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춘추전국시대/인물]][[분류:초한쟁패기/인물]][[분류:기원전 193년 사망]] [목차] == 개요 == [[진나라]] 말기와 [[초한쟁패기]]의 인물로 [[유태공]]의 둘째 아들이자 [[유백(전한)|유백]]의 동생이며, [[고제(전한)|유방]], [[유교(전한)|유교]]의 형이다. 이름은 [[백중숙계]]에서 따온 유중(劉仲)이며 희(喜)라는 이름도 있다. == 생애 == [[고제(전한)|유방]]에 따르면 [[유태공]]이 유방은 유중처럼 노력하지 않는다고 꾸중한적도 있다고 하니, 난세가 오기 전에는 양아치였던 동생 유방보다는 성실히 가장 노릇을 한 모양. [[초한쟁패기]] 당시 활약상은 불분명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유방은 그를 대나라의 왕으로 임명했다. 단 임명된 시기는 애매한 것이 [[사기(역사책)|사기]]의 오왕비열전과 고조본기에 따르면 유방이 [[백등산 전투]]에서 흉노에게 깨진 후 귀환하는 길인 고제 7년(기원전 200년)에 그를 대나라 왕으로 삼았다. 하지만 [[고조공신후자연표]]와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를 따르면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후 고제 6년(기원전 201년)에 왕으로 삼았다. 전자가 맞다면 유방 딴에는 둘째 형의 능력을 믿어서 [[흉노]]와의 전선인 대나라를 맡긴 것이며, 후자에 따르면 통일 후 나름대로 포상을 해준 것인데 무엇이 옳은지는 불분명. 단, 그가 흉노에게 패하는 등 썩 좋은 군재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기에 후자가 옳을 가능성이 크다. 왕이 됐지만 흉노와의 싸움에서 크게 져서 나라조차 버리는 추태를 보였고[* 사기에 따르면 고제 8년(기원전 199년)이며 한서에 따르면 고제 7년(기원전 200년)] 낙양으로 달아났다. 다행히 동생이 황제인 덕에 목숨은 건졌으며 합양후(郃陽侯)로 강등만 당했다. 그 후에는 조용히 살아간 듯 하며 [[혜제]] 2년(기원전 193년)에 사망했다. 오왕이며 [[오초칠국의 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유비(전한)|유비]]가 그의 아들이다. 시호는 대경왕(代頃王). == 둘러보기 == ||||||||||||<:> '''[[전한|{{{#ffffff 전한의 대왕(代王)}}}]]''' || ||<:> 신규 책봉 || {{{+1 ←}}} ||<:> '''초대 경왕 유중''' || {{{+1 →}}} ||<:> 2대 [[유여의|은왕 유여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