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동명이인]][[분류:조선의 문관]][[분류:1729년 출생]][[분류:몰년 미상]] [목차] == 개요 == 성씨가 '[[윤(성씨)|윤]]', 이름이 '석렬'인 사람의 목록이다. == 목록 == ===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윤석열]](尹錫悅)의 오기(誤記)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윤석열/여담)] [[윤석열]]의 '열'은 '''기쁠 열'''([[悅]]) 자로 [[두음법칙]]과 관계 없이 본음이 '열'이기 때문에 '윤석렬'로 표기될 수 없다. 윤석열이 본인의 이름을 '''[윤서결]'''이 아닌 '''[윤성녈]'''로 발음해달라고 요청한 바가 있어 방송에서도 그렇게 발음하기 때문에 이것이 듣는 이로 하여금 혼동을 유발하는 듯하다. 윤석열을 싫어하는 진보 진영 등에서는 오기임을 알면서도 일부러 쓰기도 한다. === [[조선]] 후기의 문신 === 尹錫烈, [[1729년]] ~ 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 윤씨|해평]](海平), 자는 지중(祉仲).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윤사동(尹師東)이고, 어머니는 [[반남 박씨]]로 박사설(朴師卨)의 딸이다. 아래로 남동생 [[진사]] 윤흠렬(尹欽烈, 1734 ~ ?)이 있었다. [[1750년]](영조 26) 식년 [[진사|진사시]]에 2등 25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750_022430|입격했는데]], 당시 방목(榜目)에 '이석렬(李錫烈)'로 오기되어 있었다는 [[http://sjw.history.go.kr/id/SJW-F26020190-01400|기록이 있다]]. [[1762년]](영조 38) 6월 22일에 [[의금부]] 도사(都事)에 [[https://sjw.history.go.kr/id/SJW-F38060220-01600|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이튿날인 6월 23일 제용감 봉사(濟用監奉事, 종8품)가 [[https://sjw.history.go.kr/id/SJW-F38060230-00500|되었다]]. 1763년(영조 39) 6월 20일 의영고 직장(義盈庫直長, 종7품)이 [[https://sjw.history.go.kr/id/SJW-F39060200-01000|되었고]], 그해 10월 22일 치러진 증광 문과에 병과 8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763_009848|급제해]] 10월 30일 [[승정원]] 가주서(假注書, 정7품)[* [[승정원]]에 속한 임시적인 벼슬로, 주서(注書)가 부재할 때 그 일을 대신 맡아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물을 관리하였다.]에 [[https://sjw.history.go.kr/id/SJW-F39100300-01400|임명되었다]]. 이후 11월 2일과 1764년(영조 40) 2월 18일 부사정(副司正, 종7품)에 [[https://sjw.history.go.kr/id/SJW-F39110020-01400|임명]][[https://sjw.history.go.kr/id/SJW-F40020180-03400|된 것]], 1764년 4월 8일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에 [[https://sjw.history.go.kr/id/SJW-F40040080-00200|임명되어]] 4월 24일 병으로 면직된 것, 12월 6일 정자(正字, 정9품)로 [[https://sjw.history.go.kr/id/SJW-F40120060-01200|있었던 것]] 외에는 줄곧 승정원 가주서로서 직무를 수행했다. 이후 1764년 12월 25일 [[성균관]] 전적(典籍, 정6품) 및 사정(司正, 정7품)에 [[https://sjw.history.go.kr/id/SJW-F40120250-00800|임명되었고]], 1765년 1월 2일 [[사헌부]] 지평(持平, 정5품)이 [[https://sjw.history.go.kr/id/SJW-F41010020-00800|되었다]]. 1월 14일 [[https://sjw.history.go.kr/id/SJW-F41010140-00900|부사과]](副司果, 종6품), 5월 14일 [[https://sjw.history.go.kr/id/SJW-F41050140-01000|세자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司書, 정6품)를 거쳐 9월 24일 [[병조]] 좌랑(佐郞, 정6품)에 [[https://sjw.history.go.kr/id/SJW-F41090240-00900|임명되었으나]], 10월 17일 병이 위중해 면직되었다. 