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구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주장)]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bottom, #DDDDDD 0%, #FFFFFF)" {{{+1 {{{#000000,#e5e5e5 ''' 대한민국의 농구인 '''}}}}}}}}}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201002 윤영필.jpg|width=100%]]}}} || ||<-3> '''{{{+2 {{{#000000 윤영필}}}}}}[br]{{{#000000 尹映弼}}}''' || ||<|2><-2> {{{#000000 ''' 출생 ''' }}} ||[[1975년]] [[11월 13일]] ([age(1975-11-13)]세) || ||[[서울특별시]] [[성북구]] || ||<-2> {{{#000000 ''' 국적 ''' }}}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 ||<-2> {{{#000000 ''' 본관 ''' }}} ||[[해평 윤씨]][* 26세손] || ||<-2> {{{#000000 ''' 신체 ''' }}} ||[[키(신체)|키]] 193cm|[[체중]] 105kg || ||<-2> {{{#000000 ''' 포지션 ''' }}} ||농구선수([[파워 포워드]], [[센터(농구)|센터]] / ^^은퇴^^) || ||<-2> {{{#000000 ''' 학력 ''' }}} ||[[서울도곡초등학교]] {{{-2 (졸업)}}}[br][[휘문중학교]] {{{-2 (졸업)}}}[br][[휘문고등학교]] {{{-2 (졸업)}}}[br][[경희대학교]] {{{-2 (학사)}}} || ||<-2> {{{#000000 ''' 프로 입단 ''' }}} ||[[1998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1998년 드래프트]] 1라운드 2순위 {{{-2 ([[안양 KGC인삼공사|안양 SBS]])}}} || ||<-2> {{{#000000 ''' 현역 시절 등번호 ''' }}} ||23 || ||<-2> {{{#000000 ''' 병역 ''' }}} ||[[상무 농구단]] (2000~2002) || ||<-2> {{{#000000 ''' 소속 ''' }}} ||[[안양 KGC인삼공사|안양 SBS 스타즈/KT&G 카이츠]] (1998~2008)[br][[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 (2008~2010) || ||<-2> {{{#000000 ''' 가족 ''' }}} ||부인 최미영|| [목차] [clearfix] == 개요 == 한국의 前 농구선수. 빅맨 치곤 극히 단신인(193cm)이었지만 뛰어난 탄력을 바탕으로 KBL의 토종 빅맨으로서 존재감을 보여주었으나, [[2000년]]대 중반 자유계약제 도입으로 KBL 외국인 수준이 높아지면서 출전기회가 급격히 줄어들었던, '''토종 빅맨 잔혹사의 대표 사례''' 같은 선수다. == 선수 경력 == === 고교-대학 시절 === 190cm만 넘으면 무조건 센터를 보던 1990년대 초반 한국농구계에서 매학년마다 190cm이 넘는 장신들이 즐비했던 휘문고[* 1989년 입학: 박준영(195cm,F), [[석주일]](190cm,F) / 1990년 입학: [[서장훈]](207cm,C), [[윤제한]](192cm,F) / 1991년 입학: [[현주엽]](195cm), 윤영필(193cm)]는 당시 농구계에서 이단아같은 팀이었다. 대회 출전 때마다 우승이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의 호화멤버 속에서 윤영필은 2학년 때까지 주로 벤치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길었고, 3학년이 되면서야 주전으로 출장하면서 중학교 동창 [[현주엽]]을 도와 휘문고가 1993년 전국대회 4관왕(춘계, 쌍용기, 전국체전, 학산배)에 오르는데 공헌한다.