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2> '''{{{#fff 북위의 황후[br]{{{+1 幽皇后 | 유황후}}}}}}''' || || '''[[시호|{{{#fff 시호}}}]]''' ||<(> 유황후(幽皇后) || || '''[[성씨|{{{#fff 성}}}]]''' ||<(> 풍(馮) || || '''{{{#fff 출생}}}''' ||<(> 미상 || || '''{{{#fff 사망}}}''' ||<(> [[499년]] [[5월]] || || '''{{{#fff 능묘}}}''' ||<(> 장릉(長陵) || || '''{{{#fff 본적}}}''' ||<(> 장락군(長樂郡) 신도현(信都縣) || ||<|2> '''{{{#fff 재위}}}''' || '''{{{#fff 북위의 황후}}}''' || || [[497년]] [[8월 22일]] ~ [[499년]] [[4월 26일]] || || '''{{{#fff 부모}}}''' ||<(> 부친 풍희(馮熙)[br]모친 상씨(常氏) || || '''{{{#fff 부군}}}''' ||<(> 고조 [[탁발굉|효문황제]] (高祖 孝文皇帝) || [목차] [clearfix] == 개요 == 북위의 고조 효문제 [[탁발굉]]의 부인. [[문성문명황후 풍씨|풍태후]]의 조카. 태사 풍희의 딸. [[폐황후 풍씨]]의 이복언니. == 생애 == 풍태후는 자신의 권세를 공고히 하고자 조카딸인 풍씨와 그 여동생을 효문제 탁발굉에게 시집보냈다. 풍씨의 여동생은 효문제의 후궁이 된지 얼마 안 가 요절했지만, 당시 14세였던 풍씨는 귀여운 모습과 애교많은 성격 덕에 효문제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태화 13년(489년), 풍씨가 어느날 갑자기 병이 드니, 풍태후는 그녀를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비구니가 되어 병을 다스리게 하였다. 효문제는 풍씨가 황궁을 떠난 이후에도 계속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어, 이듬해 풍태후가 승하하자 효문제는 풍태후의 상을 무사히 마친 뒤 풍씨를 여러 번 방문하였다. 태화 19년(495년), 효문제는 풍씨의 병이 완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환관을 보내 새서(璽書)로 풍씨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그리고 낙양에서 마중나가 풍씨를 친히 영접하고, 그녀를 좌소의(左昭儀)로 삼아 밤낮으로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하니 총애가 처음과 같았다. 효문제의 풍씨를 향한 총애가 깊어질수록 풍황후에 대한 사랑은 나날이 식어갔으며, 결국 풍씨의 참언을 믿고 태화 20년(496년)에 풍황후를 폐출시켰다. 태화 21년(497년) 7월, 효문제가 풍씨를 황후로 높이고, 그녀로 하여금 태자 [[원각]]을 양육케 하였다. 풍씨가 황후가 되기 직전에 원각의 생모인 후궁 [[문소황후 고씨|고씨]]가 공현(共縣)을 지나다가 우연히 누군가에게 참혹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기에, 풍씨가 고씨를 죽였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졌다. 황후에 오른 풍씨는 효문제가 친정에 나갈 때마다 환관 고보살(高菩薩)과 사사로이 정을 통했다. 이후 효문제가 현호(懸瓠)에서 병에 걸려 앓아눕자, 풍씨는 더욱 기고만장해져 꺼리낌 없이 행동하고 중상시 쌍몽(雙蒙) 등을 심복으로 두었다. 중상시 극봉(劇鵬)이 풍씨에게 간언했으나, 풍씨가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 두려움에 자살하기도 하였다. 또, 풍씨는 송왕 유창(劉昶)이 사망하여 과부로 지내고 있던 효문제의 여동생 팽성공주(彭城公主)를 자신의 동복동생인 북평공 풍숙(馮夙)과 혼인시켜 권력을 확고히 다지려 하였다. 효문제가 혼인을 허하자, 혼인을 원치 않았던 팽성공주는 시종 10여 명과 함께 몰래 낙양을 빠져나와, 비를 뚫고 현호로 달려갔다. 이윽고 팽성공주는 현호에 이르러 효문제를 만나 지금의 상황을 호소하고, 풍씨와 고보살의 관계부터 시작해서 풍씨의 만행을 낱낱이 고하였다. 