1766년(영조 42) 4월 16일 [[사간원]] 정언(正言, 정6품)에 [[https://sjw.history.go.kr/id/SJW-F42040160-02700|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병환으로 인해 6월 18일 [[https://sjw.history.go.kr/id/SJW-F42060180-02900|사직했다]]. 1767년(영조 43) 1월 15일 조정에 복귀해 [[https://sjw.history.go.kr/id/SJW-F43010150-00900|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 정5품)에 임명되었고, 2월 19일 병조의 인사 행정을 담당하는 병조 정랑(正郞, 정5품)에 [[https://sjw.history.go.kr/id/SJW-F43020190-00900|임명되었다]]. 11월 14일에는 경기도사(京畿都事, 종5품)가 [[https://sjw.history.go.kr/id/SJW-F43110140-01100|되었다]]. 1768년(영조 44) 10월 17일 [[홍문관]] [[https://sjw.history.go.kr/id/SJW-F44100170-02200|부수찬]](副修撰, 종6품), 11월 3일 홍문관 [[https://sjw.history.go.kr/id/SJW-F44110030-03000|수찬]](修撰, 정6품), 11월 19일 홍문관 [[https://sjw.history.go.kr/id/SJW-F44110190-02500|부교리]](副校理, 종5품) 등 홍문관의 요직을 두루 거쳤고, 1769년(영조 45) 3월 28일에는 [[https://sjw.history.go.kr/id/SJW-F45030280-01400|서학 교수]](西學敎授, 종6품), 3월 29일 사간원 [[https://sjw.history.go.kr/id/SJW-F45030290-03000|헌납]](獻納, 정5품), 4월 9일 사헌부 [[https://sjw.history.go.kr/id/SJW-F45040090-02900|집의]](執義, 종3품), 4월 18일 [[https://sjw.history.go.kr/id/SJW-F45040180-05600|사직]](司直, 정5품), 10월 5일 홍문관 [[https://sjw.history.go.kr/id/SJW-F45100050-02600|교리]](校理, 정5품) 등을 역임했다. 1770년(영조 46) 10월 19일 [[https://sjw.history.go.kr/id/SJW-F46100190-01800|강진현감]](康津縣監, 종6품)에 제수되었고, 1771년(영조 47) 5월 11일 [[서오릉|명릉]](明陵)의 고유제(告由祭:중대한 일을 치른 뒤에 그 내용을 적어서 신명에게 알리는 제사)에서 축문을 읽는 대축(大祝)이 되었는데, 직함이 없어 군직(軍職)을 [[https://sjw.history.go.kr/id/SJW-F47050110-01600|부여받은 이후로]] 더 이상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후 [[https://sjw.history.go.kr/id/SJW-G18030120-03400|1794년(정조 18) 3월 12일 승정원일기 기사]]에서 윤석렬의 남동생 윤흠렬을 '故校理錫烈弟也.(죽은 교리 윤석렬의 아우입니다.)'라고 칭하는 것으로 보아 1771년에서 1794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 기타 인물 === * 尹錫烈 - [[일제강점기]]의 [[순사]]이다. [[1920년]] 각종 신문에 그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 尹錫烈 - [[1949년]] 당시 [[남조선로동당]]의 [[영등포구]] 책임자. [[1949년]] [[9월 14일]] 당원 30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 尹錫烈 - [[1952년]] 당시 제주도경찰국장이다. [[1952년]] [[2월 12일]]자 [[경향신문]] 2면에 윤석렬 제주도경찰국장이 '이제는 일대일로 나갈 수밖에 없다. [[공비]] 한 놈을 죽이려면 경찰관도 한 사람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등의 강경 발언을 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동년 [[10월 15일]] [[동아일보]] 2면에는 당시 [[내무부]]에서 윤석렬을 해임하고 후임 경찰국장으로 이경진(李慶進)을 임명하였다고 쓰여져 있다. 다만 [[https://www.jjpolice.go.kr/jjpolice/info/leader.htm|제주경찰청 웹사이트의 '역대국장' 정보란]]에는 제14대 경찰국장 성명으로 '''윤석영'''이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