[* 휘문고는 1993년 참가한 총 6개 대회 중 4개 대회에서 우승, 2개 대회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야말로 상대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특히 팀의 에이스 [[현주엽]]이 1993 아시아 U-22 선수권대회 출전[* 22세 이하 대회이면 1993년 기준 대학 4학년까지 출전하는 대회인데도, 당시 고3이었던 [[현주엽]]이 뽑혔을 정도로 기량이 특출났다.]하느라 빠진 7월 종별선수권대회에서 맹활약하며 팀을 결승까지 이끌었지만 [[신기성]]의 송도고에 우승을 내주기도 했다. 초고교급 선수였던 [[현주엽]]의 그늘에 가리긴 했지만, 탈아시아급 탄력을 어필해왔던 윤영필은 [[구본근(농구)|구본근]](197cm,대전고-연세대), [[이은호]](197cm,상산전자고-중앙대), [[박도경(농구)|박도경]](202cm,부산중앙고-중앙대), [[변청운]](193cm,대경상고-건국대) 등 당시 쏟아져 나오던 센터들을 모두 제치고 94학번 중 No.2 센터로 주목받았고, [[최부영]] 감독의 심혈을 기울인 스카웃 끝에 대학 중위권 팀이던 경희대로 진학하게 된다. 경희대 입학 후 윤영필은 1학년때부터 주전센터를 차지하며 선배 [[장창곤]](194cm,C/F), 후배 [[김성철(농구)|김성철]](195cm,F) 등과 파트너를 이루었고, 4년간 경희대의 포스트를 굳건이 지켰다. [[이창수]](196cm,C)의 졸업 후 변변한 센터가 없던 경희대는, 윤영필의 입학 후 [[서장훈]]의 연세대, [[전희철]]-[[현주엽]]의 고려대를 제외한 다른 대학들과의 골밑 대결에서 우위를 점하며 다시금 대학 4강권에 진입할 수 있었다. 윤영필이 3학년 때인 1996년, 경희대는 [[강혁(농구)|강혁]]-[[김성철(농구)|김성철]]-윤영필 트리오의 무서운 활약을 바탕으로 [[1996 대학농구연맹전]] 1,2차대회에서 모두 준우승하는 등 연고대와 함께 대학농구 3강의 반열에 올랐고, 실업-대학팀이 모두 참가한 마지막 농구대잔치였던 [[1996-97 농구대잔치]]에선 대학부리그 3위에 이어 6강 플레이오프에선 실업부 2위 [[전주 KCC 이지스|현대전자]]를 격파하는 대이변을 일으키며 4강에 진출, 농구대잔치 참가 이래 최고의 성적을 거둔다. 4강에서 만난 최강 연세대[*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서장훈]]이 완벽히 물이 올랐고, [[황성인]]-[[조동현(농구)|조동현]]-[[조상현]]-[[김택훈]]으로 이루어진 베스트 5의 공격력이 엄청났다. 뭐 골밑에 서장훈이 리바운드를 다 잡아주니 3점 슈터들은 맘놓고 쏘기만 하면 되는지라...]와의 경기에서도 경희대 특유의 활동량을 바탕으로 초반부터 밀리지 않는 경기를 펼쳤으나, 1차전 전반 중반 팀의 기둥 윤영필이 상대팀 [[에이스 킬러]] [[김택훈]]의 팔꿈치에 맞아 병원에 실려가는 바람에 게임을 내주고 만다.[* 이때 윤영필은 앞니 3개를 잃고 의치를 넣어야했다;;;] 부상이 심했던 윤영필은 4강 2차전에 결장했고 팀 에이스 [[강혁(농구)|강혁]]마저 김택훈의 팔꿈치에 쓰러지면서, 경희대는 2패로 허무하게 4강에서 탈락하고 만다. 졸업반이 된 윤영필은 팀 전력을 고스란히 보존한 자줏빛 군단을 이끌고 대학 팀들만 참가하는 것으로 바뀐 [[1997-98 농구대잔치]]에 재도전, 6강 결선리그에서 최강 연세대를 꺾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결승에서 재격돌한 휘문고 선배 [[서장훈]]은 겨우 192cm의 윤영필에겐 너무도 큰 벽이었고, 결국 결승전적 2패로 아쉽게 준우승에 그치며 자줏빛 군단으로서의 4년을 마감한다. [[최부영]] 감독이 휘문고 시절부터 많은 공을 들여 스카웃한 만큼 애정을 많이 쏟았던 선수로, [[1996-97 농구대잔치]] 4강에서 앞니가 부러져 실려갔을때 [[최희암]] 감독에게까지 가서 크게 화를 내며 항의했었고, [[1997-98 농구대잔치]] 결승에서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을때 최감독이 울먹이면서 "우리 영필이 우승 한 번 하고 졸업했어야 하는데~"[* 윤영필의 경희대 시절 4년간 [[대학농구연맹전]] 준우승 2차례와, MBC배 준우승 1번, 농구대잔치 준우승 1번까지는 했지만, 우승은 한번도 못했다. 윤영필이 졸업한 1997년에야 경희대는 MBC배에서 사상 첫 우승을 따냈고, 이는 [[이창수]] 재학시절이던 1991년 전국체전 금메달 이후 6년만의 전국대회 우승이었다.]