효문제는 팽성공주의 이야기를 듣고 크게 놀라 일단 이 일에 관해서는 비밀로 했는데, 효문제의 곁에서 병시중을 들고 있던 팽성왕 원협(元勰)이 풍씨에게 일러바쳤다. 그제서야 두려운 마음이 생긴 풍씨는 어머니 상씨와 더불어 막대한 돈으로 무당을 섭외하여 효문제가 현호에서 그대로 병사하기를 저주하였다. 그러나 풍씨 모녀의 저주는 소용이 없었고, 효문제는 낙양으로 돌아와 고보살과 쌍몽 등 6명을 심문하여 그들의 자백을 받아냈다. 효문제는 밤에 풍씨를 함온실(含溫室)로 부르고, 고보살 등은 함온실 문 바깥에 나란히 세워두었다. 풍씨가 방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효문제는 환관들에게 명해 그녀의 옷을 수색케 하고, 만일 한 치의 칼이라도 나오면 바로 참수하겠노라고 엄포하였다. 이에 풍씨가 머리를 조아리고 울면서 자신의 죄를 시인하니, 효문제는 풍씨에게 어상에서 2장 정도 떨어진 동쪽 기둥 옆에 앉으라 명했다. 풍씨가 기둥 곁에 앉자, 효문제는 이어서 고보살 등에게 본인들 입으로 사정을 모두 진술케 하고, 그들의 진술이 끝나자 다시 풍씨를 보고 책망하며 말했다. > "네 어머니가 요술을 부렸다 하였는데 어디 한번 자세히 말해보아라." 풍씨는 효문제에게 전부 털어놓을 테니 좌우의 사람들을 물리칠 것을 청했다. 효문제가 좌우의 신하들에게 나가라 지시하고, 장추경 백정(白整)만 남게 하여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였다. 함온실에서 효문제가 백정의 귀에 할 말을 속삭이고, 백정은 그것을 다시 작은 소리로 황후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조용히 대화가 오가니, 문 밖에 있는 사람들은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알 수 없었다. 얼마 뒤, 효문제는 풍씨와의 대화를 끝내고 동생인 팽성왕 원협과 북해왕 원상(元詳)을 방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그동안 형수였던 풍씨와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하였다. 이후 풍씨의 거처는 후궁(後宮)으로 옮겨졌으나, 여러 비빈들은 이전처럼 풍씨를 황후의 예로 받들었고, 오직 태자 원각과의 알현만이 금지되었을 뿐이었다. 태화 21년(499년) 4월, 또다시 남정하여 마권성(馬圈城)까지 내려갔던 효문제는 병이 다시 악화되어 곡당원(穀塘原)으로 물러났는데, 병에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죽음을 확신한 효문제는 팽성왕 유협을 불러 당부했다. > "후궁(後宮)은 오랫동안 음덕(陰德)을 거슬렀고, 스스로 하늘에 순종하지 않았다. 만약 이를 일찍 알지 못했다면 한나라 말기의 상황이 재현됐을 것이라 생각하니 두렵구나. 내가 죽으면 풍씨를 자결케 하고, 황후의 예로 장사를 지내주어 풍씨 가문의 큰 과오를 덮도록 하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효문제가 곡당원에서 붕어하였다. 효문제의 관이 노양(魯陽)에 이르렀을 때, 북해왕 원상은 효문제의 유조를 받들어 장추경 백정 등을 보내 풍씨에게 사약을 내리게 하였다. 풍씨는 사약을 뿌리치고 도망치면서 소리쳤다. > "폐하께서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여러 왕들이 멋대로 나를 죽이려는 것이다!" 하지만 백정은 아랑곳 않고 풍씨를 붙잡아 강제로 약을 전부 입에 흘려 넣었다. 풍씨는 사망하여 황후의 예로 장사가 치러졌다. 효문제의 관이 낙양 남쪽에 이르렀을 때, 재궁(梓宮)을 호송하던 함양왕 원희(元禧)와 여러 왕들은 풍씨의 최후에 대해 전해듣고는 서로 바라보며 말했다. > "설령 유조가 없었더라도 우리 형제들은 마땅히 그녀를 제거할 계책을 세웠을 것이다. 어찌 품행이 올바르지 않은 부인으로 하여금 천하를 다스리게 하고, 우리를 죽이게 놔둘 수 있겠는가?" 이후 풍씨는 효문제와 장릉(長陵) 합장되었다. 시호는 '유황후(幽皇后)'. [[분류:남북조시대/황후]][[분류:499년 사망]][[분류:헝수이시 출신 인물]][[분류:독살형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