뿌리와 나무 껍질로 배를 채우는 승려들에게 무슨 보물이 있겠는가?"''' 한 후, '''"그대도 학식과 견해가 있을진대, 장수된 이로서 이쯤하고 물러가라."''' 하고 필담을 끝낸 후, 탄복한 장수가 절 앞 귀퉁이에 "이 절에는 고승이 계시니, 왜군은 굳이 올라가 절을 뒤지지 말 것."이라 적어 그 절은 안전했다고 한다. 《어우야담》에 전하는 야사. * [[휴정(조선)|서산대사]]를 찾아가서 [[도술]] 내기를 한 이야기가 있다. 이 도술 이야기는 사명당이 서산대사를 찾아갔을 때 나눈 선문답에 살이 붙은 듯하다. >사명당이 서산대사가 머무는 암자로 올라가며 시냇물을 거꾸로 흐르게 하고 있었는데 어린 상좌 한 명이 내려오며 '스승님께서 시냇물을 거꾸로 흐르게 하며 올라오는 분을 모셔오라 하셨습니다.'라고 했다. 이 때 사명당은 소매 속에 새를 한 마리 숨겨가서 서산 대사에게 '이 새는 살았을까요, 죽었을까요?'라고 묻자 서산 대사는 '그야 당신 마음에 달린 것이지요. 하지만 살생을 하지 않으실 분이니 살아있겠지요.'라고 대답한 후 돌계단 중간에 서서 '내가 내려갈까요, 도로 올라갈까요?'라고 반문했다. 사명 대사는 한참 생각한 후 '손님을 맞으러 오셨으니 응당 저를 맞이하려 내려오실 것입니다.'라고 대답했고 서산 대사는 그 말대로 내려와 사명당을 맞아들였다. 이후 사명당은 계란 백 개를 쌓았올렸는데, 서산대사는 계란 백 개를 허공에서 거꾸로 쌓아내렸다. 사명당은 바늘 백 쌈을 가져오게 하더니 그것을 국수로 변하게 했다. 그러자 서산대사는 그 국수를 먹더니 입에서 바늘 백 쌈을 뱉어냈다. 사명당이 손을 들자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서산대사가 손을 들자 떨어지던 비가 모두 거꾸로 하늘로 올라가고 다시 날이 개었다. 이에 사명당은 서산대사의 도술에 감탄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다. * 서산대사에게 [[강의]]받던 시절에 그에게 불손하게 굴다 [[역관광]]당하고 감복하는 내용의 일화도 있다. * 이런 야사들의 공통점은 사명당의 [[성격]]이 괄괄하다는 것. 이야기가 와전되고 바뀌는 와중에도 인물상 자체가 크게 변하지는 않은 것이다.[* 동시대인인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도 유정은 고승이지만 휴정에 비하면 인품이 비루하다고 나온다.] * 수염이 덥수룩하지 않은 영정이 없다시피 하고 본인의 시 재마도객관에서도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 수염을 많이 길렀던 것으로 보인다. 휴정이 머리는 깎았으면서 왜 그냥 두었냐고 묻자 머리를 깎은 건 속세를 떠났다는 뜻이고 수염을 둔 것은 대장부의 기개를 나타낸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 [[경상남도]] [[밀양시]]에 사명대사를 기리는 표충비가 있는데 국난이 있을 때마다 땀 흘리는 비석으로 유명하다. * [[허균]]의 동복 형 [[허봉(조선)|허봉]]과 친한 관계였으며, 허균은 사명당의 제자가 되어서 불교와 문학을 배웠다. * 싸우기만 하지 않고 강화 협상에 나선 인물이어서인지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도 기요마사가 유정을 두고 "귀국에서는 당신만이 거짓이 없고 다른 사람은 신용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든지 이에야스가 그의 사람됨에 감복했다고 하고 억불 기조가 강했던 조선보다도 일본에서의 평가가 높았다는 등 호의적으로 기술된 편이다. == 대중매체에서 == * 1963년작 영화 [[사명당]]이 있다. 사명대사역에 배우 [[김진규(배우)|김진규]] 이외에 [[최남현]], [[허장강]] 등이 출연하는 당시로서는 대작이다. * 게임 <[[임진록]]>에서는 지팡이에서 나오는 번개로 공격하는 장수로 낙뢰술과 기우제를 쓸 수 있다. 기우제와 지진술을 쓸 수 있는 [[사이쇼 조타이]]와 쌍벽을 이루는 [[스님]] 장수. 등장했던 [[미션]]이 워낙 적었는데 정확히는 메인 [[브리핑]]에 나오지 못한 탓이다. * 게임 <[[천하제일상 거상]]>에서는 레벨 90이 되면 자신의 스승인 [[휴정(조선)|서산대사]]로 전직한다. [[파계승(천하제일상 거상)|제자]]와 달리 서산대사의 뇌격진은 엄청난 범위와 엄청난 데미지로 등장과 동시에 [[조선]] 데미지 딜러 역할을 바로 가져왔다. 소환시 대사가 "사명대사 대령했습니다." * [[김은정(만화가)|김은정]]의 만화 <[[아스피린(만화)|아스피린]]>에서는 [[단군]]이 다스리는 [[조선]]의 수석 [[마법사]]이자 [[왕]]의 조언자로 등장하는데 실존했던 사명대사에게서 이름만 빌려온 전혀 다른 성격의 [[캐릭터]]이다.[* 이 만화의 등장인물들은 다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단군, 사방신 등과 함께 [[흑막]]을 이루는 인물로 수석 마법사답게 강력한 마력을 지녔고 단군처럼 [[성격]]은 대체로 능글맞고 교활하다. 단군처럼 이미 나이가 많은 [[노인]]이지만 스스로에게 마법을 걸어 아직 젊고 잘생긴 청년의 모습이다. 전 수석 마법사는 사명당과 단군의 짜짜꿍에 의해 [[숙청]]당했는데 작중 내내 단군의 곁에 붙어다니며 그와 함께 정국을 논하거나 무엇인가 음모를 짜는 듯하다. * [[KBS]]에서 방영한 <[[역사스페셜]]>에서는 [[임진왜란]] 관련 주제를 다루던 편에서 [[명나라]] 육군 제독 [[유정(명나라)|유정(劉綎)]]의 초상으로 사명당의 초상이 나온 적이 있었다. 제작진이 사명당의 법명인 유정(惟政)과 헷갈린 듯. * 2015년 [[KBS]] 드라마 <[[징비록(드라마)|징비록]]>에서는 배우 [[박병호(배우)|박병호]]가 연기했다. * [[영웅 for Kakao]]에서도 등장한다. * [[전지적 독자 시점]]에 수식언 '대머리 의병장'으로 등장한다. * 80년대 계몽사에서 출간된 사명당 위인전에선 마성의 남자로 그려진다. 유정이 승려가 되기 전 친누이를 비롯해 총 3명의 여성이 유정의 출가를 말리지만, 유정의 뜻을 꺾지 못했고, 이후 이들도 유정의 뒤를 따라 출가해 비구니가 된다. == 관련 문서 == * [[포항 대성사 소장 금동여래좌상]] [[분류:조선의 승려]][[분류:임진왜란/군인]][[분류:조선 의병장]][[분류:외교관]][[분류:1544년 출생]][[분류:1610년 사망]][[분류:밀양시 출신 인물]][[분류:풍천 임씨]][[분류:아스피린(만화)/등장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