라고 인터뷰한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 프로 시절 === "[[현주엽]] 드래프트"로 불렸던 1998년 KBL 첫 드래프트에서 윤영필은 [[김택훈]], [[이은호]], [[신기성]] 등과 유력한 2순위 후보였다. 결국 청주 SK에 이어 전체 2순위를 뽑은 [[안양 KGC인삼공사|안양 SBS 스타즈]]의 선택을 받은 윤영필은, 데뷔 첫 시즌엔 팀 선배이자 국가대표 파워 포워드 [[정재근(농구)|정재근]]의 존재로 인해 주로 식스맨으로 출전해야만 했고 [[서장훈]]-[[현주엽]](청주 SK), [[신기성]](원주 나래), [[이은호]](인천 대우) 등 다른팀 루키들에 비해 큰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다. 두번째 시즌인 99-00 시즌 초반에도 팀이 [[클리프 리드]](190cm,PF)-데이먼드 포니(203cm,C)의 외인 빅맨 듀오를 선발하는 바람에 좀처럼 출장기회를 얻지 못했으나, 시즌 중반 이들 외인 듀오가 당시 김인건 감독과의 불화로 태업을 하다 동시에 퇴출되었고, 교체 외인으로 가드-센터 조합인 퀸시 브루어(192cm,SG)-데릴 프루(200cm,C) 콤비가 합류하면서, 토종 빅맨인 윤영필의 출장시간이 늘어나게 된다. 더군다나 팀의 舊 에이스였던 [[정재근(농구)|정재근]]이 시즌내내 부상에 골골대면서 부진했던 탓에, 당시 김인건 감독은 시즌 후반부터 신인 [[김성철(농구)|김성철]]과 2년차 윤영필을 주전 3-4번으로 출전시켰고, 시즌내내 하위권을 맴돌며 부진했던 안양 SBS는 이들 경희대 콤비와 외인 에이스 브루어의 활약 덕분에 막판 연승을 달리며 극적으로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리그 5위)한다. 윤영필은 정규리그 평균 '''8.6득점-4.1리바-0.9어시-1.6스틸'''을 기록[* 안타깝게도 이게 커리어 하이 시즌이었다. 이후 완전히 식스맨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유력한 기량발전상 후보로 꼽히기도 했지만 결국 출장시간이 좀더 길었던 창원 LG [[박훈근]]이 수상했다. 대신 윤영필은 99-00 시즌 '''야투성공률 1위(62.9%)''' 타이틀을 가져간다. 플레이오프 6강전에서 만난 리그 4위 [[원주 동부 프로미|원주 삼보 엑써스]]와의 경기에서, 윤영필은 4경기 평균 14.75득점을 기록하며 상대적으로 약했던 원주 삼보의 골밑을 적극 공략했고, 원정 1,2차전을 모두 잡는 등 3승 1패로 업셋을 일으키며 안양 SBS를 4강까지 진출시킨다.~~하지만 4강 플레이오프 [[전주 KCC 이지스|대전 현대 걸리버스]] 전에서는 윤영필이 매치업 상대인 최고 외국인선수 [[조니 맥도웰]]을 상대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털리면서 3연패로 깔끔하게 탈락한다.~~ 프로 두시즌을 치르고 [[국군체육부대|상무]]에 입대한 윤영필은 대학 시절 ~~앞니 바사삭~~ 악연이 있던 [[김택훈]]과 함께 상무의 골밑을 지키며 팀을 [[2000 농구대잔치]] 결승까지 이끌지만, 결승에서 중앙대의 [[송영진(농구)|송영진]]-[[김주성(농구)|김주성]] 트윈타워에 털리며 준우승에 그친다. 매직히포 [[현주엽]]까지 입대하면서 전력이 강화된 상무는 [[2001-02 농구대잔치]] 결승에서 또 다시 중앙대와 맡붙게 되는데,[* 송영진이 졸업하고 4학년이 된 [[김주성(농구)|김주성]] 혼자 골밑을 지키고 있었다.] 이 경기에서 상무는 [[김주성(농구)|김주성]] 하나를 막기 위해 [[현주엽]], [[정훈종]], [[김택훈]], 윤영필 등 빅맨 4명을 총동원했고, 이 중 김택훈, 윤영필이 5반칙 퇴장을 당할 정도로 김주성 하나를 집중수비한 끝에 중앙대를 87:84 3점차로 간신히 꺾고 상무의 [[농구대잔치]] 첫 우승을 달성한다. 하지만 제대 후 복귀한 02-03 시즌 당시 KBL은 대부분의 팀들이 외국인 선수 두 명을 모두 빅맨으로 선발하고 있었고,[* 국보급 센터 [[서장훈]]을 FA로 영입한 [[서울 삼성 썬더스|서울 삼성]]과, 루키 [[김주성(농구)|김주성]]을 뽑은 [[원주 DB 프로미|원주 TG]]만 예외로, 각각 스윙맨인 [[아비 스토리]](192cm,SF), [[데이비드 잭슨]](192cm,SG)을 뽑았다.] 이는 윤영필의 소속팀 안양 SBS도 마찬가지였다. 