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2> '''{{{#fff 당나라의 대신[br]천수간공(天水簡公)[br]{{{+1 尹思貞 | 윤사정}}}}}}''' || || '''{{{#fff 작호}}}''' ||천수군공(天水郡公) || || '''{{{#fff 시호}}}''' ||간(簡) || || '''{{{#fff 성}}}''' ||윤(尹) || || '''{{{#fff 이름}}}''' ||사정(思貞) || || '''{{{#fff 생몰연도}}}''' ||640년 ~ 716년 || || '''{{{#fff 출신}}}''' ||옹주(雍州) 장안현(長安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인물. == 생애 == 옹주(雍州) 장안현(長安縣) 출신으로 640년에 태어났다. 명경과에 급제하여 융주(隆州) 참군으로 보임되었다. 당시 융주 진안현(晉安縣)에는 포씨(蒲氏)라는 호족이 불법을 저질렀는데, 이전의 관리들은 포씨를 능히 처벌하지 못했다. 주에서 윤사정에게 포씨를 심문하라는 명이 내려오자, 윤사정은 포씨의 뇌물을 모두 적발하여 사형을 내렸으며, 이를 통해 윤사정은 이름을 알렸다. 이후 명당현령(明堂縣令)[* 명당현은 666년 만년현(萬年縣)에서 분할되어 703년까지 존속하였다.]이 되어 선정을 펼쳤으며, 전중소감으로 옮기고 검교 명주(洺州) 자사를 맡았다. [[손만영]]이 반란을 일으키자, 윤사정은 백성들을 어루만졌고 [[측천무후]]가 윤사정을 칭찬하였다. 장안 연간[* 701년~704년]에 형부시랑[* 이때는 관명을 바꿔서 추관시랑이라고 하였다.]으로 옮겼지만 [[장창종]]에게 미움을 사고 참소를 당하여 정주(定州) 자사로 좌천되었고 진주(晉州) 자사로 전임되었다. 이후 다시 입조하여 태부소경[* 마찬가지로 이때는 사부시(司府寺)이라고 하였다.]이 되었는데, 당시 태부경이었던 후지일(侯知一)과 함께 호된 모습을 보여서 "후지일의 몽둥이는 두려워하지 않는데 윤사정의 붓을 두려워한다"는 평이 나오기도 했다. [[신룡정변]] 이후에는 대리경이 되었다. 당시 권신은 [[무삼사]]였는데, 위월장(韋月將)이라는 인물이 무삼사가 반드시 반역을 일으킬 것이라고 알렸다. 이에 [[중종(당)|중종]]은 위월장을 참수하도록 명하였지만, 윤사정은 사형을 집행하는 달을 문제삼아 반대했고 대신 위월장을 장형에 처하고 영남으로 유배시켰다. 무삼사가 위월장을 죽이려고 하고 어사대부 이승가가 무삼사에게 동조하자, 윤사정은 이승가를 비난했다. >공은 제멋대로 위복을 부리고 헌장을 돌아보지 않고 간신에게 기대어 궤도를 벗어난 짓을 도모하고 장차 충량한 이들을 먼저 몰아내고 제멋대로 행동하려는 것입니까? 이승가는 윤사정에게 분노하여 윤사정을 탄핵했으며, 윤사정은 청주(靑州) 자사로 좌천되었지만 13개 주의 자사를 역임하며 선정을 펼쳤다. [[예종(당)|예종]]이 즉위한 뒤, 장작대장(將作大匠)으로 임명되고 거듭 천수군공(天水郡公)으로 책봉되었다. 이때 두회정이 금선공주(金仙公主)와 옥진공주(玉眞公主)를 위하여 도교의 사원을 짓고자 인부들을 대규모로 징발하였다. 하지만 윤사정은 자주 인부들의 수를 줄였고 두회정이 이를 질책하자 윤사정은 소매를 뿌리치고 두회정을 떠났다. 두회정이 주벌된 뒤에는 어사대부로 전임되고 신왕부(申王府) 장사를 겸임하였으며, 호부상서, 공부상서를 역임했다가 716년 병으로 사망하여 황문감(黃門監)으로 추증되었고 간(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참고자료 == * 『[[구당서]]』 * 『[[신당서]]』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640년 출생]][[분류:716년 사망]][[분류:시안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