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07년 출생]][[분류:1971년 사망]][[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6.25 전쟁/군인]][[분류:대한민국의 가톨릭 신부]][[분류:천주교 서울대교구]][[분류:가톨릭 수도회]][[분류:예산군 출신 인물]][[분류:파리 대학교 출신]] [목차] == 개요 == 尹乙洙, [[1907년]] [[10월 2일]]~[[1971년]] [[5월 9일]](향년 63세) [[토마스 아 켐피스]]의 저서 [[준주성범]]의 [[한국어]] 번역자이자, [[한국 가톨릭]]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은 [[신부(성직자)|신부]]. [[http://www.inbo.or.kr|인보성체수녀회(隣保聖體修女會)]]의 창설자이기도 하다. == 출생과 신학교 입학 ==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는 1907년 10월 2일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태어나, 1920년 [[서울]]로 상경하여 소신학교([[용산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동기들 중에는 제6대 [[평양교구]]장인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 교회사학자이자 [[고아]]들을 극진히 돌본 것으로 유명한 오기선 요셉 신부도 있었다.[* [[한국전쟁]] 중에 이북에서 남쪽으로 피난 온 임길순 암브로시오에게 [[밀가루]] 2포대를 주어 빵집 [[성심당]]을 차릴 수 있게 도와준 신부. [[꽃동네]]를 창설한 [[오웅진]] 사도 요한 신부도, 소년 시절에 오기선 신부를 보고 많은 감명과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소신학생 윤을수는 독학으로 [[프랑스어]]를 공부하여 프랑스어판 '''[[준주성범]]을 번역'''하기도 했다. 번역 작업은 나중에 [[성품성사|사제서품]]을 받은 후에 마무리하였는데, [[라틴어]]판 <준주성범>과 프랑스어판 <준주성범>을 참고하여 번역했다. == 사제생활 == 소신학교와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대신학교]]를 마치고 1932년 12월 17일 [[명동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는,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 매괴 성모순례지|장호원 성당]][* 현 [[천주교 청주교구]] 감곡성당] 보좌신부를 거쳐 1934년 3월 동성상업학교[* 현 [[동성중학교(서울)|동성중학교]] + [[동성고등학교]]] 을조(乙組)의 교사로 부임했다. 당시 동성상업학교는 갑조(甲組)와 을조로 나뉘어 있었는데, 갑조는 일반 학급이었고 을조는 [[사제]]가 되려는 신학생들이 공부하는 소신학교였다. 윤 신부는 소신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가톨릭교회의 월간지인 <가톨릭 청년>과 <가톨릭 연구>에 여러 글들을 썼다. 1936년에는 <라한사전>을 번역, 출간하여 학생들의 [[라틴어]] 공부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제9대 [[서울대교구]]장 [[아드리앙 조셉 라리보]] 주교는 윤 신부의 학문적 재능을 높이 평가해, 1937년 [[프랑스]]의 [[파리 대학교]]로 [[유학]]보냈다. 윤 신부는 1939년 <한국[[유교]]사론>이라는 [[논문]]으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아, '''[[한국 가톨릭]] 최초의 박사 [[신부(성직자)|신부]]'''가 되었다. 이후 윤 신부는 [[이탈리아]] [[로마]] [[교황청립 라테라노 대학교]]에서 교회법을 공부하고, [[미국]] [[뉴욕]]문화원 교수를 지내다가, [[광복]] 후인 1948년에 귀국하여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제2대 학장이 되었다.[[http://fr.catholic.or.kr/louischang/whoego/2bu/student.htm|#]]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에는 [[미 육군]] 제1군단 [[군종 신부]]로 사목했다. 당시 유엔군이 [[서울]] 수복작전을 펼치면서 [[명동]] 인근의 건물들은 대부분 파괴되었는데, [[미군]]에서는 [[명동성당]]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을 물리치기 위해 “성당 일대를 모조리 폭격하고, 이후에 새로 성당을 지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윤을수 신부가 유엔군 사령부와 미군 사령관 등을 간곡하게 설득하여, 명동성당은 파괴되지 않고 원형을 보존할 수 있었다.[[https://news.v.daum.net/v/19990617183900183|#]][[http://mdsd.or.kr/bbs/content.php?co_id=1010&tabs=2&tabs2=5|#]][[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655201&path=201610|#]] == 인보성체수녀회 창설 == 윤 신부는 학문적 재능이 뛰어났으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사회복지사업에도 관심이 많았다. 한국전쟁 중에는 전쟁[[고아]]들을 돌보았으며, 사회사업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하여 1956년 11월 19일 '''구산후생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2년제 여자초급대학으로, '''한국 최초의 사회사업 전문학교'''였다. 이듬해 초에는 학생들 중에서 수도생활에 뜻이 있는 이들을 모아 수도반을 만들었다. 학교는 경영난으로 1964년에 폐교되었지만, 수도반은 정식 [[수도회]]인 '''인보성체수녀회'''로 발전되어 [[교황청]]의 정식 인가를 받았다. '인보(隣保)'는 [[카리타스|Caritas]][* 자애(慈愛), 자선(慈善), 애덕(愛德)]를 번역한 말이고, '성체(聖體)'는 [[미사|성체성사]]의 신비를 공경하고 성체성사의 정신을 따라서 살라는 의미이다. 현재 인보성체수녀회는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중노송동]]에 본원,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에 분원,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에 수련원을 두고 있으며, 본당, 사회복지, 유아교육, 해외선교 등등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있다. == 말년 == 이후 [[https://www.lazarus.or.kr|성 라자로 마을]][*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에 있는 [[한센병|나환자촌]]. [[천주교 수원교구]]에서 운영하고 있다.] 제3대 원장을 지내기도 한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는, 1971년 5월 9일 “어머니 품에서 땅에 묻힐 때까지 나는 웃으며 행복에 넘쳐 살았다고 동서(東西)에 전해 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병으로 사망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토마스 아 켐피스,version=13)]