페넬 페리(193cm,PF), 앤서니 글로버(195cm,PF) 등 외인들에 밀려난 윤영필은, 외국인 선수를 한 명만 기용할 수 있는 2쿼터에만 주로 출전하는 "2쿼터의 사나이"로 출전하여 같은 신세가 된 토종 빅맨 [[이창수]](울산 모비스), [[박훈근]](대구 동양), [[송영진(농구)|송영진]](창원 LG) 등과 매치업하게 되었고, 이 바람에 평균 출장시간은 10분 남짓으로 줄어든다. 자유계약 선발 외국인들이 몰려기 시작한 첫 시즌인 04-05 시즌, 안양 SBS는 [[단테 존스]] 열풍 속에서 윤영필이 나름 2쿼터를 잘 지켜주면서 플레이오프 4강까지 올랐고, 윤영필은 그간의 활약을 보상받으며 시즌 종료 후 40% 상승한 1억 4천만원의 연봉에 안양 SBS와 FA 재계약을 맺는다. 하지만 다음 시즌부터 다른 팀 외국인 선수들의 기량이 안드로메다급으로 높아지면서 윤영필 같은 단신 빅맨으론 수비 자체가 되지 않았고, 그나마 외곽슈팅 능력이 나은 [[이현호(농구)|이현호]]가 2쿼터용 빅맨으로 중용되기 시작한다. 07-08 시즌 다시 외국인 선수 선발제도가 트라이아웃으로 바뀌면서 외인들의 수준이 다소 낮아지긴 했지만, 32세의 노장이 된 윤영필은 팀의 젊은 빅맨들인 [[이현호(농구)|이현호]], [[김일두(농구)|김일두]] 등에 완전히 밀려났고 평균 출장시간은 5분 미만으로 떨어진다. 시즌 종료 후 두 번째 FA가 된 윤영필은 [[안양 KGC인삼공사|안양 KT&G]]와의 협상이 결렬되며 FA 시장에 나왔고, 전시즌 대비 40%가 감소한 8400만원으로 깎인 연봉에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와 FA 계약을 맺는다. 하지만 전 시즌에 국보급 센터 [[서장훈]]을 영입한 인천 전자랜드에 윤영필의 자리는 없었고, 출장 기회를 잡지 못해 D리그를 뛰는 등 초라한 말년을 보내다 2009년 은퇴했다. [[전희철]], [[현주엽]], [[송영진(농구)|송영진]] 등 국가대표 출신 [[파워 포워드]]들은 물론, [[박훈근]], [[이현호(농구)|이현호]] 등 많은 토종 빅맨들이 프로에 오면서 3번으로 포지션을 변경한 데 반해, 193cm의 단신이었음에도 정통 빅맨으로서의 자리를 지켰던 윤영필은 아이러니하게도 '''"KBL 외국인선수 제도의 희생양"'''의 예시로 항상 나오는 이름이 되어버렸다. 윤영필, [[이은호]] 등의 희생 덕분에 2017년 현재 '외국인 선수 2명 동시 기용은 두 쿼터 이내', '장단신 외국인 선발', 그리고 이후 신장제한 폐지 후에도 '2명 보유 1명 출전 유지' 같은 보완된 제도가 나올 수 있었다. 만약 10년 전처럼 NBA, 유로리그 출신 외국인 빅맨들이 마구잡이로 영입되는 상황이 다시 벌어진다면, 현재 [[김준일]], [[장재석]], [[김현민(농구선수)|김현민]] 같은 선수들도 윤영필과 마찬가지 운명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 여담 == 휘문고 2학년때 [[1992-93 농구대잔치]] 올스타전 덩크슛 컨테스트에 휘문고 동기 [[현주엽]], [[황인성(농구)|황인성]]과 함께 번외로 출전한 적 있다. 당시 고교생 답게 완전 빡빡머리다. 윤영필은 별명으로 [[판다]]라고 불리기도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_abn2P-9a4I|점프볼 영상]] 장인은 축구인 [[이회택]]이다. == 관련 문서 == * [[농구 관련 인물(한국)]] * [[안양 KGC인삼공사/선수단]] *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선수단]] [각주] [[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농구 선수]][[분류:1975년 출생]][[분류:1998년 데뷔]][[분류:2010년 은퇴]][[분류:파워 포워드]][[분류:센터(농구)]][[분류: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은퇴, 이적]][[분류:서울도곡초등학교 출신]][[분류:휘문중학교 출신]][[분류:휘문고등학교 출신]][[분류:경희대학교 출신]][[분류:해평 윤씨]][[분류:상무 농구단/전역]][[분류:안양 정관장 레드부스터스/은퇴, 이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